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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의 숲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0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9월
평점 :
N25082
"고독한 걸 좋아하는 인간 같은 건 없어. 억지로 친구를 만들지 않는 것뿐이야. 그러다가는 결국 실망할 뿐이니까."
최근에 책태기가 왔다. 책보다 더 좋은게 생겨서이다. 그렇다고 책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건 아니다. 다만 분산됐을뿐. 게다가 야구도 포스트시즌이다보니 책읽을 시간이 줄었다. 그리고 최근에 읽은 책들이 좀 난해해서 리뷰를 쓸 수도 없었다. 역시 이럴때는 하루키의 작품이 적합하다. 정말 오랜만에 노르웨이의 숲을 꺼내서 읽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바로 다 읽었다.
하루키 마니아로서 하루키 작품중 안좋은게 없지만 그중 가장 좋은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노르웨이의 숲은 언제나 후보중의 하나이다. 하루키 장편중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작품이기도 한 노르웨이의 숲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도 어떤 인물에 대입해서 읽어도 재미있고, 단순 사랑이야기라고 하기에는 담고 있는 의미가 많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와타나베에게는 어린시절 기즈키라는 친구가 있었고, 기즈키에게는 나오코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세사람은 다른사람들과의 관계를 확장하지 않고 세사람 끼리만 친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와타나베와 기즈키는 당구를 치고, 그날 밤 기즈키는 차안에서 자살을 한다. 이후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상실의 아픔을 안고 살아간다.
[나는 그 공기덩어리를 내 속에 느끼면서 열여덟 살 봄을 보냈다. 그렇지만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았다. 심각해진다고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죽음이란 심각한 하나의 사실이었다.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P.49
나오코는 기즈키가 죽기전 많났던 사람이 여자친구인 자신이 아닌 와타나베라는 사실에 상처를 입고, 또한 와타나베의 자살의 이유가 자신 때문은 아닌지 자책하며 힘겹게 살아간다. 와타나베 역시 마찬가지다. 무엇하나 소중한것 없이 허무하게 될대로 되라는 식의 냉소적인 방식으로 고독하게 살아간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그렇게 주변을 병들게 한다.
[4월 중순에 나오코는 스무 살이 되었다. 나는 11월생이니까 그녀가 나보다 일곱 달 정도 빠르다. 나오코가 스무 살이라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나나 나오코는 언제까지고 열여덟이나 열아홉 언저리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맞지 않느냐는 느낌이었다. 열여덟 다음은 열아홉이고, 열아홉 다음은 열여덟. 그렇다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다. 그리 고 가을이면 나도 스무 살이다. 죽은 자만이 영원히 열일곱이었다.] P.70
와타나베와 나오코는 우연히 도쿄의 거리에서 마주친다. 기즈키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두 사람이 함께하게 된 것이다. 나오코에 대한 연민을 느낀 와타나베는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나오코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와타나베에 대한 끌림과 기즈키에 대한 미안함 등 복잡한 감정을 느낀다.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고, 사람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겪던 나오코는 결국 대학을 휴학하고 요양원에 들어간다.
[이 편지를 몇백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 밀려왔다. 그것은 나오코가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았을 때 느꼈던 슬픔이었다. 나는 그 애달픈 마음을 어떤 다른 것으로 바꾸어 버릴 수도, 마음속 어떤 장소에 간직할 수도 없었다. 그것은 내 몸을 스쳐 가는 바람처럼 아무런 윤곽도 없고 무게도 없었다. 나는 그것을 몸에 두를 수조차 없었다. 풍경이 내 눈앞을 천천히 지나쳤다. 그들이 하는 말은 내 귀에 닿지 않았다.] P.80
동시에 와타나베는 자신과 같은 대학을 다니는 미도리라는 여학생을 알게 된다. 죽음에 가까운 나오코와는 다르게 미도리는 통통 튀는 생명이 느껴지는 밝은 사람이었다. 와타나베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보이는 미도리에게 끌리면서도 나오코를 버릴 수 없다는 책임감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
[하나는, 이렇게 나를 만나러 와 준 것에 대해 내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아줬으면 하는 거, 굉장히 기쁘고, 정말로 구원받은 기분이야. 혹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정말 그래. 다른 하나는 나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네 결에 있었다는 걸 언제까지나 기억해 줄래?"] P.20
와타나베는 요양원에 있는 나오코에게 계속 편지를 쓰고 구애를 지속한다. 요양원에도 찾아가 그녀를 만난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여전히 방황하고 있었다. 와타나베는 지속적으로 현실을 살아가라고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하지만 결국 나오코는 기즈키가 있는 죽음을 택한다. 이후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자살에 충격을 받고 방황한다. 와타나베 역시 나오코 처럼 죽음을 택할까? 아님 미도리가 있는 현실을 택할까?
[어이, 기즈키, 나는 생각했다. 너하고는 달리 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그것도 제대로 살기로 했거든, 너도 많이 괴로웠을 테지만 나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야. 정말이야. 이게 다 네가 나오코를 남겨 두고 죽어 버렸기 때문이야. 그렇지만 나는 그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아. 왜냐하면 난 그녀가 좋고 그녀보다는 내가 더 강하니까. 나는 지금보다 더 강해질 거야. 그리고 성숙할 거야. 어른이 되는 거지. 그래야만 하니까. 지금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열일곱, 열여덟에 머물고 싶었어.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난 이제 십대 소년이 아니야. 난 책임이란 것을 느껴. 봐, 기즈키, 난 이제 너랑 같이 지냈던 그 때의 내가 아냐. 난 이제 스무 살이야. 그리고 나는 살아가기 위해서 대가를 제대로 치러야만 해.] P.415
청춘은 방황할 수 밖에 없다. 10대 시절에 느낄 수 밖에 없는 어른이 된다는 두려움도 크다. 대부분은 그냥 넘어가지만 누군가는 두려움을 느끼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의 극단적인 선택은 주위에도 위험을 줄 수 있다. 나오코는 삶(와타나베)과 죽음(기즈키)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했다. 이제 3인방 중 유일하게 살아있는 와타나베에게도 삶(미도리)과 죽음(나오코)이라는 선택지가 주어진다.
방황하는게 어디 청춘 뿐일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상실되어 가는건 늘어난다. 결국 한때 가깝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나의 몸과 마음도 예전같지 않다. 그래도 삶과 죽음 사이에서, 사랑과 상실 사이에서 대부분은 전자를 택할것이다. 잃더라도 괜찮다, 삶과 사랑은 내가 포기하지 않는 한 끝나지 않으니까.
["비스킷 깡통에는 여러 종류 비스킷이 있는데 좋아하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 있잖아? 그래서 먼저 좋아하는 것을 먹어 치우면 나중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는 거야. 나는 괴로운 일이 있으면 늘 그런 생각을 해. 지금 이걸 해 두면 나중에는 편해진다고. 인생은 비스킷 깡통이라고."] P.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