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시내버스에서 가방은 인정을 나누는 방편이었다. 운 좋게 자리에 앉은 사람은 으레 앞에 선 사람의 가방을 받아주었다. 특히 커다랗고 뚱뚱한 고등학생 가방은 꼭(!) 받아주는 ‘국민 보따리’였다. 가난과 고단함을 함께 하는 온욱한 풍경의 총아였다.


어느 때부턴가 시나브로 사람들은 더 이상 가방을 받아주지 않았다. 시내버스에 짐 싣는 시렁이 생기면서부터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시렁이 차서 가방을 손에 들고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의 가방도 받아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인심이 변한 거다. 각자도생의 사회 분위기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이제는 가방을 받아주겠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한 시선이 돌아올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아예 남에게 관심이 없는데 남의 가방에 무슨 관심이 있으랴.


최근 몇 년 동안 가방은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현상의 매개물이 되었다. 이를테면 가방 폭력이다. 가방으로 다른 사람을 밀고 심지어 치고 지나가도 가방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싶은 부류 사람만 무례히 그런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거의 누구나 그런다는 느낌이다. 주로 백 팩이 문제가 되기는 하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심이 강퍅해진 거다. 세월호 유족이 단식하는 앞에서 치킨 뜯어먹는 막장인간들이 설치는 세상이라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마침내, 남한테 해코지를 해서라도 나 잘 사는 게 갑이라 생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만 것이리라.



엊저녁 식사 자리에서 딸아이가 중년 사내의 백 팩이 얼굴 가격한 이야기를 했다. 단지 그 사내 한 사람 문제가 아니라며 혀를 찼다. 오늘 아침 지하철 안에서 나도 비슷한 일을 당했다. 20대 후반 청년인데, 그래 놓고도 표정이 전혀 없다. 순간, 그가 커다란 가방으로 보였다. 대화 불가능이란 판단이 서서 그냥 웃고 말았다. 이런 사회에서 가방 아닌 노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못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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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문제에 유난히 취약한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타고났는지 어떤 트라우마 때문인지 알지 못 하지만, 근거로 삼을 만한 일이 하나 있기는 했습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서 격리되었습니다. 7살이 될 때까지 할머니가 그를 길렀습니다. 추정컨대 극단적인 애지중지 아니면, 방치 상태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 알아서 해주거나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현실에서 아기가 판단하고 선택할 무엇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하면 따라 하는 습성이 자연스레 형성되었습니다. 그것을 문제로 느껴 정색하고 고민조차 전혀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일대 파국 위기에 직면했으니 말입니다.


예식만 남았을 뿐, 그는 사실상 혼인 상태였습니다. 그 와중에 그는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었습니다. 배우자가 그 사실을 알아서 문제 삼을 때까지 그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배우자가 분노와 배신감에 떨며 피폐해져가자 그도 화들짝 놀라 자신의 상태를 심각하게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거의 실시간으로 자신의 동선을 배우자에게 보고했습니다. 자신의 결백한 생활을 증명함으로써 신뢰를 회복하고자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배우자의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미 신뢰가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그가 하는 행동을 뭔가 숨기려는 계략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이를테면 편집장애로 치닫고 있었던 셈입니다. 저는 묵묵히 그가 보는 앞에서 그림 하나를 그렸습니다. 달을 그리는데 달의 윤곽을 먼저 잡지 않고 주위에 있는 구름을 채색했습니다. 채색되지 않는 부분이 자연스럽게 남아 달의 모양을 갖추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이른바 홍운탁월烘雲托月 기법입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변방에 답이 있습니다.”


성性(적 결백)이라는 문제의 중심에 배우자의 부정적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를 건드릴수록 불에 기름을 붓는 역효과만 내기 마련이다, 변방을 울려 중심이 비워지도록 해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배우자가 평소 바라던 그대 모습은 뭡니까?”


지성적인 풍모였다고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책 하나를 추천해주었습니다. 독후감을 정성스레 써서 배우자에게 읽어주도록 했습니다. 결과는 ‘엄지 척’이었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삶의 소미한 길목을 돌며, 차근차근 배우자의 신뢰를 쌓아가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가 보내는 낭보가 쌓여갔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그는 배우자의 손을 잡고, 표연히 하산했습니다. 제가 뭘 더 말씀드릴 게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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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의학을 자연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인도 환자도 자연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정확성을 전제하고 진단과 치료에 임합니다. 현대의학은 이런 자부심과 체계적 사기술이 결합된 키메라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질병으로 인정하는가? 이 문제는 자연과학인 의학적 연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인문적 조건, 정치경제학적 역관계가 얼마든지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아니 거꾸로 사회인문적 조건, 정치경제학적 역관계가 자연과학의 연구를 지휘하고 통제합니다. 실제로 미국 정신의학 협회(APA)가 펴내는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DSM-5)의 주요내용을 초국적 제약회사의 로비가 좌우합니다. 자연과학으로서 의학은 자본의 푸들로 소비되는 수준을 넘어서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DSM-5가 신경발달장애로 분류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경우 진단과 치료에서 남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남용되고 있습니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고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10대 초반 아이가 왔습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본인은 오죽하겠습니까.


서구의학에 따른 진단 소견에는 ‘반응과 정보처리 속도가 느리고 반응의 일관성이 부족하므로 주의집중력 문제가 시사됨.’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흔히 보는 지극히 타성적인 진단 의견입니다. 약을 먹으며 학습효율은 다소 높아졌지만, 아이의 식욕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그러자 늘 그러하듯, 식욕을 높이는 약이 추가 처방되었습니다. 아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해’ 놓고 담당 정신과의사는 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귀신이 보여요. 웃음소리도 들리고요.”


조현병까지는 아니니까, 그냥 귀신이 어디 있냐 하고 정신과의사는 물론 부모도 일소에 부쳤겠지요. 저는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자, 귀신의 얼굴색은 시퍼렇고, 흰 옷을 입었으며, 가라고 쫓아도 피식 웃고 만다 했습니다. 모두 여자 아이이며, 서서 노려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계단 구석에 처박혀 목이 꺾인 채 있는 귀신도 봤다고 했습니다,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7세 이후 줄곧 겪어온 일인데, 꿈일 때도 있고 생시일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말을 먼저 걸더냐고 물으니 그런 적은 거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단호하되 따스하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거 귀신 맞아.”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한 찰나에 안도의 웃음과 호기심 어린 갸웃거림이 함께 지나가는 것을 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체 없이 문제를 해소시켜주었습니다. 저는 다시 따스하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 귀신, 너야!”


예상대로 아이는 단박에 제 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놀란 것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문답의 과정을 지켜보며 몇 차례 당혹스런 순간을 겪었을 테지만, 마지막 순간이 아마 가장 놀라웠을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으나, 어머니에게는 보충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지요.


더 이상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얼마 뒤, 기회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아이에게 그 나라는 다시없는 해방공간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고 낙인찍지 않았습니다. 학교 교사들은 아이의 행태를 개성으로 수용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포함한 주위사람들은 여전히 잘 적응이 되지 않겠지만, 그는 언제까지 그로서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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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청년이 찾아왔습니다. 본디 우울증이 있는데다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갑자기 파혼을 선언하고 잠적해버려 창졸간에 마음과 삶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고 합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저는 20대 초반, 1년 사이에 부모를 모두 잃었습니다. 나이도 어렸을 뿐더러 외동인 제가, 친척도 전혀 없는 상태에서, 홀로 장례를 포함한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홀연히 초등학교 동창인 한 친구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망연자실해 있는 저를 다독이며 헌신적으로 수습을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중단했던 제 학업도 다시 할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고 논문을 쓰는 과정까지 희생에 가까운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연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님도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해주셔서 결혼을 약속하고 집까지 마련했습니다. 제 삶이 이렇게 거의 완벽할 정도로 안정을 찾자, 비로소 그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홀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돌아오면 결혼식을 올리자 하고,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습니다. 이 가벼운 발걸음이 나중에 너무나 무거운 변화를 몰고 돌아올 줄 그 때는 몰랐습니다. 여행 과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는 전혀 알 지 못합니다. 돌아오자마자 저와 그의 부모님 앞에서 그는 돌연 파혼을 선언했습니다. 더 이상은 이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며, 유학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지금까지도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질문 하나로 남은 그 선하고 슬픈 눈망울이 8년 지난 지금도 선연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습니다.


“모름지기 그는 자기 파괴적 희생으로 사는 동안 서서히 영혼이, 그 내면의 힘이 소진되어갔을 것입니다. 자기 요구와 거절을 봉인하고 오로지 그대만을 위해 몰두함으로써 그의 실존은 공동空洞이 되고, 존재는 형해形骸가 되었을 것입니다. 무無에 묻혀버린 자기 자신을 발견한 찰나, 그는 가차 없이 발길을 돌렸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삶을 찾도록 놓아주십시오. 그 놓음이 기다림일지 포기일지는 천천히 그대가 결정하십시오.”


참으로 안타까운 사연입니다. 그를 보살피는 동안 자기 자신의 우울증이 한 없이 깊은 골짜기로 미끄러져 내려갔다는 사실을, 아마도 그와 떨어져 지내면서 어떤 경로를 통해 깨달았을 것입니다. 물론 결별의 방식이 그리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당사자에게 그 결단은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친구 희생 덕분에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그라면, 친구가 최선을 다해 내린 결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 뒤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상담을 마치고 일어서는 그의 눈망울만큼은 적어도 비관적이지 않았으니, 두 사람 다 잘 견뎌냈을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단 한 번의 만남이었지만 저는 그와 함께 그의 삶을 신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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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수려한 용모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빼어난 전문지식을 지닌 서울 강남 출신 엘리트입니다. 그렇다고 통속한 '똥 부자' 부모 덕분에 스펙 쌓고 특목고 간 다음, 관악산 자락에서 몇 년 놀다, 대기업 들어간 경우는 전혀 아닙니다. 평범하게 일반고 나와, 스스로의 힘으로 소신껏 원하는 대학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나름 어렵디어렵다는 금융계 노릇노릇한 자리에 냉큼 자리 잡은 영특한 청년입니다. 헌데 그런 그가 대체 무슨 이유로 절 찾아왔을까요? 그런 그에게 어떤 고통과 어둠이 있는 것일까요?


그가 수려한 용모를 지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꼭 한 가지를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중성적' 이미지가 그에게서 풍긴다는 사실입니다. 여러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겠지만 제게는 그 이미지가 애정결핍으로 읽힙니다. 결핍을 어렵사리 극복한 데서 나타나는 어정뜬 균형, 그러니까 그리움이 여전히 기갈처럼 남아 있는 절제가 자아내는 풍경이 중성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핍은, 지닌 자를 먹잇감으로, 다루는 자를 포식자로 배치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먹잇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투명인간에 가까운 존재였습니다. 롤 모델도 아니고 기댈 수도 없고 부족함을 채워주지도 않는 아버지와 늘 먼 평행선을 유지했습니다. 삶의 결정적 길목을 돌 때마다 그는 늘 혼자였습니다. 부성父性은 그에게 우묵한 결핍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거의 그 자신이었습니다. 아니, 그가 거의 어머니 자신이라 표현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어머니는 자신의 원통한 삶에 그를 포개놓고 살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어머니의 해원굿이어야 했습니다. 과도한 책임감은 늘 죄책감으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죄책감은 늘 자기 파괴적 희생으로 구현되었습니다. 모성은 그에게 육중한 결핍이었습니다.


중첩된 결핍은 그의 인간관계를 근원적으로 지배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연애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그의 연인은 늘 자식 같이 굴었습니다. 그의 그리움인 부성이나 모성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물론 연인에게도 곡절이 있었을 테지요. 두 사람은 늘 그런 문제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사과와 화해는 늘 그의 몫이었습니다. 이런 불균형에서 그는 날카로운 박탈감을 느꼈습니다. 연인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연인은 늘 즐겁게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적절한 주고받기란 당최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너무 깊어 선뜻 들어가 놀기 힘든 물이었고, 연인은 찰방거리며 놀기에 딱 알맞은 물이었습니다. 제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혼인하면 10년 안에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울 것입니다. 누굴까요?”


초롱초롱한 그의 눈에 아연 긴장감이 서렸습니다. 바로 다음 순간 설마 자신이겠느냐는 표정이 자리 잡았습니다. 제가 그 표정을 뒤집는 대답을 하자 잠시 망연한 눈빛으로 앉아 있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워낙 영민한 그였으므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차원이라기보다 문제를 느끼는 의식의 실팍함, 그리고 그 차이가 빚어내는 생의 중량감 차원에서 그가 견딜 수 없으리라는 이야기를 간단명료하게 해주었습니다.


숙의를 계속하며 그는 중첩된 결핍에서 서서히 벗어났습니다. 5개월 뒤, 그는 연인과 결별했습니다. 연인은 결별의 순간에도 장난기를 거두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그는 홀가분하게 돌아설 수 있었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겪습니다. 만남은 기쁘고 헤어짐은 슬픕니다. 기쁨은 깨달음을 주지 않습니다. 헤어짐은 깨달음을 줍니다. 결별의 각성 여하에서 인간은 판가름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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