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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평점 :
"지하철역에 가면 말이다. 출구 옆에 이런 표지판이 걸려 있지.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내 삶의 경계는 어디쯤일까?
나는 후회가 많은 편이 아니다. 왠만하면 현재에 만족하며 욕심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가끔 과거를 돌이켜보면 후회가 남는 몇몇 순간이 떠오른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왜 그때 그런 말을 했었을까? 누구에게나 후회가 남는 상황과 사람이 있을 것이다.
59살의 늙은 "자크", 그는 자존심이 강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그에게는 22살의 "로라" 라는 젊은 애인이 있다. 그러나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와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성적 능력 저하와 경제적 능력 악화에 대해 큰 좌절감을 느끼게 된다.
[로라, 당신이 없다면, 내가 거기 없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오. 출생에 대해서는 참 바보 같은 말들도 많지! 태어나 세상에 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 산다는 것, 그것은 숨 쉬는 것도, 고통받는 것도, 심지어 행복한 것도 아니야. 산다는 것은 둘이서만 발견할 수 있는 비밀 같은 것이지. 행복은 팀을 이뤄 하는 작업이야. 나는 매 순간을 떠나보내고, 이 느린 행보의 카라반은 행복의 소금을 져나르지. 당신이 내게로 오기 때문이야.] P.61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이별의 위험을 예감하면서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걱정을 털어놓지 못한다. 그녀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 사랑이 아닌 동정심이 될까봐 불안해한다. 자존심이 너무나 강했었던 그는 추한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자살하는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자살 시도를 눈치챈 "로라"는 그의 앞에 나타나 그의 자살을 막고 그를 경계에서 구해낸다. 그녀는 "자크"의 육체적인 매력과 경제력에 반한게 아니었다.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위의 두가지는 "자크"가 걱정하는 만큼 중요한게 아니었다. "자크"는 경계의 끝에서 그녀의 진심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랑과 동정의 경계에서 유효한 승차권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사랑할 때는 말이죠. 모든 걸 다 넘어서 당신과 함께 계속 행복해지고 싶어요. 그런데 누가 당신에게 행복을 운운하나요? 난 당신에게 오로지 사랑에 대해서 얘기하는 거예요. 자크, 당신 이미지 때문에, 당신이 스스로에게 품는 생각 때문에 나를 떠나지는 말아줘요. 그건 너무 추잡해요. 나에게 이 편지 이야긴 하지 말아주세요. 그런 모든 것들, 나에게 얘기하지 마세요. 그저 우리 둘 사이의 모든 것은 저 너머에 있기만을 희망합니다."] P.180
나의 승차권이 유효하지 않게 되는 경계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인생에 대한 후회가 절반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주인공 "자크"는 다행히 그 경계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을 쓴 "로맹 가리"는 그 경계를 못찾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은 대단히 슬프게 읽혔다. 현실도 그가 그린 소설과 같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이전에 읽은 "로맹 가리"의 작품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와 <자기앞의 생>에 비하면 덜 감정적이고 덜 감동적이지만,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어서인지 오히려 더 공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로맹 가리" 특유의 유머감각은 생동감 있는 문장으로 묘사되어 있다. "로맹 가리"는 정말 대단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Ps. 이 작품은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의 순한맛 버전이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