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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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에 출장을 갔다. 짧은 출장길, 오는 길만은 낭만적인 기차여행을 하고 싶었고

KTX 티켓을 끊고 남은 한시간반을 대전역 앞 서점과 우연히 발견한 빵집 성심당에 썼다.

 

그리하여 우연히 내품에 들어온 책

은희경의 <태연한 인생>

 

 

창비 책인데 문지 느낌 나면서도 더 심플한 디자인이 좋다.

표지의 종이재질도 인간적이랄까, 맨질맨질한 게 손에 쏙 들어온다.

 

열차의 출발과 함께 소설의 첫 장을 넘기는 기분이란, 째진다.

내가 좋아하는 책읽기 장소가 몇 개 있는데

조용한 카페, 밤의 침대, 사람 없는 들판, 그리고 기차 안-

 

처음은 류의 어머니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류의 아버지가 류의 어머니를 보고 첫눈에 반하는 장면.

사랑에서 가장 극적인 모멘트 아닐까 하는데. 첫눈에 반하기도 쉽지 않으니.

여주인공 류의 이야기는 좀 심심하다. 정적이랄까. 류 자신보다는 그의 부모에 대한 스토리가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해서 그런 것일 수도.

 

그리고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는 50세 정도의 대학교수로, 등단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소설가다.

그는 아내와 헤어져 13층 오피스텔에 살며 주변의 카페와 식당을 홀로 전전한다.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독백(그의 관점에서의 여러가지 잡설)으로 구성되는데 이 인간, 좀 흥미롭다.

왠지 어디선가 한번쯤 만난 적 있는 대학원 선배를 연상시키는 요셉-은 류와 한때 사랑한 적이 있는 사이다.

술자리 장면들은 홍상수 영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은희경의 소설은 <새의 선물>을 가장 재미있게 읽었고 <타인에게 말걸기> 이런 책을 좋아했다.

최근 소설들은 기억에 남는 게 없었다.

나는 그녀를 서사가 풍부한 작가로 기억한다.

그런데 이번 소설은 스토리를 따라가기보다는, 인물을 따라간다.

인물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생각들을 따라간다.

조금 다른 접근의 소설이었고, 그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요셉이라는 인물에 많은 부분 흥미를 느껴서기도 하다.

 

<은교>도 소설가들이 주인공이어서 흥미로웠는데 이 소설도 마찬가지 효과가 있었다.

사회적으로 낮은 대접을 받는 지식인(소설가)의 인생이 흥미로웠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익숙하다. 나는 지금 그 인생과 거리가 비록 멀지만.

'태연한 인생'이라는 제목도 참으로 마음에 든다.

그리하여 책을 덮을 즈음 너무 아쉬웠다. 이 소설이, 그 인생 구경이 끝났다는 사실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남의 인생 구경.

 

 

-책 속에서

 

"카페가 정말 많네요. 선생님 단골은 어디예요?"

"그런 거 없어. 난 잘해주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 무조건 어느 한 장소로 가는 것도 싫고 어쩐지 가줘야 할 것 같은 기분도 싫어. 선택의 여지가 많은 걸 자유롭다고 하지. 대신 선택할 만한 게 모조리 싸구려라야 해. 그래야 자유롭게 아무거나 선택할 수 있거든. 서른개도 넘는 카페가 동등하게 싸구려라는 게 이 거리의 매력이지."

-36p

 

이채가 정연에게 이제 알았느냐는 듯 의기양양한 눈빛을 던진 뒤 요셉에게 말했다.

"작가들은 특이한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요. 유머감각도 뛰어나고. 책을 많이 읽으면 그렇게 돼요?"

"아니, 게으름이 필요하지. 술 마시고 놀아야 해. 그런 게 다 예열을 하는 과정이거든. 아무것도 않가고 허비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뒤에 집중력이 생겨난다고 보면 돼.

"그렇구나"

-119p

 

그런 것이 바로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즐거움이었다. 새로운 여자란 마치 티백 속의 마른 찻잎에 뜨거운 물을 붓는 것처럼, 말라버린 채 얇은 종이 속에 갖혀 있던 자신의 존재를 되살아나게 했다. 그리하여 손끝까지 따뜻한 기운이 돌고 향기가 온몸을 채우는 것이다. 상대에게 가까어지고자 하는 의지는 상대와 같아지려는 동기를 유발하는데 그것을 추동하는 과정에서 에너지가 발생했다. 그처럼 낯섦이 자신에게로 옮아오는 변화과정의 이물감이야말로 요셉이 원하는 살아 있는 자의 실감이었다. 남녀관계에서 요셉은 그 시작의 느낌을 가장 좋아했다. 그것은 짧기 때문에 더 강렬했디.

-1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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