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 없는 세계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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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서 일하며 가난하지만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삼십 대 청년 인수는 어느 날 우연히 자해공갈로 돈을 벌어 생활하는 가출 청소년 이호를 보고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한다. 눈빛이 거칠고 태도가 불손한 이호를 보면서 인수는 12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지금은 직업도 있고 집도 있는 그가 한때는 이호처럼 거리를 떠돌며 생활하는 가출 청소년이었기 때문이다.


12년 전의 어느 날. 인수는 엄마와 자신에게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거리로 나온다. 인수는 PC방을 전전하고 무료 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하다 자신처럼 집이 없는 또래 청소년인 성연과 경우를 만난다. 성연과 경우는 여러모로 정반대다. 성연은 겉모습부터 불량하고 태도도 위압적인 반면, 경우는 가출 청소년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외모가 단정하고 태도도 예의 바르다. 


인수는 성연처럼 남들이 무시하지 않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거친 말투와 강압적인 태도에는 거리감을 느낀다. 경우처럼 남에게 피해를 안 주고 배려하는 사람이 멋지다고 생각하지만, 무법천지나 다름 없는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에서 경우 같은 모범생으로 사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체념한다. 


같은 가출 청소년이라도 성향은 정반대인 성연, 경우와 어울리던 인수는 가출한 아이들의 공동체인 이른바 '가출팸'에 들어가게 된다. 처음에는 화장실이나 공사 중인 건물이 아닌 반지하 빌라에서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좋았는데, 식구가 늘어날수록 더 많은 돈이 필요해졌고 이로 인해 점점 더 불법적이고 위험한 일에 관여하게 된다. 


백온유 작가는 이 소설을 집필하기 위해 인수와 성연, 경우처럼 청소년기에 가출한 경험이 있거나 소년원에 가본 경험이 있는 인터뷰이들을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에 묘사된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가 무척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런 아이들이 지금도 거리에 있을 것 같고, 그동안 나는 이런 아이들을 어떤 시선으로 봤던가 돌아보게 한다. 


가출 청소년들의 세계를 그린 소설이지만, 누구나 할 법한 보편적인 삶의 고민을 다룬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연이 악을 행한다면 경우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다. 인수는 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악을 행하는 성연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꼿꼿하게 선을 행하는 경우의 방식도 동경한다. 완벽한 악도 완벽한 선도 되지 못하고 중간에서 우물쭈물하는 인수의 모습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닮았다. 


인수는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지 못했고 주고 싶었던 사랑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이호를 만났고, 이호에게 자신이 받고 싶었던 사랑과 주고 싶었던 사랑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인수가 경우에게 배운 사랑이고 삶의 자세다. 인수처럼 경우를 기억하고 경우의 삶을 따르는 사람이 있는 한, 경우는 계속 이 세계에 '있는' 게 아닐까. 경우를 만나 본 적은 없지만 오랫동안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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