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편하다
키쿠치 마리코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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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경험을 담은 만화 <취하면 괴물이 되는 아빠가 싫다>의 작가 키쿠치 마리코의 신작 <살기 편하다>를 읽었다. 전작에서 자세하게 그렸듯이, 저자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남편의 폭력을 견디다 못한 어머니는 집을 나갔고, 결국 저자는 여동생과 단둘이 아버지의 폭언, 폭력을 받아내며 어린 시절,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다.


저자는 이런 성장 배경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가정에선 부모의 눈치를 보고, 학교에선 밝은 아이를 연기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진정한 자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지 못하고 늘 가면을 쓰고 행동했다. 이 사람 앞에선 이런 사람, 저 사람 앞에선 저런 사람을 연기하다 보니 스스로 지쳐서 만남을 꺼리고 관계 맺기를 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저자에게 나타난 문제점으로는 남의 부탁을 거절 못 한다, 남에게 기대지 못한다, 불면증에 시달린다,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 화를 내지 못한다 등이 있다. 슬픈 뉴스를 들으면 남들보다 두 배 더 슬퍼하지만, 기쁜 뉴스를 듣는다고 남들보다 두 배 더 기쁜 건 아니다. 남한테 칭찬을 들으면 '속으로는 날 욕하겠지'라고 생각한다. 애인한테 먼저 연락하지 않으면서, 연락이 없으면 차인 것 같다고 자책한다.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을 들어도 뭘 어쩌라는 건지, 라고 생각하던 저자는, 어느 날 목욕을 하다가 하루 종일 고생한 발을 어루만지면서 이런 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감각임을 깨닫는다. 힘든 하루를 무사히 견뎌냈다는 것, 오늘도 잘 버텨냈다는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대견해 하는 것. 어릴 때 부모가 이런 감각을 길러주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이제라도 나 스스로 해보면 어떨까.


부모에게서 정서적인 안정을 얻지 못한 사람이 성인이 된 후 스스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치유해가는 과정을 그렸다는 점에서 서밤(서늘한여름밤) 님의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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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주인 신장판 4
사무라 히로아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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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내내 사무라 히로아키의 대표작 <무한의 주인 신장판> 3, 4권을 읽었다. 무삭제, 무수정 판이라서 제대로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한 장면도 많지만(심약한 분들은 주의하시길!!)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읽는 건, 잔인함을 상쇄하는 감동적인 장면도 많기 때문이다. 특히 4권이 그랬다.


4권에서 린은 만지와 헤어져 혼자서 에도 경계의 검문소를 통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얼마 후 린과 만지가 지명수배자 명단에 오른 것을 알게 되고, 가뜩이나 통행증이 없어서 곤란한데 상황이 더 안 좋아졌음을 알게 된다. 다행히 린은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들을 알게 되어 그들의 가족 행세를 해서 검문소를 통과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 대가로 엄청난 일을 하게 되는데... ​


실제로 에도 시대에는 각 지역의 경계마다 검문소가 있어서 통행증 없이는 통과할 수가 없었다. 통행증 없이 검문소를 통과하려고 시도했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린처럼 자신의 신체에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검문소를 통과하고자 한 사람들도 많았을 터. 나쁜 것은 사람일까, 사회일까. 큰 결심을 할 수밖에 없었던 린의 처지가 안타깝고 애처롭다.


지난 3권에서 린이 자신의 부족한 검술 실력과 약한 기질 탓에 만지에게 도움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만 되는 것 같아서 갈등하던 것을 떠올리면, 이제야 비로소 린이 혼자 힘으로 살아갈 능력을 터득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앞으로 린이 어떻게 성장할지, 언제쯤 어떻게 만지와 재회할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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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주인 신장판 3
사무라 히로아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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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지 않는 검객 만지와 부모의 복수를 다짐한 소녀 린의 모험을 그린 만화 <무한의 주인>이 신장판으로 출간되었다. <무한의 주인 신장판>은 작가 사무라 히로아키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 커버를 입힌 무삭제, 무수정 판이라서 구판을 읽은 독자들도 다시 읽어볼 만하다.


이야기는 우연한 계기로 불로불사의 몸을 지니게 된 검객 만지가 '승리야말로 검의 길'이라고 여기는 일도류의 수장 아노츠에 의해 부모를 여의고 복수를 다짐한 소녀 린과 함께 길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만지는 '백 명을 죽인 사내'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데, 정작 만지 자신은 백 명을 죽이고도 자신은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은 것을 괴롭게 여긴다. 죽지 않는 사람에게는 삶도 없기 때문이다.


3권에서는 만지와 린의 주변에 적인지 동지인지 구분하기 힘든 사람들이 연이어 나타난다. 만지와 린처럼 아노츠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떠나기로 하는데, 그 과정에서 외려 만지가 위험에 처하고 린은 자신이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지 다시금 확인한다. 만지는 살아있는 한 누군가에게는 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고 야단치지만, 린은 검술 실력이 부족해도 한참 부족한 자신 때문에 만지까지 위험에 노출된 상황이 달갑지 않다.


린을 돕는 만지의 입장에선 황당할 수 있겠지만, 나는 린의 마음을 잘 알 것 같다. 어차피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복수를 한들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 보이니, 차라리 만지와 둘이서 어디 한적한 곳으로 가서 편안하게 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과연 나약하기만 한 걸까. 원수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보다, 원수가 보란 듯이 잘 먹고 잘 사는 게 어쩌면 진정한 복수가 아닐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과연 진정한 정의일까.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하는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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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의 나라 5
이즈미 이치몬지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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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의 전통문화를 철저하게 고증한 만화 <천수의 나라>가 총 5권으로 완결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마을 의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수련 중인 칸 시바가 이웃 마을에서 온 라티를 신부로 맞기까지의 과정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5권에선 마침내 두 사람의 혼례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티가 혼례 준비를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서운해하는 칸 시바의 모습이 귀여웠다. 라티의 오빠가 라티를 칸 시바에게 맡겨도 괜찮을지 걱정하는 모습도 애틋했다. 우연한 계기로 칸 시바의 성품을 확인하고 마음을 놓는 라티의 오빠. 그런 줄도 모르고 사람 좋게 허허 웃는 칸 시바. 둘의 모습이 재미있었다.


<천수의 나라>는 작화도 내용도 모두 훌륭한 웰메이드 만화다. 덕분에 그동안 접할 기회가 없었던 티베트의 전통문화를 만날 수 있었고, 당시 사람들의 순박하면서도 나름의 지혜가 있었던 생활 방식을 잘 알게 되었다. 이 좋은 만화를 이제 더는 못 읽는다니 아쉽다. 이즈미 이치몬 작가의 다음 작품도 꼭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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펀 홈 : 가족 희비극 (페이퍼백) 움직씨 만화방 2
앨리슨 벡델 지음, 이현 옮김 / 움직씨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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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델 테스트'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앨리슨 벡델의 개인사를 담은 그래픽 노블이다. 김하나 작가님이 추천하셔서 읽게 되었는데, 글과 그림은 물론 번역까지 훌륭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제목인 <펀 홈(fun home)>은 '장례식장(funeral home)'과 '재미있는 집(fun home)'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저자의 아버지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마을에서 영문학 교사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 장의사로 일했다. 저자의 집이 장례식장이었기 때문에 저자와 남동생들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는 장례 일을 거들곤 했다. 아버지는 상당히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사람이었다. 저자가 '여자아이'처럼 굴지 않고 '남자아이'처럼 굴 때마다 잔소리를 늘어놓고 때로는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런 아버지를 매우 싫어했다. 어서 빨리 자라서 아버지 곁을 떠나 자유롭게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마침내 뉴욕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해 부모 품을 벗어난 저자는 도서관에서 페미니즘과 레즈비어니즘 서적을 읽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했다. 그리고 얼마 후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고백했다. 그런데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 저자의 아버지가 의문의 사고로 죽었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저자는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은 것 같다고 자책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아버지가 그동안 감쪽같이 숨겨온 '진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라는 인간을 다시 보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대목은 저자와 아버지가 함께 책을 읽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이다. 저자와 아버지는 같이 사는 동안 거의 내내 불화했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잘 통했다. 시골 학교의 영문학 교사였던 아버지에게 저자는 그 어떤 학생들보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 수제자였고, 하루빨리 시골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던 저자에게 아버지는 새로운 세상을 안내해 주는 멘토이기도 했다. 마침내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 새로운 정체성을 얻은 저자의 삶과 그러지 못한 아버지의 죽음이 교차되는 장면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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