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 - 퇴직금으로 세계 배낭여행을 한다는 것
이동호 지음 / 세나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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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한 번은 세계 여행을 해보고 싶다.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다. 언제 떠날지 생각만 하지 말고 그냥 한 번 떠나보라고 등을 밀어주는 책을 만났다. 이동호의 책 <청춘의 여행, 바람이 부는 순간>이다.


저자는 27세 때 공군 중사가 되었다. 그 후로 10년 동안 직업군인으로 열심히 살았다. 순조롭게 승진을 했고, 집도 사고 차도 샀다. 안정된 직장도 있고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있었지만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0년을 채우고 전역을 택했다. 아버지는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느냐며 의절을 선언했다. 저자 역시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앞으로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할지, 보험금을 어떻게 낼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잠을 잊은 적도 많았다. 그래서 한 달 만에 집을 떠났다. 기왕 일을 벌였으니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2013년 3월의 마지막 날. 저자는 동해항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러시아에서 출발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로 건너갈 생각이었다. 말로만 듣던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친구가 있는 하바롭스크로 갔다. 기차 안에서 북한 말투를 쓰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북한 사람인가 싶어 경계했는데 알고 보니 소련에서 자라 현재는 한국 국적을 얻어 한국에서 생활하고 계신 분이었다. 할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니 그동안 소설이나 영화로 접했던 한국 근현대사가 생생하게 다가왔다.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었을까.


이후 저자는 몽골, 중국을 거쳐 캄보디아, 태국, 인도에도 가보고, 터키, 그리스를 거쳐 스위스, 런던,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에도 가봤다. 인도에선 물 한 병 사 먹고 버스 한 번 타는 것도 큰일이었다. 덕분에 설사병에 걸릴 염려 없이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것, 제시간에 버스가 온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달았다. 캄보디아에선 주급 15달러를 받으며 1인당 12달러씩 내고 먹는 뷔페에서 일하는 남자를 만났다. 관광객들이 내는 돈은 대체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걸까. 나의 여행이 이 나라 노동자들의 노동력 착취에 일조하는 건 아닐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고 마음이 무거워지는 순간이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왜 살아야 하는지 몰랐다. 길 위에서 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유서를 남기고 떠나는 불효까지 저질렀다. 그랬던 저자가 길 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 내가 뭐라고, 먹을 것이 생기면 가장 좋은 부분을 나누어주는 사람들, 쉬거나 잘 때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는 사람들을 보면서 좀 더 살아봐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내 것만 챙기며 살지 않고 남의 것까지 살피는 사람, 남의 것이 부족해 보이면 내 것을 기꺼이 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저자는 현재 귀국 후 충남 홍성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고 있다. 다음번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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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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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 해 동안 미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책이 마침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책의 제목은 <배움의 발견>. 원제는 <Educated>이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아마존 올해의 책 1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등에 올랐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순위에 90주 동안 머무르며 최장기 베스트셀러 기록을 세웠다. 빌 게이츠와 버락 오바마가 올해의 책으로 이 책을 선정했고, 이 책을 쓴 타라 웨스트오버는 2019년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들었다. 어떤 책이기에 미국이 이렇게 들썩일까 궁금했는데, 읽어보니 그 이유를 확실히 알겠다. 


이 책을 쓴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 미국 아이다호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극단적인 모르몬교 신자인 부모는 성서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공교육을 불신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현대 의학을 불신해 아이들이 아프거나 다쳐도 병원에 보내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정부를 불신해 일곱 아이 중 네 명의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저자는 아홉 살이 될 때까지 미국의 공공기관이나 학교, 병원 등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사람으로 지내야 했다.


그런 저자의 삶이 극적으로 바뀐 건 열일곱 살 때의 일이다. 저자는 열여섯 살이 될 때까지 학교에 가본 적이 없었다. 저자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학교에 가면 부정한 사상을 주입받고 정부의 노예가 된다고 가르쳤다. 저자는 부모의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친척이나 이웃이 저자의 부모가 틀리다고 해도 믿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자의 오빠 중 하나가 집을 떠나 검정고시를 치르고 대학에 진학했다. 그 오빠가 집으로 찾아와 저자에게 검정고시를 봐서 대학에 가라고 했다. 저자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자 저자의 아버지는 "여자에겐 교육이 필요 없다"라며 반대했다. 저자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열심히 공부해서 검정고시를 보고 브리검영 대학에 진학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저자는 부모가 옳고 세상이 틀리다고 생각했다. 저자의 아버지는 저자가 긴팔 옷의 소매를 걷거나 발목이 보이는 치마를 입어도 '창녀'라고 야단쳤다. 저자의 오빠는 저자가 립밤을 발랐다는 이유로 저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대학에 가니 민소매 티셔츠나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애들이 널려 있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의심하지 않았던 저자는 주변 여자애들이 전부 '창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 여자애들과 한 강의실에서 수업받고 같은 집에서 생활하는 자신이, 부모의 말대로 '미친년'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런 저자의 생각을 크게 바꾼 사건이 있었다. 서양 예술사 강의 시간에 교수님이 시켜서 교과서를 읽는데 모르는 단어가 있었다. 이 단어를 모른다고 말하는 순간 강의실이 잠잠해지고 같이 수업을 듣던 아이가 저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 단어는 '홀로코스트'였다. 저자는 그때까지 홀로코스트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들어본 적이 있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참혹한 일이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홀로코스트뿐만이 아니었다. 저자의 집에선 '깜둥이' 같은 욕이 일상적으로 쓰였다. 저자의 아버지는 노예제도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지 자식들에게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백인 노예주들이 흑인 노예들을 책임지느라 더 힘들게 살았다고 틀린 지식을 가르쳤다.


페미니즘의 정확한 뜻도 저자는 대학에서 처음 배웠다. 저자의 집에서 페미니스트라는 말은 욕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자의 부모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며, 열등한 여성이 우월한 남성의 지배를 받는 건 당연하다고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런 부모의 가르침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오빠들이 여동생인 자신은 물론 여자친구와 아내에게도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자는 일부다처제를 용인하는 모르몬교의 방침에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집을 뛰쳐 나와 대학 교육을 받기 전까지는 성서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이 믿음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자기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지난날이 부끄럽고 후회스럽다.


이후 저자는 브리검영 대학을 최우수 학부생상을 받으며 졸업했고,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대학교에서 방문 연구원으로 지냈다. 다시 케임브리지 대학교로 돌아가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열일곱 살 때까지 학교 문턱도 넘어본 적 없는 사람이 10년 만에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이만한 일을 해냈을 때 응당 칭찬하고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부모는 저자의 성취를 칭찬하거나 자랑스러워 하기는커녕 저자가 잘못된 사상에 물들어 거짓말로 자신들을 음해하고 있다며 비난하고 있다. 저자는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을 얻었고 이 책으로 엄청난 부와 명예까지 얻었으나 정작 부모와의 관계는 더 악화되고 가족과도 멀어졌다. 저자는 지금 어떤 기분일까.


저자의 사례는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불과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한국 여성들은 학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릴 때부터 노동을 하다가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집안에서 정해주는 남자와 결혼해 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낳는 것이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만약 그들이 이 책의 저자처럼 기적적으로 교육의 수혜를 받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살 기회를 얻었다면 이 책 같은 책이 수백, 수천 권은 쓰였으리라. 또한 저자의 부모는 정부가 제공하는 공공 서비스나 복지 혜택을 '빨갱이'라며 비난했지만, 저자는 그 '빨갱이'들이 제공하는 학자금 융자와 장학금 덕분에 열악한 상황을 이겨내고 지금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여전히 더 많은 공공 서비스와 복지 혜택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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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설의 시대 1 백탑파 시리즈 5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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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탑파 시리즈' 중 가장 최근에 발표된 작품이다. <방각본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열녀문의 비밀>, <열하광인>, <목격자들>로 이어지는 '백탑파 시리즈'를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대소설의 시대>를 읽고 그동안의 이야기가 집대성되었다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절친 김진의 부탁을 받고 장안 최고의 인기 대소설가 임두의 집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대소설은 열 권 이내로 완결되는 소설과 달리 전체 길이가 수십, 수백 권에 달하는 장편 소설을 일컫는다. 임두에 관해서는 벌써 23년째 <산해인연록>을 연재하고 있으며 필동에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 외에 성별도 나이도 알려진 것이 없어서 이명방은 김진의 부탁으로 임두를 만나러 가는 것이 꿈만 같다.


그런데 이게 웬일. 소설을 가득 채운 세세한 배경지식으로 미루어 보아 청나라를 몇 번은 왕래한 경험이 있는 건장한 남성일 거라는 예상과 달리 임두의 정체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노파였다. 게다가 이 노파, 일찍이 혜경궁 홍씨의 마음에 들어 궁중 여인들을 위해 <산해인연록>을 집필하기 시작했고, 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백성들도 읽게 해야 한다는 궁중 여인들의 간청 덕분에 세책방에도 <산해인연록>이 풀리며 현재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명방은 자신이 몰랐던 세상을 알고 한 번 놀라고, 이 같은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김진에게 두 번 놀란다.


문제는 <산해인연록>을 199권까지 잘 써온 임두가 5개월째 200권을 못 쓰고 있다는 것이다. 혜경궁 홍씨를 모시는 의빈은 이명방과 김진을 불러 임두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시키고, 이명방과 김진은 임두의 상황을 살피다 임두에게 치매 증상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산해인연록>의 결말을 기록해둔 수첩 '휴탑'까지 잃어버려 <산해인연록> 집필이 오리무중에 빠진다. 과연 이명방과 김진은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할까.


<대소설의 시대>는 이전 작품들에 비해 백탑파 학자들의 활약은 덜하지만 작품의 재미는 최고다. 실종된 임두를 대신해 <산해인연록>의 남은 부분을 누가 어떻게 쓸지를 두고 대결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고,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임두가 작가가 된 계기, <산해인연록>을 집필하는 도중에 겪은 변화 등도 감동적이다. 당대에 유행한 대소설을 꼼꼼히 읽고 소설에 반영한 작가의 노력도 대단하다. 작가가 지어낸 줄 알았는데 전부 다 실존하는 작품임을 알았을 때의 충격이란!


무엇보다도 역사에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여성들의 문화를 소개한 점이 좋았다. 비록 일부 양반가에서도 글을 읽을 줄 아는 여성들에게 한정된 일이었겠지만, 한 집안의 여성들이 한데 모여서 함께 소설을 필사하고 낭독하고 창작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마음이 뭉클하다. 이들에게는 대소설이 지금의 TV 드라마 같은 존재였을 터. 이야기를 짓고 향유하는 일이 남성들만의 문화가 아니라 여성들의 문화이기도 했음을 알려줘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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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광인 1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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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배경은 1792년. 정조는 전통적인 고문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패관 잡문에 가까운 글을 썼다며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한다. 하지만 <열하일기>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기까지 막을 순 없어서 도성 곳곳에 남들 눈을 피해 <열하일기>를 읽는 모임이 생겨났다. 이를 감지한 정조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을 불러 <열하일기>를 몰래 읽는 자들을 색출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문제는 이명방 자신이 <열하일기>의 열렬한 애독자이자 '열하광'이라는 독서모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방은 어명을 어기고 금서를 읽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려면 자신의 죄부터 고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가까이 이명방과 함께 <열하일기>를 읽어온 열하광의 일원들이 하나둘 죽임을 당하며 이명방의 입장이 점점 더 난처해진다. 과연 이명방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백탑파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방각본 살인사건>이 '읽을 자유'에 관한 이야기라면, '백탑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열하광인'은 '쓸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조는 박지원을 비롯한 백탑파의 학자들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명하고, 명을 어길 시에는 귀양이나 사형 같은 큰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한다. 백탑파 학자들은 정조의 명대로 글을 쓰고 목숨을 건질지, 아니면 어명을 어기고 자신의 의지대로 글을 쓸지 갈등한다. 이때까지는 아직 '쓰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읽는 사람'에 불과했던 의금부 도사 이명방은 문장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백탑파 학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정조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새로운 문장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문장 안에 담긴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치관이었다. 정조는 공맹을 위시한 성리학적 가치관만이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하고 왕조를 번성하게 해줄 유일한 이념이라고 보았다. 반면 백탑파 학자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신한 시도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열하일기>는 조선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리는 창문과도 같은 책이었고, 정조는 사람들이 이 창문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 창문을 더욱 꽁꽁 잠갔으니 이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과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정조를 가리켜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면을 본다. 정조의 목표는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켜 더욱 강력한 군주가 되는 것이었지, 백탑파의 생각처럼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더욱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미처 알지 못했던 백탑파는 결국 정조에게 버림받고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 자기 자신이 뛰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함을 알게 해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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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문의 비밀 2 백탑파 시리즈 2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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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각본 살인사건>은 의무감으로 읽었다면 <열녀문의 비밀>은 재밌어서 읽었다. 이야기는 '방각 살인' 사건 해결 이후 별일 없이 지내던 이명방이 경기도 적성에 현감으로 부임하게 된 이덕무를 도와 거짓 열녀를 색출하라는 어명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오랜만에 어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게 된 이명방은 기필코 이번에는 김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사건을 해결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날이 지날수록 사건은 해결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꼬여간다.


사건은 이렇다. 적성 임 씨 가문의 장남이 병을 앓다 죽고 몇 년 후 그의 아내 김아영이 따라 죽었다. 임 씨 가문에선 남편을 따라 죽은 김아영을 열녀로 추대하며 마을에 열녀비를 세워달라고 한다. 예전 같으면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열녀비를 세웠겠지만 이 건은 수상한 점이 적지 않다. 김아영이 남편이 죽은 후 바로 죽은 것도 아니고, 삼년상을 다 치른 후 집안 살림을 챙기다 갑자기 자진한 까닭을 알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명방과 김진은 김아영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점점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진주의 가난한 집에서 자란 김아영이 웬만한 남자들보다도 학식이 깊고 글도 잘 썼으며, 심지어 북학파 학자들이 쓴 책을 읽고 거기에 쓰인 농사 기술이나 농기구 제작법을 실제로 시도해 본 것이다.


거짓 열녀 의혹을 받던 김아영의 또 다른 면모를 알게 된 이명방과 김진은 살해 위협을 받는 와중에도 철저히 수사에 임해 김아영의 누명을 벗긴다. 김아영은 실존 인물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뛰어나고 매력적인 인물이다. 옛사랑을 이유로 새로운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 유연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남자는 바깥에서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을 해야 한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남자 몫까지 경제 활동을 해낸 능력자다. 공맹 운운하는 보수적인 남성들과 달리 새롭고 참신한 학문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배웠고, 생활에 도움이 되는 공부가 있으면 그 또한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사람 사귐에도 남녀 구분이 없고 반상의 차별이 없었다.


김아영의 위대한 행적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임씨 가문의 추악한 면도 함께 드러나는데, 그 실체는 조선 왕조가 발 딛고 서 있던 유교식 가부장제 질서의 모순과 다르지 않다. 사람을 동등하게 보지 않고 양반과 상민, 남성과 여성, 주인과 노예, 나이 든 사람과 어린 사람 등으로 구분하고 크게는 경제적 지위와 사회적 지위부터 작게는 복식과 생활 방식까지 차이를 두고 차별을 합리화했던 조선 왕조와 가부장제 질서, 그리고 임 씨 가문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 집안의 이익을 해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따르지 않으면 혈육이라도 버리는 매정한 모습에서 몇 년 후 일어날 문체반정의 그림자를 미리 본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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