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그리 빈테르의 아주 멋진 불행
얀네 S. 드랑스홀트 지음, 손화수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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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소설 하면 차갑고 어두운 분위기라는 인식이 있다. 그런 인식을 깬 작품이 스웨덴 작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오베라는 남자>다. 항상 심통 맞은 표정으로 이웃에게 독설을 뿜어대는 노년의 남성 오베가 어떤 만남을 계기로 180도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전 세계 수많은 독자들이 웃고 울었다. <오베라는 남자>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노르웨이 작가 안네 S. 드랑스홀트의 장편소설 <잉그리 빈테르의 아주 멋진 불행>이 반가울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 잉그리 빈테르는 마흔을 앞둔 여성이다. 노르웨이의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며, 변호사인 남편과 천방지축인 세 딸을 키우고 있다. 잉그리가 사는 모습은 한국의 워킹맘이 사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보다 남편과 세 딸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지각을 겨우 면해 출근하면 이번엔 직장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갈등을 상대하느라 바쁘다. 일찍 퇴근하면 애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소리나 듣고, 늦게 퇴근하면 애 엄마가 되어서 가정은 뒷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지.


이 소설의 묘미는 평범한 워킹맘인 잉그리 빈테르의 일상을 그리는 가운데 쉴 새 없이 터지는 유머다. 이를테면 잉그리는 딸들을 유치원에 데려다주는 길에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다가 와인병을 깨트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바람에 와인이 외투 소매에 묻어서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시간이 급해 옷을 갈아입지 못한 채 출발한다. 다행히 딸들을 제시간에 데려다주는 데 성공하지만, 어느 후각 신경 예민한 아이가 귀신같이 냄새를 맡고 이렇게 말한다. "알바(잉그리의 딸 이름) 엄마에게서 술 냄새가 나요." 그리고 잉그리는 딸들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술 냄새나는 엄마'로 소문이 난다.


이것은 잉그리가 얼마 후 저지를 실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딸 셋을 키우기에는 집이 좁다고 느낀 잉그리는 그럴 형편이 안 된다는 남편을 졸라 이사를 하기로 한다. 때마침 잉그리가 어릴 때부터 꿈꿔온 스타일의 집이 나타나 잉그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집을 사겠다고 결심한다. 남편은 오래된 집이라서 공사비가 더 들 거라고 말리지만, '드림 하우스'에 살 생각에 푹 빠진 잉그리는 남편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설상가상으로 팔려고 내놓은 집이 팔리지 않아서 남편의 분노 게이지가 점점 높아진다.


자기가 저지른 실수는 그래도 낫다. 이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은 잉그리가 자처한 것도 아니다. 얼마 후 잉그리는 대학 사절단의 일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에 가게 되고, 그곳에서 엉뚱한 사건에 휘말려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갈지도 모른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화롭게(?) 세 딸을 키우던 평범한 워킹맘이었는데...! 이 밖에도 사고뭉치 잉그리 빈테르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이어진다. 가벼운 마음으로 웃으며 볼 수 있는 소설을 찾는 독자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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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히말라야 - 설악아씨의 히말라야 횡단 트레킹
문승영 지음 / 푸른향기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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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 좋아서 산에 인생을 건 여자가 있다. '설악아씨'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진 <함께, 히말라야>의 저자 문승영이다. 대학에서 지리교육학을 전공하고 학원 강사로 일하던 저자는 20대 후반 친구를 따라 태백산에 올랐다가 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설악산을 시작으로 백두대간을 정복했고, 낮과 밤, 여름과 겨울을 가리지 않고 산에 올랐다. 그런 저자의 눈에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가 들어왔다. 이 책은 2014년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을 연속 횡단한 저자의 기록을 담고 있다.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GHT)이란 무엇일까.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은 동서로 뻗어 있는 히말라야산맥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하이 루트를 일컫는다. 보통 네팔의 동쪽 국경에 위치한 칸첸중가 북면 베이스캠프인 팡페마에서 시작해 서쪽 국경인 힐사까지 이어지는 루트를 의미한다. 트레일이라고 해서 제주 올레같이 잘 정비된 길을 상상하면 오산이다.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은 길이만 약 1700km에 달하고, 중간에 5000m가 넘는 20여 개의 고개와 6100m가 넘는 고개 두 개를 넘어야 한다. 그것도 그냥 고개가 아니라 암벽 또는 빙벽이라서 상당한 수준의 등반 기술을 체득한 사람만이 도전할 수 있다.


저자가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에 도전한 계기는 신혼여행이다. 보통의 신혼부부는 신혼여행지로 화려하고 낭만적인 휴양지를 택하지만 등산을 좋아하는 저자 부부는 다른 어떤 휴양지보다도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에 끌렸다. 덕분에 결혼 준비와 트레킹 준비를 동시에 해야 했다. 친구들은 신혼부부를 위한 선물 대신 트레킹에 필요한 물품을 보내줬다. 허니문을 겸해 찾은 히말라야라고 해서 매 순간이 꿀처럼 달콤하지는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위험천만한 길과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날씨가 저자를 잔뜩 긴장하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인생의 동반자인 남편이 믿음직한 모습으로 곁에 있어줘서 혼자일 때보다는 안심했으리라.


그런 남편이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탈진했을 때는 저자도 아찔한 마음이 들었다. 히말라야 사정에 빠삭한 포터들도 혀를 내두를 만큼 날씨가 안 좋은 날이었다. 포터들에게 거의 실려오다시피 한 남편이 먹은 것을 모두 토하고 텐트에 쓰러져 있을 때 저자의 머릿속에선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다고 울 수는 없었다. 예전 같으면 내 한 몸만 건사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남편까지 책임져야 한다. 저자까지 저체온증에 걸리는 등 힘든 상황이 잇달아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마주치는 아름다운 대자연과 푸근한 인심이 저자를 계속 걷게 만들었다. 깊은 밤 새하얀 설산 위로 유성우가 떨어지는 모습을 봤을 때의 황홀한 기분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저자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즐거움을 놓치고 살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험지에서 40일 넘게 트레킹을 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몸도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마음도 단련시켜주는 귀한 경험일 것이다. 하루하루의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한 저자의 열정과 노력이 놀랍고, 트레킹을 마친 후에도 계속해서 산에 도전하고 있다니 멋지다. 저자의 건투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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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싸랑한 거야 특서 청소년문학 12
정미 지음 / 특별한서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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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생 지원에게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인 아버지가 새로운 사업에 뛰어들었다가 큰 빚을 지고 빚쟁이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집에서 쫓겨나 시골에 사는 할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신세가 된 지원과 언니 지혜는 로또 판매점 앞을 서성이며 로또를 살 방법을 모색한다. 로또를 사서 당첨이 되면 아버지가 진 빚도 갚고 원래 집도 되찾을 수 있을 텐데, 현행법상 미성년자인 지원과 지혜는 로또를 구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지원에게 사랑이 찾아온다면 어떨까. 작가 정미의 장편소설 <사랑을 싸랑한 거야>는 경제적인 문제로 갑자기 가정이 무너지면서 위기에 처한 여고생 지원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지원이 사랑하게 된 사람은 새로 사귄 동네 친구 찬진의 형 찬혁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든 학교에서 친한 친구들과 신나게 놀았던 지원은, 갑자기 새로운 동네로 전학을 와서 친구도 하나 없고 마음 붙일 일도 없어 우울하다. 그러다 우연히 강가에서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그의 자상한 태도와 친절한 말투에 자기도 모르게 사랑을 느낀다. 알고 보니 그 남자가 찬진의 형이었고, 그렇게 지원은 매일 조금씩 찬혁을 좋아하는 마음을 키워간다. 하지만 사랑에만 푹 빠져 있기에는 현재 지원이 처한 상황이 너무 안 좋다. 할아버지는 원래부터 형편이 넉넉지 않았고,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러 다닌다.


보다 못한 지원은 언니 지혜와 함께 돈을 벌 방법을 찾는다. 길가에서 직접 탄 커피를 팔아보기도 하고, 노래방 도우미를 하기도 한다. 위험천만한 일들이지만 아직 성인이 안 된 고등학생이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가 안 된다. 그나마도 시급이 너무 낮아서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한 지원이네 가족에게는 큰 도움이 안 된다. 그런 지원의 유일한 낙은 찬혁에 대한 사랑이다. 몇 번 만난 적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를 사랑하는 낙으로 살아가다니. 엉뚱한 소리 같지만, 당장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을지 없을지도 불투명한 상황인 지원에게 찬혁을 생각하는 시간은 유일하게 힘든 현실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일까. 지원이 찬혁을 생각하는 마음은 점점 더 커져가고, 급기야 찬혁 때문에 그동안 절친했던 언니와의 사이에서도 트러블이 생긴다. 작가는 이런 지원의 어린 마음을 사랑이 아니라 '싸랑'이라고 부른다. 상대를 무조건적으로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내 마음이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정붙일 데를 찾는 마음이 '싸랑'이다. 지원은 자신이 찬혁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지만,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랑'이 아니라 '싸랑'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깨달음을 통해 지원은 한 뼘 더 성장한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지만,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에게도 적지 않은 재미와 감동, 교훈을 주는 작품이다. 지원, 지혜 자매의 미래를 그린 이야기도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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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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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곳이 없다. 태어난 곳은 서울이지만 전세 계약에 따라 몇 년에 한 번씩 집이나 동네를 옮겨 다닌 까닭이다. 그래서 고향이 있는 사람이 부럽다. 태어난 곳에서 쭉 자라지는 않았어도 한곳에 오래 정착해 살아서 그곳을 떠난 후에도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그곳에 돌아가면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고 반겨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 부럽다. 그런 고향에 관한 소설을 읽었다. 폴란드를 대표하고 이제는 한 시대를 상징하는 작가가 된 올가 토카르추크의 장편 소설 <태고의 시간들>이다.


소설의 배경은 '태고'다. 태고의 북쪽에는 바깥으로 향하는 도로가 있고 남쪽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있다. 동쪽에는 백강과 흑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목초지와 작은 숲이 있다. 태고 사람들은 웬만해선 태고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태고에서 태어나 태고에서 자라고 태고 사람과 결혼해 태고에서 살면서 죽음을 맞는 것이 태고 사람의 일생이다. 그런 태고에 위기가 닥친다. 때는 1914년 여름. 러시아 군인 둘이 총을 차고 태고로 와서 젊은 남성들을 데리고 떠난다. 전쟁이 일어났으니 참전하라고 전한다.


방앗간 주인 미하우도 군인들을 따라 떠난다. 아내 게노베파의 뱃속에 아이가 들어선 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게노베파는 남편의 생사 여부도 모른 채 딸 미시아를 낳고 키운다. 마을 남자들은 아직 젊고 예쁜 게노베파에게 호시탐탐 추파를 보낸다. 게노베파도 속이 끓고 몸이 달아오르지만 그 때마다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르는 남편을 생각한다. 미시아가 

자라는 동안 마을 숲에 사는 크워스카도 출산을 한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크워스카는 고아로, 마을 여기저기를 떠돌며 구걸해서 배를 채우고 술집에서 몸을 팔아 이제까지 살아온 여자이기 때문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크워스카는 숲속에서 혼자 아이를 낳는다.


전쟁이 일어났다 끝나고 또 한 번 전쟁이 일어났다 끝나는 동안 태고에선 바람 잘 날 없는 날들이 이어진다. 어느 날은 독일군이 들어와 포피엘스키 집안이 대대로 살았던 성과 영지를 빼앗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유대인을 색출해 학살한다. 어느 날은 볼셰비키가 들어와 마을 사람들의 식료품을 빼앗고 마을을 병영 상태로 만든다. 어느 날은 독일군과 볼셰비키 간에 전투가 일어나 엄청난 수의 사람이 죽고 시체가 마을 곳곳에 쌓인다. 어느 날은 러시아군이 들어와 미하우와 게노베파의 집을 빼앗고 미시아를 향해 음흉한 눈길을 보낸다. 미시아의 딸 아델카는 미하우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폴란드군은 언제 오나요?" 미하우는 손녀에게 이제 더는 널 구해줄 조국은 없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딸이 필요한 것 같네요. 다들 딸만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텐데 말이죠." (13쪽)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이는 동안에도 여자들은 사랑을 하고 생명을 만든다. 게노베파는 미시아와 이지도르를 낳고, 미시아는 아델카, 안테크, 비테크에 쌍둥이 딸까지 낳는다. 크워스카도 딸 루타를 얻는다. 여자들은 제대로 된 직업도 가지지 못하고 자기 몫의 재산도 형성할 수 없다. 한 번 결혼한 남자와는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것이 도리라고 믿고, 그러한 도리를 따르지 않는 여자는 창녀 취급을 당한다. 그래서 어떤 여자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도 맺어지지 못하고, 어떤 여자는 따로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매를 맞고 겁탈을 당한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계속 살아간다. 마치 삶이라는 선택지밖에 없다는 듯이.


전쟁 전에 태고 사람들은 태고에서 벗어난 삶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전쟁 후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태고를 떠난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떠나고 어떤 사람은 새로운 가족을 만들기 위해 떠나고 어떤 사람은 그저 태고가 싫어서 떠난다. 그들처럼 태고를 떠났다가 오랜만에 다시 태고를 찾은 아델카는 태고가 많이 변한 것을 확인한다. 그 많던 가족과 친지 중에 남은 사람도 아버지뿐이고, 어릴 적에 알고 지냈던 사람들도 거의 다 떠났거나 죽었다. 거의 십여 년 만에 고향을 찾아와 애써 살갑게 구는 딸에게 아버지가 하는 말이란 고작 이런 것이다. "왜 아들을 낳지 않았니?" 아버지의 무심한 말에 아델카는 내가 이래서 집을 떠났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런 아델카가 집을 떠나면서 훔치듯 가져온 물건이 있었으니, 오래전 미하우가 전쟁에 끌려갔다가 돌아올 때 가져온 커피 그라인더다. 아마도 아델카는 두 번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기다릴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아델카는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커피 그라인더를 만질 것이다. 커피 그라인더를 만질 때면 전쟁터로 간 남편 대신 고향을 지킨 외할머니와 대가족을 거두어 먹였던 어머니와 다정했던 자매들이 떠오를 것이다. 이제 아델카의 고향은 아버지의 집이 있는 곳이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했던 추억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고향은 있다. 아니, 예전부터 있었는데 이 소설을 읽기 전까지 차마 깨닫지 못했다. 나의 태고는 어머니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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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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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남들이 나에게 잘못한 일을 곱씹는 경우가 많았다. 스무 살 언저리에 사귀었던 남자친구가 번번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일. 십 년 넘게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알고 보니 뒤에서 나를 흉보고 다녔던 일. 아버지 어머니가 나에게 상처 주었던 일. 그런 일들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착한데 남들이 나쁘다고, 나는 무고한데 남들이 나에게 죄를 짓는다고 믿었다.


언제부터인가 남들이 나에게 잘못한 일보다 내가 남에게 잘못한 일을 더 자주 곱씹게 된다. 친하다는 이유로 연락을 소홀히 했던 일. 나를 변호하느라 남의 입장은 살피지 못한 일. 잘못을 하고도 제대로 용서를 구하지 않았던 일. 그런 일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내가 생각만큼 착하지도 않고 무고하지도 않음을 새삼 확인한다. 더 이상의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고 싶지 않아서 말을 삼가게 되고 몸을 움츠리게 된다. 이런 나를 두고 어떤 사람은 소심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겁쟁이라고 한다. 후회를 늘리지 않으려고 행동의 속도를 부러 늦추는 내가 이상한 걸까.


"지나고 나면 슬픔은 더러 아름답게 떠오르는데, 기쁨은 종종 회한으로 남아 있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는 내가 버텨온 흔적이 있고, 기쁨이 남은 자리에는 내가 돌아보지 못한 다른 슬픔이 있기 때문이리라."

(한지혜, <참 괜찮은 눈이 온다>, p.6)


소설가 한지혜의 산문집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다가 처음으로 밑줄 그은 문장이다. 아무리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걸 통해 얻은 게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대로 아무리 기쁘고 즐거운 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후회스러운 점이 있다. 저자가 이런 깨달음을 얻은 건 결코 순탄했다고 말할 수 없는 어린 날의 경험 덕분이다.


저자는 사 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가난한 부모는 애가 둘이라고 속여 셋방을 구했다. 이사 당일 애가 넷인 걸 보고도 집주인은 놀라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허다했던 탓이다. 여섯 식구가 한 방에 뒤엉켜 자다 보니 언니의 생리혈이 저자의 속옷에 묻어 초경을 했다고 착각한 적도 있다. 남몰래 좋아하던 선생님이 집까지 바래다준다는데도 초라한 살림을 보여주는 게 싫어서 거절한 적도 있다. 그때는 우리 집이 세상에서 제일 못 사는 것 같았다. 돈도 없이 애를 넷이나 낳은 부모가 원망스러웠다. 그러다 얼마 전 저소득층 아이들이 생리대가 없어서 신발 깔창을 대신 사용한다는 기사를 봤다. 아무리 가난해도 생리대가 없어서 고생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무능한 부모라도 딸 셋이 쓸 생리대 값은 벌어다 줬다. 그동안 가난 운운하며 자신의 불행만 헤아리고 남의 불행은 돌아보지 못한 게 너무나 미안했다. 부모를 원망했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저자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 놀기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까지 잘하니 주변 어른들의 평판이 좋았다. 어린 마음에 그런 평판에 취해 실수를 한 적이 있다. 국민학교 시절의 일이다. 같은 반에 행색이 초라하고 성적도 낮아서 바보라고 놀림을 당하던 아이가 있었다. 구구단을 못 외우는 그 아이에게 구구단을 가르쳐주겠다고 나섰다. 순수하게 그 아이를 돕고 싶어서가 아니라 똑똑한 아이가 착하기까지 하다는 칭찬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때는 그런 마음이 위선인 줄 몰랐다. 그 후로는 아동 후원 같은 자선 행위를 할 때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행위를 하는지 살핀다. 오만과 치기를 선의로 포장하는 법을 아는 영악한 아이가 아직도 내면에 있을지 몰라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킨 적도 있다. 중학교 시절의 일이다. 학교 밖에서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야단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혼나는 것도 무섭고 모범생 이미지가 무너지는 것도 두려워 당시 같은 자리에 있었던 다른 학생의 핑계를 댔다. 덕분에 혼나지 않고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름이 오른 학생은 선생님에게 불려가 심한 곤욕을 치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자신이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거나 상처를 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잘하는 거라곤 공부뿐인 힘없고 가난한 어린 여학생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선 약한 자신도 강한 입장에 설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신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남에게 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는 약함과 강함, 선함과 악함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속성임을 알아서다. 


한 편의 성장소설 같은 산문집을 읽으며 어쩌면 성장은 못난 사람이 난 사람이 되는 과정이 아니라, 못난 사람이 더 못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저자는 열심히 발버둥 치며 배우고 있다. 수학 문제를 풀면서 인문학적으로 사고하는 아이에게는 어른들이 간과하고 있는 공정이란 가치를 배웠다. 로자 파크스의 동화를 통해서는 "정해진 차별의 자리를 지켰지만 하차당했"던 소수자들의 역사를 배웠다. 미투 운동을 보면서는 아무리 약한 사람도 서로 힘을 합치고 어깨를 나란히 하면 세상을 뒤집고 바꿀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전에 몰랐던 것을 지금 안다고 해서 함부로 발언하거나 섣불리 행동하지는 않으려 한다. 알기 때문에, 가 아니라 알기 위해서 말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되려 한다.


이 책을 읽으니 사람들이 나를 두고 소심한 겁쟁이라고 놀렸던 이유를 알 것 같다. 후회를 늘리지 않으려고 행동하지 않는 건 못난 사람이 되든 말든 발버둥치지 않는 것과 같다. 저자가 안다고 말하기 전에 알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남의 잘못을 흉보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살피는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배우고 성장하고 싶다. 영영 못난 사람으로 남지 않는 법을 알려준 이 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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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14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신 분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돌아보고나서 리뷰를 쓰시네요. 도대체 이 책이 어떻길래 그런가 싶어 저도 장바구니에 담습니다.

mira 2019-11-14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이야기 많이 들려서 장바구에 넣어야 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