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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 개정판 ㅣ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평점 :
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단 한권의 책이 있나요?
˝알베르 카뮈˝를 작가의 세계로 안내한 책 <섬>은 ˝카뮈˝의 스승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장 그르니에˝가 쓴 산문집이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서문에 ˝알베르 카뮈˝가 쓴 추천사 ˝<섬>에 부쳐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인데 내용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스승의 글에 제자기 서문을? 하긴 ˝카뮈˝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이니까 이해는 된다. 그런 그가 존경하고 당시 실존하고 있는 스승이 쓴 책이라고 하니 왠지 벅찬 감동이 전해졌다. ˝카뮈˝가 쓴 서문에는 그가 스무살때 이 책을 접한 감동이 고스란히 적혀 있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펼쳐 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 한다.] P.15
˝카뮈˝가 나를 부러워 하다니 왠지 영광스럽기도 하고, 이렇게 찬양을 하는 그의 따뜻한 마음이 잘 느껴졌다.
이 책은 총 여덟편의 철학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든 산문이 인간, 삶, 사랑 그리고 고독에 대해 서정적이고 따뜻한 문체로 쓰여있다. 마치 독자에게 삶은 기나긴 여행이고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위로의 느낌을 받았다. 책에서 특히 좋았던 문장과 감상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공의 매혹>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그것은 다른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속에 깊이 묻혀 있다. 다른 순간들은 그 위로 헤아릴 수없이 지나갔지만 섬뜩할 만큼 자취도 없다. 결정적 수난이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P.25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특별한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순간을 뒤로 하고 우리는 또다시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게 된다. 하지만 결코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내 어린 시절, 반듯이 누워서 그리고 오래도록 나뭇가지 사이로 물끄러미 바라보았던 하늘, 그리고 어느날 싹 지워져 버리던 그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P.34
지나온 시간들은 단지 오늘을 위한 시간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과거에 얽매여서,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결정적이고 아름다웠던 그 순간만을 기억하면 된다.
<케르겔렌 군도>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P.91
어차피 우리는 우리가 알고싶어 하는 것들을 완벽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보여지는 것 뿐이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완벽히 알 수 없고, 중요한 부분은 드러내지도, 드러낼수도 없다. 어차피 인간은 섬일 뿐이다. 바다로 둘러쌓여 있어서 결코 만날 수 없는.
<행운의 섬들>
[언제나 충만한 힘을 갖고 싶으나 그러지 못한 사람들에게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한 달 동안에, 일 년 동안에 몇 가지의 희귀한 감정들을 체험해 보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 우리 마음속의 저 내면적인 노래를 충동할 수 있는 그런 감동들 말이다. 그런 내면적 노래가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P.95
여행이란 무엇일까? 나를 둘러싼 것을 벗어나기 위해 어디론가 가는걸까? 아니, 여행은 나를 만나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어느것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곳에서만 그토록 찾던 나를 마주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과 마음은 원래 닿을 수 없는, 서로 떨어져 있는 섬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바다가 가로지른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건 내가 그 섬안에서 나를 온전히 만난다는 거니까.
<이스터섬>
[그러나 사람들은 말로는 나하고 같은 생각인 척해 놓고는 뒤에 가서... 내가 왜 변했느냐고요? 나도 모르겠어요. 아마 나는 본래부터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P.113
생각이 같은 수는 없다. 다른사람이 나하고 같다고 느껴지더라도 일시적일 뿐, 결코 같을 순 없다. 그건 단지 공감이었을 뿐이다. 한결같을 순 없다. 변했다고 원망할 필요는 없다. 나도 마찬가지니까. 영원한건 없다.
좋은 문장들에 대해 간단히 내 감상을 적어봤다. 이처럼 <섬>을 읽으면서 나에 대해, 사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하지만 깊이 있고 작가의 성찰이 담긴 이 책의 문장들은 독자로 하여금 한번 읽고 공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나같은 경우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좋은 문장을 두세번 읽었고 여전히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많고, 이해를 했다고 생각하는 부분 역시 이해를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 책은 읽는것 만으로도 뭔가를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왜 ˝장 그르니에˝는 <섬>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섬들을 소재(+고양이)로 글을 썼을까? 아마 인간은 섬처럼 고독하고 홀로 있을수 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싶어서였지 않을까? 하지만 섬은 홀로 있지만 결코 다다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섬은 바다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부지런히 바다와 접촉하면서 살다 보니 내 마음속에는 만사가 헛된 꿈과도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P.29
얇은 두께이지만 쉽게 읽어지지 않았던 책, 하지만 그만큼 여운이 많이 남아 항상 옆에 두고 싶은 책이었다. 연휴에 한번 더 읽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