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이 걸어 들어오는 줄만 알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영락없이 데스마스크였습니다. 흐려진 눈동자 하며, 회색 낯빛 하며, 있을 리 없는 표정 하며, 게다가 턱관절 장애 때문에 뒤틀린 얼굴은, 데스마스크보다 도리어 섬쩍지근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두 살 바기 아기를 둔 20대 중반이 그릴 수 있는 어떤 풍경과도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만으로 그가 할 천 마디 말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사연은 간단명료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능력이 부족한 상태였기에 배우자 아버지가 조그만 집을 사주었습니다. 자신이 사준 집이어서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 아버지는 따로 열쇠 하나를 복사해서 지니고 다녔습니다.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따고 드나들었음은 물론입니다. 20대 신혼부부에게 자신이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그 아버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입맞춤 한 번 편안하게 할 수 없는 처지를 만들어 놓고, 천하태평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사방이 유리로 된 집에 벌거벗겨진 채, 구경거리로 갇혀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두 가지를 확인했습니다. “집을 돌려줄 수 있는가?” 불가능입니다. “이혼할 수 있는가?” 불가능입니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제가 그에게 경쾌하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럼, 싸워야죠!”


그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그에게 '배우자 아버지와 싸우기 총론'을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5분이 채 안 된 짧은 시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기적은 저와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목도할 수 없는, 소미하나 위대한 광경입니다. 그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해졌습니다. 낯빛이 연분홍이 되었습니다. 표정이 해맑아졌습니다. 턱 관절이 바로잡혀 인중선이 수직으로 곧아졌습니다. 저는 짐짓, 나지막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거울 좀 보실래요?”


아, 정작 기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선생님, 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가 이미 자기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이토록 뛰어난 생명감각을 지닌 청년이었기에 그 질곡은 죽음에 육박하는 것이었을 터. 저는 한껏 행복한 마음으로 '배우자 아버지와 싸우기 각론'을 우당탕 두드려댔습니다.


경제적 여유가 그다지 없었기 때문에, 저와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작업은 미구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가 경험한 기적처럼 싸움은 경이롭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렵고 어려웠을 것입니다. 외롭고 눈물겨웠을 것입니다. 이제는 기억에 아련한 얼굴이지만,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유능한 싸움꾼으로 자라 씩씩하게 살고 있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흘러갑니다. 굿 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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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은 남이 내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줘야지.’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남이 내게 잘해주면 ‘넌 내 밥이지.’ 하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사냥감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후자는 사냥꾼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카르텔인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후자가 되기 위해 질주합니다. 후자는 전자를 수탈함으로써 더욱 향락에 중독되어갑니다. 향락에 중독된 사회는 모든 영역을 포르노로 영락시킵니다. 포르노 사회에서 누락된 사람들은 더욱 선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움으로 는적는적 스러져갑니다.


40대 중반의 그는, 선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운 사람의 전형입니다. 정도가 지나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가 직장 상사한테 가혹하게 수탈당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한테도 이를테면 경원의 대상인 사실을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저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직장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상사는 불의한 권력이 투하한 낙하산이었습니다. 낙하산답게 무소불위의 ‘갑질’을 통해, 스스로 양아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퇴근 후에도, 공휴일에도, 전화로 그에게 업무를 지시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직위를 강등시켜 한직으로 내몰았습니다. 하급자를 직속상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상급자인 그의 책상을 최하급자 옆에 붙여 배치하였습니다. 이 모든 부당한 처사를 지켜본 동료들 가운데 그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의 일상입니다. 마침내 그 상사가 쫓겨났습니다. 새로운 상사가 부임했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그와 함께 상사, 나아가 그런 자들이 거머쥔 세상과 직면하는 일을 숙의했습니다. 작게는 자잘한 싸움의 기술에서부터 크게는, 세계의 구성과 운동 이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가로질렀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문제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 이야기였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성찰은, 고통이 지속될 때 그 힘이 어떤 쏠림에서 나왔는지 살피고, 그 쏠림에 사로잡힌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쏠림을 맑게 들여다보면, 건너편이 보입니다.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겨 문제를 다시 바라봅니다. 그는 한사코 문제를 상사의 추악함과 불의만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상사의 불의·부도덕이 왜, 하필, 그에게만 나타날까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때, 문제의 소지가 그 자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질문해야 합니다. 이 전환이 양비론이나 물 타기와 전혀 다른 것임은 물론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면, 비로소 문제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인식하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제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통당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문제의 전체 맥락을 몰라서 생깁니다. 그 상황에서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늪으로 빠져듭니다. 부분에 집중하는 모든 행동은 포르노며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전체 맥락에서 보면, 문제를 느끼는 자신의 감정 상태가 유연해집니다. 감정 상태가 유연해지면, 해결 또는, 해소의 새로운 시야가 열립니다.


새로운 시야란 무엇일까요? 아프리카 물소 떼를 공격할 때, 사자는 가장 약한 개체를 선택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격당하는 약자는, 본능적으로 공격하는 강자의 면모에 제압되어, 거기에 시선이 고정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올 길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간파하고,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한다는 말은 결국, 여기로 향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상사가 수많은 부하직원 가운데, 왜 하필, 그를 선택했을까요? 그의 치명적 약점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카르텔인 현대 사회는 삶을 승패의 문제로만 규정합니다. 선할수록, 의로울수록, 아름다울수록 연전연패합니다. 삶이 승패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게 진리일지라도, 연전연패하고 살아남을 자, 누구입니까. 그가 진즉 직면했어야 할 것은, 삶이 승패의 문제이기도 하며, 살아남으려면 적절한 승수가 필수적이라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승수를 쌓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 같은 ‘순물질’이 아닙니다. 완력, 승부욕, 권모술수 같은 ‘불순물’입니다. 내면에 불순물을 들이지 않고 순물질로 살다가 끝내 사냥감으로 생을 마친다면, 그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은 대체 무엇일까요? 제 목숨 하나 지킬 수 없는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이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이기는 할까요? 이것들이 다름 아닌, 치명적 약점 아닐까요?


결국 문제는 자기 자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로 귀착됩니다.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에 강박적으로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을 파리하게 만들어, 내면의 온기를 떨어뜨리면, 사냥꾼이 그 서늘함을 감지하고 정조준하게 됩니다. 인간의 약함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가 아닌 한, 자기 내면의 온기를 떨어뜨리는 짓은 다만 자해행위일 따름입니다. 그의 상사가 지닌 추악함과 불의는, 결코 홀로 작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해행위와 맞물려 돌아간 것입니다. 이 진실을 냉엄하게 직시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남에게 온기 전해주느라, 나 스스로를 냉대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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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병색이 가득한 초로初老 한 분이 ‘도통 음식을 삼킬 수 없다. 침 치료를 받으면 낫느냐?’며 찾아왔습니다. 곡절이 있지 싶어 침을 놓으면서 이리저리 말문을 두드려보았습니다. 처음엔 완강히 부인하더니, 이내 기총소사 하듯 말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원인은 배우자의 외도였습니다. 어느 종교단체 회원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현장을 목격했다(고 주장하)는 그는, 여전한 분노와 배신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3년째 부부는 똑같은 말로, 똑같이 소리치며 싸웠습니다. 이제는 아들딸들조차 지쳐서, 이혼하라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제가 진중한 어조로 물었습니다.


“그 정도라면, 이혼하시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요?”


‘경전에 이혼은 금지되어 있다.’는 대답이 성마르게 돌아왔습니다. 저는 진중함을 더해 다시 물었습니다.


“경전에 혹시 용서하라는 말씀은 없나요?”


민망한 표정을 지을 뿐,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가 어떤 유형의 종교인인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삶의 기준으로 삼는 가치는 대부분 한 쪽으로 치우쳐 있기 마련입니다. 저는 부드럽게 어조를 바꾸어 다른 질문을 던졌습니다.


“외도 파트너를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어떤 매력이 배우자분을 흔들었다고 생각하세요?”


의외의 질문을 받은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익숙한 가부장적 어휘 몇 가지를 나열했습니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미 다음 질문을 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한 번도 정색하고 생각하거나, 문제 삼지 않았음이 분명했습니다. 저는 물론, 그가 예상하는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질문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잠시 숨을 고른 뒤, 치명적 질문 하나를 던졌습니다.


“사달이 나기 전까지 부부간의 성생활은 어땠습니까?”


예의 그 성마름으로 돌아왔으나, ‘20년 이상 전혀 없었다.’는 대답에는 어쩐지 뉘우침의 기색이 묻어 있었습니다. 역시 간단히 질문에 대한 설명을 붙였습니다. 일주일 뒤로 상담 예약을 잡고 돌아갔습니다. 사흘 뒤, 그가 한의원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선생님, 외람되지만 상담을 받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을 봐도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습니다. 신기해요. 밥이 잘 넘어갑니다. 정말 신기해요.”


저는 싱그러운 리듬을 넣어 ‘축하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가 어깨 통증 때문에 침을 맞으러 왔습니다. 부부간 평화와 안정이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삶을 크게 돌아본 것이 확실했습니다. 아, 물론 남편의 외도에 면죄부를 준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전혀. 당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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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산길을 걷다가 햇볕에 노출된 채, 파닥거리고 있는 어리디어린 땅강아지와 마주쳤다. 나는 찰나적으로 몸을 낮추었다. 길섶의 부드러운 풀잎 생명 하나를 살며시 거두었다. 그 풀잎으로 땅강아지를 살살 문지르고 톡톡 건드렸다. 어린 땅강아지는 숲속으로 안전하게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어린 땅강아지가 하느님이다. 풀잎이 하느님이다. 나도, 차마, 하느님이다. 땅강아지와 풀잎과 나는 거대하지 않다. 우리는 소미심심小微沁心이다. 우리는 삿된 인류가 구축한 토건신deus aedificatus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삶을 나누는, 그러니까 토건을 멈추었을 때, 발현되는 비토건신이다. 토건신은 전쟁·계급체제·남녀차별·아동학대·심신분리·자연착취·시간의 공간적 지배와 더불어 인류의 병적인 문명이 일으킨 거대유일신교 사유의 정점이다. 사하라시아 한복판에서 탄생한 야훼와 알라가 대표적인 예다.


인간을 창조하고,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는 전지전능한 존재인 거대유일신의 역사, 특히 인간 구원의 역사를 구성해낸 텍스트가 구약성서다. 그 역사를 예수의 삶과 죽음이 완성했다고 말하는 텍스트가 신약성서다. 예수 넘어 마호메트가 참 완성자라고 주장하는 텍스트가 코란이다. 오늘날 이 세 텍스트가 구원을 빌미로 수십 억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무릎 꿇도록 하고 있다. 과연 야훼·알라에서 예수·마호메트까지 역사는 신이 인간을 구원한 역사인가?


아니다. 그 반대다. 인간이 신을 구원한 역사다. 구약성서는 거대유일신의 실패와 그럴 수밖에 없는 한계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실패한 신의 고백은 『욥기』를 통해 절절하게 들려온다. 『욥기』에서 거대유일신은 너절한 진면목을 보여준다. 사탄과 하는 내기가 그렇고, 아무 잘못 없는 욥에게 자신의 광대함을 보여 과시하는 허장성세가 그렇다. 결정타는, 욥이 짐짓 무릎을 꿇자 갑절의 축복을 내리는 장면이다. 이 무슨 수작인가. 전지전능한 거대유일신이 베푸는 축복 치고는 뇌물 수준의 알량함 아닌가. 아, 이건 트릭스터다. 트릭스터 유일신이라니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다. 물론, 이는 성서 최종편집자 신학의 한심한 수준의 반영임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 2천 년 쌓여진 기독교 신학의 수준은, 뭐, 얼마나 높아졌나.


신의 실패는 무엇인가. 그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었다는 인간의 고통을 감지할 수 없다는 거다. 왜? 몸이 없으니까. 욥이 깨진 기와 조각으로 상처를 피가 나도록 긁은들, 몸 없는 거대유일신이 어찌 그 고통을 알랴. 신의 창조는, 신의 사랑은 사이버 체험이었다. 욥이 피눈물로 증명한 신의 허상이다. 신은 뉘우치지 않았다. 뉘우칠 수 없었다. 물질 축복으로 때웠다. 그것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게 구약성서의 결론이다.


기나긴 암흑의 터널을 지나 마침내 신은 회심conversion의 기회를 잡았다. 사람이 되어 욥에게 진 빚을 갚을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던 것이다. 예수다. 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나사렛 예수는 도저한 몸의 사람이었다. 소미심심의 화신이었다. 그는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 하느님임을 알아본, 타락 이후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하느님인 거다. 하느님이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로 되도록 이끈 나사렛 예수에 이르러서야 인간의 신 구원 역사가 마무리된다. 그렇다. 예수는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다.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야말로 장엄 신이다. 토건신은 흔적 없이 해체된다.


그 버려진 작은 자, 이름 모를 들풀이 누군가. 세월호 예은이다. 일본군 성노예 김복동이다. 쌍차 해고노동자 김득중이다. 물대포에 스러진 백남기다. 밀양 할매, 강정 할배·······그리고 마침내 오늘 아침 그 땅강아지와 풀잎 하나다. 돈수백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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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넘게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첫인상이 가장 좋았던 그는, 무척 잘 생겼고, 키도 크며, 목소리까지 맑은데다, 미소마저 뇌쇄적입니다. 심지어 마음씨도 비단결이었습니다. 거기까지입니다. 신의 스토킹으로 그의 인생은 심하게 망가졌습니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 배우자 외도로 이혼한 뒤 홀로 산 지 이미 여러 해 된 터였습니다.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여러 번 폐쇄병동을 들락거려야 했습니다. 수차례 자살을 기도해, 손목에는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생의 애착을 잃어버려 피폐해진 심신 상태 때문에, 그는 수시로 생사의 문턱을 넘나들곤 했습니다. 만난 이후 10여 년 동안, 저만해도 그를 세 번이나 살려내야 했습니다. 물론 그 덕에(!) 그는 저를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두 번은, 음식점에서 쓰러져 호흡이 정지된 상태에 있는 그를 인공호흡으로 살렸습니다. 마지막 한 번은, 참으로 극적이었습니다. 제가 인생에서 맞닥뜨린 가장 힘든 일 때문에 허덕이던 어느 날 늦은 밤, 술에 취해 귀가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그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아버지, 저·······죽나 봐요. 무서워 죽겠어요.”


택시를 잡아타고 그가 홀로 사는 집에 당도해보니, 손목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온갖 술병이 어지러이 나뒹굴었습니다. 이곳저곳 핏자국이 낭자했습니다. 그를 들쳐 업고 인근 병원으로 뛰었습니다. 응급실에서 그의 원-가족한테 연락을 취하고 돌아서 나오는데, 먼동이 터오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목숨 줄로 이어져, 저는 그의 삶 구석구석까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상담실에 마주앉아서가 아니라, 그의 삶이 그리는 동선을 따라가면서 대소사에 전천후로 엮였습니다. 그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잠자리 빼고는 죄다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연애하고 결혼하는 일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심지어 얼마 되지는 않지만, 돈까지 빌려주었습니다. 아, 물론 다 돌려받았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함께 살아낸 세월의 겹 위로 얼마만큼 안정된 빛이 그에게 비추고 있습니다. 이제 더는 그의 삶에 동행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며 살다가 문득 소주 한 잔하는 정도면 만족합니다. 언제라도 그는 전화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아버지, 낼 저녁 소주 한 잔 해요!”


그와 제가 함께 했던 삶에서 일어났던 일을 구구절절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는 까닭을 아실 듯합니다. 혹시 그와 제가 소주 한 잔 할 때, 함께 하고 싶으시다면 연락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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