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은 남이 내게 잘해주면 ‘나도 잘해줘야지.’ 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남이 내게 잘해주면 ‘넌 내 밥이지.’ 하는 사람입니다. 전자는 사냥감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후자는 사냥꾼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습니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카르텔인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후자가 되기 위해 질주합니다. 후자는 전자를 수탈함으로써 더욱 향락에 중독되어갑니다. 향락에 중독된 사회는 모든 영역을 포르노로 영락시킵니다. 포르노 사회에서 누락된 사람들은 더욱 선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움으로 는적는적 스러져갑니다.
40대 중반의 그는, 선하고 의로우며 아름다운 사람의 전형입니다. 정도가 지나치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가 직장 상사한테 가혹하게 수탈당할 뿐만 아니라, 동료들한테도 이를테면 경원의 대상인 사실을 증거로 들 수 있습니다. 사실 그가 저를 찾아온 이유가 바로, 직장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상사는 불의한 권력이 투하한 낙하산이었습니다. 낙하산답게 무소불위의 ‘갑질’을 통해, 스스로 양아치임을 보여주었습니다. 퇴근 후에도, 공휴일에도, 전화로 그에게 업무를 지시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직위를 강등시켜 한직으로 내몰았습니다. 하급자를 직속상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상급자인 그의 책상을 최하급자 옆에 붙여 배치하였습니다. 이 모든 부당한 처사를 지켜본 동료들 가운데 그의 편에 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우리사회의 일상입니다. 마침내 그 상사가 쫓겨났습니다. 새로운 상사가 부임했습니다.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그와 함께 상사, 나아가 그런 자들이 거머쥔 세상과 직면하는 일을 숙의했습니다. 작게는 자잘한 싸움의 기술에서부터 크게는, 세계의 구성과 운동 이치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가로질렀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과 문제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인식하는 능력, 그리고 자기 자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 이야기였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의 성찰은, 고통이 지속될 때 그 힘이 어떤 쏠림에서 나왔는지 살피고, 그 쏠림에 사로잡힌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쏠림을 맑게 들여다보면, 건너편이 보입니다. 건너편으로 시선을 옮겨 문제를 다시 바라봅니다. 그는 한사코 문제를 상사의 추악함과 불의만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기만 하다면, 상사의 불의·부도덕이 왜, 하필, 그에게만 나타날까가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 때, 문제의 소지가 그 자신에게도 있지 않은가, 질문해야 합니다. 이 전환이 양비론이나 물 타기와 전혀 다른 것임은 물론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하면, 비로소 문제를 전체 맥락 안에서 인식하는 능력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어떤 문제에서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고 고통당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문제의 전체 맥락을 몰라서 생깁니다. 그 상황에서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늪으로 빠져듭니다. 부분에 집중하는 모든 행동은 포르노며 중독이기 때문입니다. 전체 맥락에서 보면, 문제를 느끼는 자신의 감정 상태가 유연해집니다. 감정 상태가 유연해지면, 해결 또는, 해소의 새로운 시야가 열립니다.
새로운 시야란 무엇일까요? 아프리카 물소 떼를 공격할 때, 사자는 가장 약한 개체를 선택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격당하는 약자는, 본능적으로 공격하는 강자의 면모에 제압되어, 거기에 시선이 고정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 사로잡히면, 헤어 나올 길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치명적 약점을 간파하고, 근본적 대책을 세우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한다는 말은 결국, 여기로 향합니다. 그를 괴롭히는 상사가 수많은 부하직원 가운데, 왜 하필, 그를 선택했을까요? 그의 치명적 약점은 무엇일까요?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 카르텔인 현대 사회는 삶을 승패의 문제로만 규정합니다. 선할수록, 의로울수록, 아름다울수록 연전연패합니다. 삶이 승패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게 진리일지라도, 연전연패하고 살아남을 자, 누구입니까. 그가 진즉 직면했어야 할 것은, 삶이 승패의 문제이기도 하며, 살아남으려면 적절한 승수가 필수적이라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승수를 쌓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 같은 ‘순물질’이 아닙니다. 완력, 승부욕, 권모술수 같은 ‘불순물’입니다. 내면에 불순물을 들이지 않고 순물질로 살다가 끝내 사냥감으로 생을 마친다면, 그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은 대체 무엇일까요? 제 목숨 하나 지킬 수 없는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이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이기는 할까요? 이것들이 다름 아닌, 치명적 약점 아닐까요?
결국 문제는 자기 자신과 삶을 대하는 자세로 귀착됩니다.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에 강박적으로 집착함으로써 도리어 선함, 의로움, 아름다움을 파리하게 만들어, 내면의 온기를 떨어뜨리면, 사냥꾼이 그 서늘함을 감지하고 정조준하게 됩니다. 인간의 약함을 끌어안고 십자가를 지는 메시아가 아닌 한, 자기 내면의 온기를 떨어뜨리는 짓은 다만 자해행위일 따름입니다. 그의 상사가 지닌 추악함과 불의는, 결코 홀로 작동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자해행위와 맞물려 돌아간 것입니다. 이 진실을 냉엄하게 직시하고, 그는 자기 자신을 대하는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저는 그에게 간곡히 당부했습니다.
“남에게 온기 전해주느라, 나 스스로를 냉대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