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의학을 자연과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료인도 환자도 자연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정확성을 전제하고 진단과 치료에 임합니다. 현대의학은 이런 자부심과 체계적 사기술이 결합된 키메라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왜 질병으로 인정하는가? 이 문제는 자연과학인 의학적 연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인문적 조건, 정치경제학적 역관계가 얼마든지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를 뒤집을 수 있습니다. 아니 거꾸로 사회인문적 조건, 정치경제학적 역관계가 자연과학의 연구를 지휘하고 통제합니다. 실제로 미국 정신의학 협회(APA)가 펴내는 정신장애 진단과 통계 편람(DSM-5)의 주요내용을 초국적 제약회사의 로비가 좌우합니다. 자연과학으로서 의학은 자본의 푸들로 소비되는 수준을 넘어서기나 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DSM-5가 신경발달장애로 분류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의 경우 진단과 치료에서 남용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습니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이미 광범위하게 남용되고 있습니다.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로 진단받고 약물을 복용하고 있는 10대 초반 아이가 왔습니다. 부모는 물론 가족들의 걱정이 컸습니다. 본인은 오죽하겠습니까.
서구의학에 따른 진단 소견에는 ‘반응과 정보처리 속도가 느리고 반응의 일관성이 부족하므로 주의집중력 문제가 시사됨.’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흔히 보는 지극히 타성적인 진단 의견입니다. 약을 먹으며 학습효율은 다소 높아졌지만, 아이의 식욕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그러자 늘 그러하듯, 식욕을 높이는 약이 추가 처방되었습니다. 아이 문제를 이렇게 ‘처리해’ 놓고 담당 정신과의사는 더 신경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에게 정작 문제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아이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귀신이 보여요. 웃음소리도 들리고요.”
조현병까지는 아니니까, 그냥 귀신이 어디 있냐 하고 정신과의사는 물론 부모도 일소에 부쳤겠지요. 저는 아이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달라고 하자, 귀신의 얼굴색은 시퍼렇고, 흰 옷을 입었으며, 가라고 쫓아도 피식 웃고 만다 했습니다. 모두 여자 아이이며, 서서 노려본다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는 계단 구석에 처박혀 목이 꺾인 채 있는 귀신도 봤다고 했습니다, 어제오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7세 이후 줄곧 겪어온 일인데, 꿈일 때도 있고 생시일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말을 먼저 걸더냐고 물으니 그런 적은 거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제가 단호하되 따스하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거 귀신 맞아.”
아이의 눈이 반짝 빛났습니다. 한 찰나에 안도의 웃음과 호기심 어린 갸웃거림이 함께 지나가는 것을 저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지체 없이 문제를 해소시켜주었습니다. 저는 다시 따스하되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 귀신, 너야!”
예상대로 아이는 단박에 제 선언을 받아들였습니다. 놀란 것은 그의 어머니였습니다. 이 문답의 과정을 지켜보며 몇 차례 당혹스런 순간을 겪었을 테지만, 마지막 순간이 아마 가장 놀라웠을 것입니다. 아이에게는 군말을 덧붙이지 않았으나, 어머니에게는 보충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아이와 어른의 차이지요.
더 이상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이는 얼마 뒤, 기회가 되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아이에게 그 나라는 다시없는 해방공간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를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라고 낙인찍지 않았습니다. 학교 교사들은 아이의 행태를 개성으로 수용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아이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부모를 포함한 주위사람들은 여전히 잘 적응이 되지 않겠지만, 그는 언제까지 그로서 씩씩하게 잘 살아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