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광인 1 백탑파 시리즈 3
김탁환 지음 / 민음사 / 201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야기의 배경은 1792년. 정조는 전통적인 고문의 형식을 따르지 않고 패관 잡문에 가까운 글을 썼다며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던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금서로 지정한다. 하지만 <열하일기>를 읽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기까지 막을 순 없어서 도성 곳곳에 남들 눈을 피해 <열하일기>를 읽는 모임이 생겨났다. 이를 감지한 정조는 의금부 도사 이명방을 불러 <열하일기>를 몰래 읽는 자들을 색출하라는 어명을 내린다.


문제는 이명방 자신이 <열하일기>의 열렬한 애독자이자 '열하광'이라는 독서모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명방은 어명을 어기고 금서를 읽는 사람들을 잡아들이려면 자신의 죄부터 고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년 가까이 이명방과 함께 <열하일기>를 읽어온 열하광의 일원들이 하나둘 죽임을 당하며 이명방의 입장이 점점 더 난처해진다. 과연 이명방은 이러한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백탑파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방각본 살인사건>이 '읽을 자유'에 관한 이야기라면, '백탑파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 <열하광인'은 '쓸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정조는 박지원을 비롯한 백탑파의 학자들에게 전통적인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명하고, 명을 어길 시에는 귀양이나 사형 같은 큰 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한다. 백탑파 학자들은 정조의 명대로 글을 쓰고 목숨을 건질지, 아니면 어명을 어기고 자신의 의지대로 글을 쓸지 갈등한다. 이때까지는 아직 '쓰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읽는 사람'에 불과했던 의금부 도사 이명방은 문장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백탑파 학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정조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 새로운 문장 그 자체가 아니라 새로운 문장 안에 담긴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치관이었다. 정조는 공맹을 위시한 성리학적 가치관만이 국가의 기틀을 단단히 하고 왕조를 번성하게 해줄 유일한 이념이라고 보았다. 반면 백탑파 학자들은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참신한 시도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열하일기>는 조선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알리는 창문과도 같은 책이었고, 정조는 사람들이 이 창문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을 경계했다. 그래서 그 창문을 더욱 꽁꽁 잠갔으니 이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쇄국정책과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정조를 가리켜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고 하지만 나는 다른 면을 본다. 정조의 목표는 불안한 왕권을 안정시켜 더욱 강력한 군주가 되는 것이었지, 백탑파의 생각처럼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백성을 더욱 잘 살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 미처 알지 못했던 백탑파는 결국 정조에게 버림받고 비참한 말로를 겪었다. 자기 자신이 뛰어난 것도 중요하지만 뛰어난 사람을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활용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함을 알게 해주는 사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