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림도령 / 궤네깃또 한겨레 옛이야기 5
송언 글, 이웅기 그림 / 한겨레아이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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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최근 고스트메신저와 관련하여 한국신화 요소가 반영된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다. 특히 그 신화대상이 되는 인물은 환웅, 주몽, 혁거세와 같은 문화영웅을 다룬 건국신화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과업을 수행하여 신이 되는 무속신화이다. 무속신화는 영웅들의 건국신화와 달리 기록유지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민중에 의해 입으로 입으로 흘러가는 신화이다. 그래서 무속신화는 인간 과거, 현재, 미래까지 연결되는 다리라는 것이다.

 

그 많고 많은 여러 무속신화 중에서 궤네깃또라는 신화를 한번 읽어보았다. 나는 이 신화는 소천국과  백주또가 혼인하여 5명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데, 백주도가 6명째 아이를 낳자 소천국이 집안 경제상황으로 인해 농사를짓는다. 소천국은 농사짓다가 점심밥을 먹으려고 어떤 스님이 밥을 모두 먹어버려서 자기 소와 남의 소까지 먹어 아내인 백주또에게 집에서 내친다. 백주또는 6째인 궤네깃또를 임신하고, 궤네깃또는 5살이 되자 아버지인 소천국을 보고 싶어 산에 가서 소천국을 만나지만, 아버지의 수염을 뽑은 죄로 마을에서 쫓겨난다.

6년 동안 방랑하며 용왕에 의해 구출되어 용왕딸과 결혼하고 다시 육지로 나와 북쪽나라 오랑캐를 무찌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궤네깃또가 고향으로 오기 전에 부모님들은 궤네깃또가 온다는 말을 듣고 산으로 도망치던 도중 발 끝이 걸리는 바람에 모두 죽게 된다. 궤네깃또는 자신이 오기 전에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시체를 모아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준다. 이 뒤에 궤네깃또는 제주 백성을 위해 일을 하고, 죽고 난뒤에 마을 수호신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어느 영웅적인 기질을 가진 인간이 모험을 하고 난뒤에 고향에 와서 지도자로 되기보다는 신으로 추대되는 이야기다. 궤네깃또 신화에서 이 귀네깃또는 남쪽나라에 가서 북쪽나라 오랑캐를 무찌리고 왕국에서 편하게 살 수 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남쪽나라에 있었다면 그는 분명히 영웅적인 기질로 인해 남쪽나라 왕을 몰아내어 왕이 될 수 있던 남자일 것이었다.

 

나는 이 신화를 보면서 제주도의 식생활과 많은 관련있음으로 판단했다. 우선 소천국과 백주또가 5명의 아이를 가지게 될 때에는 식량문제를 허덕이지 않았으나, 궤네깃또의 임신은 곧바로 식량문제로 이어지고, 제주마을에서 기존 식량문제는 채집이나 수렵으로 했었다면, 궤네깃또 출산 후에는 농사를 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이다.

 

농사를 짓다가 스님이 소백산의 밥을 모조리 먹었는데, 이것은 스님이 먹은 게 아니라 초자연적인 현상 즉 가뭄이나 홍수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제주사람은 식량이 없어서 자신이 키우던 소를 먹게 되었다. 그런데 소는 농경사회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산이다. 소를 잡아 먹음으로써 농사를 하는 남자가 무용지물이 되자 남편이 아내에게 타박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소백산이 집에서 쫓겨나 산에서 기거한 점을 볼때 다시 농경사회에서 산에서 수렵이나 채집으로 생계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문제는 궤네깃또가 5살 되던 해이다. 궤네깃또는 아버지가 보고싶어 산에 갔으나 아버지의 수염을 잡아 댕긴 점이다. 가부장제도에서 아버지의 수염은 가장

의 권위이기도 하였다. 궤네깃또는 자신이 아버지와 같은 권위를 가지고 싶었으나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제주도에 나온 것이다.

 

그 후 6년동안 방랑하여 용왕나라로 가서 셋째 딸과 결혼했는데, 이때 궤네깃또는 바다음식인 생선이나 해물보단 육고기인 돼지고기와 소고기를 원했다. 이뜻은 식량부족으로 인해 다른 곳에 간 사람들이 단백질공급을 생선에 한계점이 있다는 뜻이었다. 궤네깃또의 육고기에 대한 열정때문에 용왕이 자신의 딸과 함께 지상으로 보내고 궤네깃또가 남쪽나라로 가는데, 이때 북쪽나라 오랑캐가 침범해온다. 궤넷깃또가 전쟁에 가서 적을 무찌를 때 이상한 점은 적장의 머리가 1가 아니라 2개, 3개, 4개라는 점이다.

 

이말은 궤네깃또가 상대한 적군의 수가 아주 많았다는 점이고, 궤네깃또는 모두 섬멸했다는 점이다. 궤네깃또는 기본적으로 음식을 많이 먹어 힘이 세고 무술에 대한 조예가 있었으며, 심지어 글공부까지 능한 양반이었다(양반은 문반, 무반을 합한 말이다). 그는 남쪽나라에서 지위높은 장군으로 있을 수 있었으나 그것을 거부하고 제주마을로 돌아간다.

 

그가 돌아갈 때 부모님은 그의 귀환 소식을 듣고 놀래 산으로 도망치다 발 끝이 걸리는 바람에 넘어져 죽었다는 말에서 아마 궤네깃또가 부모님을 살해했는지 혹은 제주마을에 식량이 없어서 아사했는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으나 부모님의 죽음으로 궤네깃또는 제주섬에서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궤네깃또는 무술만 아니라 머리가 좋은 점에 나는 깊은 관심이 있는데, 그 이유는 가뭄이 들면 풍년, 먼 바다에 나가 고기잡이 할때 풍랑을 잠재웠다는 것이다. 그것은 궤네깃또가 기상학과 지구과학 지식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아버지 소천국이 농사하는 것이 실패했으나 궤네깃또는 농사를 성공적으로 만들게 한 점으로 치수사업을 제대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바다에서 풍랑을 맞이할 때는 기상변화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마을 주민에게 존경받고 죽어서는 마을신으로 추대되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그의 제사에는 반드시 소고기와 돼지고기가 빠지지 않고 올라가는 점이다. 제주도 사람들은 단백질 공급으로 생선이 많이 있으나 그래도 육고기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육고기인 소와 돼지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분명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그러나 이 소와 돼지를 양육하려면 이들에게 먹여야 할 곡식이 필요하다. 아버지 소천국이 소를 잡아 먹은 이유도 인간이 먹어야 할 곡식이 소와 경쟁상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궤네깃또의 가장 큰 업적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곡식문제를 해결하여 소와 돼지를 키우기 좋은 마을로 바꾼 점이다. 이게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궤네깃또가 소와 돼지의 고기를 좋아하듯이 당시 제주사람들의 식성에서 소와 돼지의 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속신화에서 주인공 인물은 실존인물이 아니다. 단지 그 시대나 혹은 계속 인간이 살아가면서 무형의 존재를 하나의 존재로 만들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상상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상상의 인물은 오늘날까지 살아가는 인간들마저 생각나게 하는 인물이다. 신화는 끊임없이 새로 생기고 변화하며 살아간다. 아마 우리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없어지는 그날까지 말이다. 이 글을 적은 시점은 미국 컬럼비아대학 문화인류학자인 마빈해리스 교수님 도서(작은인간, 식인과 제왕, 문화의 수수께기, 음식문화의 수수께기)를 읽은 후에 생긴 관점으로 작성했다. 





2001년 작고하신 마빈해리스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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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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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시대에는 영웅의 서사시보다는 영웅들의 죽음과 몰락을 알리는 비극시가 성행하였다. 비극적인 이야기는 희극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더 깊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의 운명이라는 파도 위를 타고가는 존재로 나타내는 것은 우리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도 생각하기도 한다.

허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는 것으로 인간은 신과 대화하는 것과 신에게 계시를 받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점에서 인간은 그 어떤 생물보다 고귀하고 더 없이 높은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는 인간만물의 척도이다라고 할 정도이니 인간은 상당히 고귀한 존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고귀하고도 보잘 것 없으므로 항상 신에게 시험 받기 때문에 축복과 절망을 동시에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신과 가장 닮은 존재이라 보는 것이 고대 서양 사상이 아닌가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만큼 인간은 더욱 큰 기쁨과 절망을 받는다. 영광스러운 기쁨은 매우 아름답지만 절망에 가득찬  슬픔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이상 재기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게 한다. 그래서 비극시라는 것이 많은 인간들에게 큰 공유할 사고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다는 명언처럼 비극시에 흘러 나오는 슬프고도 웅장하고 거대한 이야기는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깊은 절규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런 비극적인 내용을 시인들이나 혹은 배우들이 직접 나서서 무대 앞에 관청하는 사람들에게 그 비극을 전한다면 관중들을 배우와 시인의 노래를 듣고 얼마나 깊은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을 느낄 수가 있을까?

소포클레스의 비극 전집에서 그런 인간들에게 절대적으로 안겨주는 인간의 어두운 이야기를 건네준다. 그곳에는 금지된 사랑인 금친상간, 가족간의 미움과 살인 그리고 복수, 홀로 남는 인간의 고독과 그 고독한 인간을 억압하는 인간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21세기조차도 그런 비극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사실 신화라는 것은 오래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지만 그 이야기들이 수천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고 사람들의 눈과 귀에 멤돌고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비록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도 인간 본성은 변하지 않은 법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절망과 분노 그리고 슬픔은 그 당시 인간들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고대 인간들과 현대 인간들의 시간의 벽은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신화와 소포클레스의 비극시들은 우리에게 문학적, 신화적, 문화인류학적 등 다양한 학문과 교양으로서 다가온다. 그런 고대의 이야기를 접함으로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코로스라는 존재로 통해 영웅과 등장인물을 돌이켜 봄으로서 세간의 사람들의 인정을 알 수 있고,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로 통해 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을 운명의 장난에 밀어넣는 신마저 사실은 신이기 보단 그 당시의 사회적인 흐름이라 볼 수 있다. 그리스 신화는 개연성 즉 필연성이 강조되므로 인간은 오만하거나 어리석으면 분명히 거기에 해당하는 응분의 댓가를 치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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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 교양인을 위한 구조주의 강의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경덕 옮김 / 갈라파고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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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조주의를 알게 된 계기는 애니메이션을 연구하면서이다. 그때 처음으로 애니메이션 연구도서로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한 석사학위 논문으로 이 작품에서는 애니메이션을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즉 기존의 상식과 틀을 깨고 인간 그 자체를 연구하고 고찰하는 새로운 학문이었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나의 인생은 그저 만화애니메이션을 보는 향유자가 아니라 만화애니메이션을 하나의 연구 텍스트로 삼는 리뷰어 및 칼럼니스트의 길로 접어 들었다.

물론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라는 신분이지만 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접한 학문과 사상은 이미 나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바로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은 인문사회, 정치, 철학, 건축, 경제, 예술 등 수많은 분야에 많은 전환점을 일으킨 사상이었다. 그런데 이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사상을 공부하면서 이 사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파가 있다는 사실과 그리고 그 학파도 원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내가 먼저 제일 알게 된 학자는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에서 장 보드르야르와 자크 데리다였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과 자크 데리다 해체론은 미디어와 기존 관념에 대해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여 비판한 도서이다 현재 내가 직업 읽어본 서적으로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이지만, 자크 데리다의 해체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에 관한 논문에 계속 언급되어 우리가 기존 관념에 사로잡힌 것과 그것에 반대되어 다른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프랑스 후기구조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였다. 독일에서 생긴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도 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연구하였다. 이런 기존 관념과 틀을 깨고 다른 틀로서 견주어 볼 수 있는 이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해 나는 과연 우리 인간의 사고가 얼마나 사회적인 통념으로 사로잡혔는지 그것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모순과 왜곡이 발생한지를 성찰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당시 읽었을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을 소개하고 누가 그 사상을 제대로 연구한지를 알 수 있게 해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은 나에게 조금 더 넓은 시야와 어떻게 다시 공부해야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되면서 나는 철학과 인문사회를 2010년 초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대해 깊이 공부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후기구조주의가 있기 전에는 (전기)구조주의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구조주의는 프랑스 인류문화학 및 신화학자로 저명한 레비 스트로스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부터 시작하여 세계 모든 학문의 원류가 된 사상이었다. 그런 점에 후기구조주의가 성립되기 전에 존재하였던 구조주의를 알고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지 그 학문적 배경과 흐름을 살펴볼 수 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상이란 학문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일단 누가 어느 사람이 있고 무슨 말과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야만 한다. 이 책은 구조주의 학자 4인을 소개함으로써 우리가 구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게 하는 구조주의 입문서이다. 그래서 구조주의학자 4인방으로 구조주의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 롤랑 바르트, 미셸 푸코, 자크 라캉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말 그대로 신화학과 문화인류학자이고, 롤랑 바르트는 텍스트의 문학적인 연구를 위대하게 이룩한 사람이며, 미셸 푸코는 역사학자이지만 계보학으로 통해 권력이 인간에게 행한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폭력에 대해 폭로를 하였으며, 자크 라캉은 인간의 정신과 심리를 연구하는 것을 새롭게 해석하였다.

구조주의 4인방에 대한 이야기와 학문적인 성향을 보여주면서 이 책에서는 구조주의 이전에 있었던 구조주의 뿌리까지도 설명하였다. 인간은 정해진 틀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현재 자신의 위치에서 주변을 바라보게 해주었던 칼 마르크스, 인간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이 우선이란 것을 알려주던 지그문트 프로이트, 모든 인간은 기존 틀에만 얽매혔다면서 대중들의 어리석음을 탄식하던 프리드리히 니체를 소개했다. 그리고 구조주의학의 근본적인 것을 성립하게 해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언어학까지 소개하여 구조주의 시초와 흐름까지 보여주었다.

물론 구조주의에 대해 그리고 그 학자에 대한 사상과 연구자료를 하나하나 읽어본다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그들의 서적과 연구를 독자에게 어렵지 않게 정보를 제공하여 독자로 하여금 구조주의를 알려고 하는 것에 대해 많은 도움을 준다. 개이적으로 내가 가장 흥미로운 구조주의학자는 미셸 푸코였다. 권력과 기존 고정관념이 얼마나 큰 죄악으로 인간을 괴롭혀 왔는지 그것이 아직도 이어져서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몰아 넣는지 말이다.

사회적 약자인 애니메이션오타쿠로 미셸 푸코의 주장은 상당히 흥미롭고 인상이 깊었다. 인간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안주하려는 성향으로 우리와 다른 집단과 인간을 소외시키거나 혹은 추방시키게 한다. 인간들이란 집단이 결국 자신들을 광기로 얼룩진 괴물로 변하여 괴물이 아닌 괴물을 만들어 억지로 희생시키는 것이다. 그런 광기어린 희생은 과거에도 계속 되었으며 앞으로도 이어진다. 전에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에서는 이런 스펙타클한 연출로 인해 대중들은 자신의 존재를 찾기보단 어느 조장된 이미지에 의해 수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런 스펙타클을 만드는 것은 진실이 아닌 가상으로 만들어진 시뮬라크르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미셸 푸코는 구조주의학자이지만 한편으로 후기구조주의학자이기도 하다. 그렇게 구조주의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편견과 오만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학문을 일으킨 것이다. 과연 나는 이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를 얼마나 이해하고 받아 들일까? 인간은 언제나 사고하며 행동하는 이성적인 존재다. 하지만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이성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이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소외와 냉대를 일으킬 수 있는 독약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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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정체(政體) - 개정 증보판 헬라스 고전 출판 기획 시리즈 1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 서광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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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정치학, 철학, 인문사회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의 입장에서 플라톤의 국가정체는 그야말로 난해한 진리가 숨은 도서이다. 이렇게 사상철학으로 문외한 인간이 고대 그리스에서 신적인 지혜를 가진 플라톤을 알아간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전혀 배우지도 못했으며 다가갈 수 없는 세계에 남의 도움없이 자신의 힘으로 알아간다는 것은 어째 보면 정말 자랑스러우면서도 떳떳한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알고있고, 자신이 손쉽게 닿을 수 있고, 자신이 아무런 제약없이 안주할 수 있는 곳에 있기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느 한 문외한 인간 하나가 플라톤의 국가정체를 읽는다는 것은 솔직히 매우 도전적이고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문외한이기에 본인이 알 수 없는 것을 알아가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인생의 가치에서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읽어본 플라톤의 국가정체를 보자면 우리 인간사회 구성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제적인 조직인 국가라는 것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플라톤이 적어나가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서 국가란 정말 어떻게 다스려야 할것인가? 그리고 그 다스려야 할 인간들은 과연 어떤 사람이고 그 사람을 만드는 것과 임명하는 것, 국가를 운영을 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준다.

내가 볼때 플라톤이 적어나가는 이 국가정체에서 그 정체를 이루는 인간들은 동양으로 따지면 왕도정치와 군주정치를 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단지 내가 생각함에 있어서 차이점이라면 동양의 임금은 백성을 주인으로 여기고 항상 마음 속 깊이 최선을 다한다는 점과 여기서 깊은 이상적인 사고방식에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따뜻한 감성이 있어야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서양사고방식은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요구된다. 마치 나라를 다스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이성으로 뭉친 철학자적인 정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성을 중시하는 플라톤인만큼 인간의 이성을 훼손하는 감정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배제할 것을 요구한다. 

게다가 정치지도자는 어린시절부터 언제나 근면하고 절제된 생활을 해야하며, 인간으로서 한번씩 누리고 싶은 사랑까지도 엄격하게 제한을 두고 있다. 나라를 다스릴 정체는 올바른 가치관과 사고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거기에 알맞은 여성으로 배필을 맞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남녀의 사랑마저도 그런 이상적인 세계를 위해서라면 현대에서 살아가고 있는 문외한 사람으로서 그건 정말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남녀의 사랑은 머리로서 하는 이성이 아닌 마음으로서 나누는 감성적인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남녀의 사랑으로 일꾸어낸 자녀마저 자신의 부모가 아닌 자신들의 부모들이라는 것은 솔직히 납득가지 않은 부분이다.

그리스철학의 시점에서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테레스가 매우 중요한 점과 그리고 아직도 현대사회에서도 그들의 철학을 그대로 배우고 연구하는 점에서 이들의 학문적인 가치를 매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인간은 뭐든지 이성으로만 살 수 없고, 그런다고 이성을 배제해도 살 수 없다. 인간의 감정이 모두 좋을 수는 없으나 그 감정을 죽인다는 것은 인간 스스로를 마치 목석같은 존재로 만든다.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은 좋으나 모든 사람들은 이상적이지 못하다. 우월한 사람이 있다면 우월하지 못한 나같은 인간도 있다. 그렇게 구별하고 선별하여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은 좋겠지만, 인간의 가치를 정체의 자격으로 모두 결정하는 것은 바르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허나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정치인이 가져야할 덕목과 사고방식은 분명하다. 국가정체가 그가 군주인가 참주인가에 따라 그가 다스리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은 행복과 불행이 교차하고, 국민의 행복이 불행으로 변하는 순간 그 나라는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찬 악의 소굴로 되어 버린다. 게다가 국민들을 비탄에 빠지게 한 정체는 자신이 살아가는 시기에는 언제나 비난과 고독으로 괴로워 해야하며, 죽은 뒤에는 모든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되는 신세가 되어 죽어서나 살아서나 비참한 신세를 모면하지 못한다.

게다가 국가를 운영하는 정체가 모든 사람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고통은 그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자신의 악덕을 미치게 된다. 소중한 친구 중에서 바른 생각을 지닌 친구라면 참주 곁을 떠날 것이오 이기심으로 가득한 친구는 그의 곁에 붙어 참주정치의 극악함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참주의 가족들은 참주로 인해 참주의 부모는 자신을 잘못 키운 죄로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고 자녀들은 어긋난 부모로 인해 자녀들의 인격마저 비틀리게 될 것이다. 주변에 모이는 사람들은 자신과 국가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과 권력을 걱정하는 사람만 모일 것이다. 이런 부류의 인간이 모이면 결국 그 나라는 어느순간 역사의 이름에서 사라질 수 있거나 그 나라가 영속하더라도 모든 사람들이 통념과 비탄으로 얼룩질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정체는 다소 현대에서 살아가는 나같은 문외한에게 분명 납득이 되지 않을 내용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일해나가야 할 정치자들에게 자기가 과연 어떤 정치를 해야하는지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게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정치자가 아니더라도 그 정치자의 국가운영아래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도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국가가 얼마나 잘 운영되고 있는지 혹은 안되는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책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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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마코스 윤리학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12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웅 옮김 / 돋을새김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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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는 내가 중학교 시절 사회시간에 처음 들어보았던 그리스 철학자였다.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윤리나 사회과학 수업에서 그의 이름을 몇번 듣기만 했지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무엇을 생각하며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전혀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서사와 신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고, 거기에 맞추어 인문사회 정치철학에 대한 내용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현재 평범한 기술엔지니어회사에 다니는 사회인이지만 지금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한 시점에 나는 다시 철학이란 존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인생의 가치는 무엇일까? 혹은 인생의 가치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고 무슨 행동으로 남과 맞추어 가야할 것인가?
그런 인간 자신에 대한 사유적인 태도에는 진리를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 모두는 현자나 철자가 아닌 평범한 군중이다. 군중이란 사회적 위치에서 대중문화에 휩쓸리게 된다면 우리는 진리를 찾아 가는 것이 아니라 실리만 찾아가는 것이다.
물론 진리에서 실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진리속에는 실리가 되는 일들이 즐비하다. 나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 들어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필요한 윤리도덕적인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생겨나는 모든 인간관계를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이상적으로 살아갈 수 없지만 자신은 이상적이길 바란다. 실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은 명예를 가지기 원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예를 바라는 할 존재가 아니라 명예 자체는 인간의 진실한 덕을 갖춤으로 인해 생겨나는 마땅한 것이라고 보았다.
덕을 쌓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이성을 다스려서 진정한 의미를 찾아내어 거기에 올바른 행동을 함으로서 진리가 생기고 덕이 생긴다. 
하지만 그런 행동에는 깊은 사고와 실재적인 행동이 따른다. 그런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인간의 도덕윤리적인 문제를 주어진 명제와 사례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합리적 사고로 통해 묶은 서양 최초의 윤리학 교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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