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와 같은 숙의 상대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큰 종교단체 소속인 중견 종교지도자였습니다. 혹 있을 수 있는 실덕을 막으려 신분을 감추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얼핏 보면 당차게 느껴지지만, 그 눈에는 불안이 강고한 구조로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불안의 내력은 길고 깊었습니다. 어린 시절 지속·반복적으로 어머니 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길을 잃고 홀로 거리를 헤맨 적도 있었습니다. 사춘기 시절 맞닥뜨린 우발적 성경험이 일으킨 수치심과 죄책감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녔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잊히고 완화되는 것은 없는 반면, 사회생활을 통해 만남의 기회가 많아질수록 대인공포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습니다. 온갖 치료가 무용했습니다. 그는 결국 종교에 귀의했습니다. 마지막 희망도 그다지 큰 도움을 주지는 못 했습니다. 그렇다고 어찌 치료를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의 종교에 예를 갖추면서 폭넓은 숙의를 이어나갔습니다. 종교 경전이나 큰 스승들의 가르침이 동원되었고 그에 상응하는 의학적 담론이 오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는 무릎을 쳤습니다. 제 입을 나와 그의 귀에 날아든 ‘정서적 지지’라는 평범한 말 한 마디가 그의 가슴속 은산철벽에 쩡 하고 금을 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에게 익숙한 어휘와 담론은 대부분 ‘이성적 이해’였으니 말입니다.


정서적 지지를 자신의 내부 속으로 들여 놓는 일이 기적처럼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수십 년 동안 반대하고 내쫓으려고만 했던 어둠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어찌 쉽겠습니까. 일거에 좋아질 것이라는 마법적 희망까지 내려놓아야 비로소 동이 트듯 치유의 길이 열리기 마련입니다. 그는 필경 이 이치를 따르고자 하는 종자신뢰를 얻었을 것입니다.


삼베 바지에서 방귀 빠지듯 그의 발길이 사라졌습니다. 저는 그런 그의 선택을 존중했습니다. 제법 세월이 흐르는 동안 드물지 않게 그의 간절했던 눈길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아직도 그가 그의 종교에 복무하고 있는가는 별로 궁금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지금 자유 영혼이 되어 있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었던 그 종교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정서를 지지하면서 고요히 살아가지 않을까 짐작해보기만 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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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난방인 사춘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여리고 고운 마음씨, 그 마음씨를 똑 닮은 목소리를 지닌 교사 한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온 마음과 몸을 금방 눈물에 데쳐낸 듯 짙푸른 슬픔의 향이 흠뻑 밴 모습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애착 형성이 남달랐던 그는 어머니의 죽음에 즈음해서 자신이 본디 슬픔에 취약한 사람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마치 생애 초기의 이별과 같은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사무치게 그리울 때가 많았습니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매우 가슴 아파했으며,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내내 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그에게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슬픔의 해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온갖 방법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무책임한 의료인한테 입은 상처 또한 커서, 단순히 우울증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병리 상태 속에 휘감겨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생명감각으로 그의 아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며 빛이며 냄새에 가 닿도록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그 또한 곡진한 감각으로 자신의 서사를 가꾸어갔습니다. 첫날 숙의를 끝내고,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뒤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 순간 누가 뒤에서 포근히 저를 감싸 안는 거예요. 하도 편해 놀라지도 않고 가만히 느껴보니 선생님이셨습니다.”


아, 숙의가 이런 풍경도 그려내는구나! 놀란 것은 오히려 저였습니다. 그 뒤 그와 저는 슬픔의 사람이 왜 다 퍼주며 사는지, 거절도 주장도 못 하는지, 슬픔을 펼쳐 드러내지 못 하는지·······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삶의 절반은 전투라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그는 조금씩 여태 살아온 그 맞은편 진실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까지 그는 자신에게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차마 밝히지 못 했습니다. 일대 회심의 날이 왔습니다. 그는 드디어 가슴을 고이 열어 고백했습니다. 순간, 교실은 신비의 침묵에 빠져들었습니다. 그 후, 제자들이 선생님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음은 물론입니다. 무엇보다, 상처 입은 한 아이가 다가와 엄마에게서 버려진 자신의 아픔을 고백하는 감응 사건이 터져 그를 감동시켰습니다. 아마 그 두 사람, 결코 잃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이지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와 제가 그렇게 가슴을 여는 일은 작은 시작일 뿐입니다. 열고 또 여는 일은 쭉 계속될 것입니다. 제가 죽고, 그가 죽고, 또·······죽어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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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까치 능선 호젓한 곳에 아리잠직한 지성소가 있다.

산객들이 오며가며 쌓은 것이다.
가운데 조그만 탑은 나홀로 매일 돌 한 개씩 올렸다.
남은 생애를 향한 소미심심의 신뢰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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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아란 없다. 문제부모가 있을 뿐이다.’ 진부해서 진득한 진실입니다. 이 진실의 전형인 그가 까만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로 저를 찾아온 것은 고작 10대 중반 때였습니다. 그는 역설 자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맹하게 풀린, 다른 한편으로는 총기가 번뜩이는 내면 풍경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발음도 분명치 않고 급한 어조로 툭툭 던지는 말의 형식과 깜냥대로 근거와 서사를 갖춘 말의 내용이 기이한 화쟁 미학을 조몰락거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그를 묘사한 부모의 말과 달랐습니다. '엄친아'에서 쓰레기로 떨어진 탕아가 아니었습니다. 이런 문답으로 확인한 바입니다.


“어머니가 늘 그러실 텐데. 언젠가 제자리로 올라올 거라고. 바닥 이전 네 자리는 어디니?”


“그런 바닥 같은 거 없는데요.”


그렇습니다. 바닥이 있다면 누구나 그 바닥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닥은 결코 어디서 떨어져 나뒹구는 천한 곳이 아닙니다. 올라갈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는 그 진실을 깨치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와 함께 ‘바닥을 치는’ 선문답을 시작했습니다. 화두는 아래와 같습니다.


(1) 전체적 관점을 지니기 위해 뒷문을 열어둔다.

(2) 경계 밖에서 나를 본다.

(3) 자기 자신의 연인으로 살아간다.

(4) 나는 매혹적인 사람인가?

(5) 나는 어떤 소향을 지닌 사람인가?

(6) 진실의 대칭성(1): 평범과 비범의 화쟁

(7) 진실의 대칭성(2): 삶의 두 동력-타인의 인정과 자기 신뢰

(8) 진실의 대칭성(3): 빛과 어둠-가지 않으면 오지 못 한다.

(9) 현실적 인생관: 반걸음 앞을 내다보고 한걸음씩 내디딘다.

(10) 현실적 자기성찰: 바로, 지금 여기서 나는 무엇인가?

(11) 현실적 생활 기조: 견디면서 준비하고 준비하면서 견딘다.


10대 중반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거르지 않고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난해하고 심지어 현학적이다 싶은 어휘와 문장을 나오는 대로 구사하면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못 알아듣는다는 느낌이 없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올 것이 왔습니다. 드디어 어머니와 용서를 주고받으며 현실 생활로 복귀시키기 위해 피부에 와 닿는 화두를 꺼내들었습니다.


(12) 사람과 삶을 치유의 관점에서 보기(1): 어머니


바로 그 순간, 어머니는 아이 덜미를 낚아챘습니다. 어머니가 저와 그의 숙의를 더는 참지 못 한 것입니다. 어머니의 불운이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아이는 머지않아 저를 다시 찾아올 것입니다.”


아이는 3년 뒤 대학생이 되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는 나름 전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불안이 여전히 남아 있고, 예의 그 반골 ‘끼’가 다소 완화되긴 했지만, 대신 전술전략을 보유했습니다. ‘이렇게 다시 왔으니 앞으로도 계속 오겠다.’며 총총히 떠났습니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그를 위해 화두를 준비해 놓고 기다립니다.


“(13) 철학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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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뭐랄까, 어떻게도 명쾌히 규정할 수 없는 심각한 장애를 지닌, 그러나 너무도 정상적인 언행 일부를 전유한, 매우 독특한 문제적 인물이었습니다. 미국 정신의학 협회APA가 펴내는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DSM-5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그만의 증후군-가벼운 정도의 조현병, 반사회성 성격장애, 간헐적 폭발장애, 공황장애, 의사소통장애와 같은 유형이 뒤섞여 있으나, 이들 모두로도 포괄이 안 되는-에 사로잡힌 채 사회의 변방에서 나름 분투하며 사는 청년이었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과도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힘든 진지함, 성실함, 정중함, 의로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몇 번 대화를 나누고 나서야 그 언행이 어른 흉내를 내는 아이의 것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부풀려져 있으며, 기묘하게 어긋난다는 사실을 그 자신은 전혀 인지하지 못 합니다. 그런 진지함, 성실함, 정중함, 의로움을 상대방이 수용하지 않는 상황이 닥치면 급작스럽게 모든 것을 한꺼번에 부수어버립니다. 같은 일이 거듭 반복되면서 사회 공동체로 본격 진입하는 것 자체가 무한히 유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극은 아주 어린 시절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실내구조가 2층으로 되어 있는 집의 2층 난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심리적 충격은 물론이고 뇌를 다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임에도 부모는 아이가 울음을 멈추자 걱정도 멈추었습니다. 이후 아이가 보이는 상식 밖의 언행을 부모, 특히 아버지는 질병 아닌 윤리의 차원에서 대했습니다. 아버지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난폭한 매질을 가했습니다. 그는 그 때 그 공포를 너무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병적 과장을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그의 반응이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인이 된 다음에도 아버지가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거나 때리는 시늉만 하면 그는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했습니다.


겁먹은 강아지가 크게 짓는 법입니다. 그는 사소한 충돌에도 격분 반응을 절제하지 못 했습니다. 극단적인 언어로 맞서는 것은 기본이고 걸핏하면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심지어 아버지를 신고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그에게는 반사회적 경향이 쟁여져갔습니다. 그의 반사회적 경향은 그가 비윤리적이어서가 아니라 사회 전반을 향한 나름 의로운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물론 정확한 사회과학적 지식에 터하지 않았으므로, 많은 부분이 비판 아닌 비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모순들이 주위 사람들을 다양한 불편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과 숙의로 치유를 해오면서 이 청년처럼 힘들고 조심스러운 적도 드물었습니다. 저는 우선 그의 정서를 있는 그대로 느끼고 알아차리고 받아들임으로써 신뢰를 구축했습니다. 그의 입에서 ‘제 말을 끝까지 다 들어준 분은 선생님이 처음입니다.’라는 말을 들은 뒤에야 객관적인 분석과 평가를 친절하게 전달해주었습니다. 그는 조금씩 서서히 자신의 상황과 삶의 조건이 어떻게 불화하고 있는지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한계는 매우 뚜렷했습니다. 저는 냉정하게 그 한계를 헤아리고 딱 반걸음만 먼저 나아갔습니다.


그에게 일생의 중대사는 단연 취업 문제였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열심히 정보를 수집하고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습니다. 필요한 외국어 능력시험 점수를 확보하고 자격증을 따는 일에 매달렸습니다. 그 일은 제가 도울 수 없었습니다. 면접, 자기소개서 부분은 숙의 시간은 물론 그 외의 시간을 따로 내어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자기소개서는 빈틈이 너무 많아 일일이 어휘를 교정하고 비문을 없애고 논리와 서사를 바로잡아주었습니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좌절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어떤 지방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일단 거기까지 그와 저는 함께 적응해갔습니다. 앞으로 기나긴 세월 동안 그가 사회에서 어떻게 적응해 나아갈지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그의 운명에 합당한 길을 찾을 것이라 믿습니다. 제 믿음이 단서를 잡았습니다.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그 동안 참 감사했습니다. 이렇게나마 인사를 드리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도리’란 말을 ‘제 삶에 심은 종자신뢰’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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