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교양 교양인 시리즈 4
박석무 지음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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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학교 동아리 활동을 녹차동아리에서 하였다. 이름은 지산다우회라고 작은 대학교 안에 있는 작은 찻잔이 있는 작은 동아리이었다. 그곳에서 대학교 3학년과 4학년을 보내며, 마지막 대학 청춘을 보낸 곳이다. 그러나 내가 대학교를 졸업 후에 군간부로 복무하던 중에 인원이 없어서 폐부된 것으로 인해 나의 마음을 심하게 아프게 한 추억이다.

일단 여기까지 나의 대학 추억담을 올려 놓으면서 저 위에 소개할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 관계가 있다. 아주 깊고 깊은 관계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내가 있던 녹차동아리에서 차의 인물로 꼭 등장시킨 역사적인 사람이 있었다. 18C 조선 후기 불교계의 거승이며 현학자인 아암 혜장 스님과 19C 한국 최고의 다인인 초의선사와 그의 친구인 추사 김정희 선생님, 그리고 이 3명의 다인에게 스승으로 존대받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하면 한국 정치, 철학, 사상, 문학, 의학 등 많고 많은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한국에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한국 철학사상의 마지막으로 나오고 그 집합되는 사람이 다산 정약용이라고, 물론 그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훌륭한 분들은 꾸준히 나왔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한국 정치사상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의 가렴주구로 병들어 가는 불쌍한 백성들에 향한 애정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베트남과 같은 다른 나라까지 가지 않았는가? 월남전이 발발할 때 베트콩의 지도자인 호치민은 다른 것을 다루 내버려 두어도 다산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만은 가지고 다녔다. 물론 월남전은 미국이 1964년 베트남 동쪽 통킹만에서 공작을 펼쳐 일어난 일이었으나 적어도 이 전쟁에서 승리로 이끈 호치민이 어떤 지도자였고 그 지도자가 그토록 중시하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봂 필요가 있다.

그 호치민이 가슴 속에 품은 목민심서, 이 목민심서의 위대함은 그저 단순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목민심서를 만든 다산 정약용은 조선 후기 영조시절에 양반가문에서 태어나 얼마든지 권력을 누리고 편하게 살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열렬한 충신이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와 그의 인생에 대해 고찰한 서적으로 다산 정약용이란 인물이 얼마나 자신보다 약한 백성들을 사랑하는지 얼마나 그 시대의 비틀림에 통곡했는지 얼마나 그 분이 어긋난 권력 앞에서 시련을 당했는지 우리는 절실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다산 정약용 선생이 강진으로 유배가는데, 어느 농민이 관에다가 세금(군포세)을 제때 납부하지 않아 집에 하나뿐인 재산인 소를 강제로 빼앗겼다. 그리고 그 농민은 자신이 가난하고 힘이 없다는 분노와 자신이 후사를 낳아 이런 부당한 일에 당한 것에 자괴하여 낫으로 자신의 남근을 베어버렸다.

그 농민이 자신의 신체를 날카로운 낫으로 베어 방안에서 시름하고 있을 때 밖에서 남편의 신음소리를 들은 아낙네는 방에 급히 들어오 보니 자신의 남편이 고통스러워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낙네는 자신의 남편이 베어버린 남근을 손에 잡고 그 피가 줄줄 흐르는 슬픈 남편의 남근을 잡고 관아에 달려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관아에 가서 호소만 하면 무엇하리, 관아에 퍼져 나가는 젊은 아낙네의 울음 소리는 동네방네를 돌아가나 높은 담으로 쌓인 관아에는 콧털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낙네는 남편의 남근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며 서럽게 울며 돌아갔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애절양"이라는 한국 국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의 탄생배경이다.

최근 75만원 용역에 300~400원 식사비를 제공받는 용역하시는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슬픈 기사를 보았다. 물론 내가 보고도 직접 도와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면 내 자신도 그런 위선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힘겹게 일을 하고 대우조차 받지 못한채 일자리에서 내몰리는 것을 본다면 위에서 보는 애절양과 무엇과 다르랴?

그런데도 세상은 그분들을 딱하게 여기지 못할 망정 그들에게 야유와 멸시를 보내는 이마져 있으니 참으로 슬프고도 원통하고도 분노가 넘치는 일이다. 다산 정약용 선생, 그는 분명히 한 시대를 풍미하고 그 심한 박해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굴하지 않은 불멸의 인간이다. 하지만 그분의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정신은 여전히 되찾지 못한채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가니 비극이 아닐 수가 없다.

이 책에서 나온 어느 시조를 인용하여 각박한 세상이 단군시대보다 못한 것 같으니 정말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다고 다산 정약용 선생이 원한 세상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저 조금 조금씩 바꾸어 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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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인간 -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마빈 해리스 지음, 김찬호 옮김 / 민음사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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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마빈 해리스 교수의 식인과 제왕이란 서적을 읽은 본후에 이번에는 작은 인간을 읽어보았다. 작은 인간이란 단어에서 이 책을 읽은 본인으로서는 작은 인간은 인류의 조상인 원시인간이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 현대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라고 생각했다.
작다는 의미는 키가 크고작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안나가고와 같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인식이나 사고방식이 얼마나 작고 미미한 가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현대사회는 인류의 문명으로 꽃피운 과학기술의 터전이다.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세상에서 이런 사고로 통해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인간들을 평한다는 게 얼마나 자기모순적인가를 알려준다.
인간이 언제나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원시민족이나 부족들을 미개하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그들의 생활구조를 자세히 들어다 보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훨씬 민주적이고 평화적이고 지혜롭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점을 고려하기 보다는 우리들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한다.
물론 마빈 해리스 교수의 논저에 충실하게 따르게 되면 상대주의적 인류학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상대주의를 인정함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인정하기도 한다. 대신 일정한 틀에 맞추어 평가하는 부분이 상당히 미약하기 때문에 주변 분들은 나에게 프랑스 구조주의 창시자인 레비 스트로스의 신화학을 연구해보라고 한다.
물론 레비 스트로스나 마빈 해리스 두 사람 모두 문화인류학자로 명성이 높고 학식과 조예가 깊은 훌륭한 사람이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각자에게 주어진 인격에 대해 존중받을 권리와 존중해 줘야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인간 그건 언제나 자신들만의 사고의 틀에 갇혀 인종차별, 종족차별, 남녀차별 등과 같은 일으키는 우리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라고 말해주는 단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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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과 제왕 - 문화인류학 3부작 넥스트 3
마빈 해리스 / 한길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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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해리스는 몇년 전에 작고하신 저명한 교수님이다. 필자가 마빈해리스라는 문화인류학자를 알게된 계기는 코스프레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코스프레가 왜 식인과 제왕이랑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만들거나 만들기 이전에도 인간은 자신들만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
고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란 단순히 여흥을 가지면서 이야기하던 내용이 아니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우수한 과학기술과 문명을 통해 많은 혜택을 받고 살고 있지만, 당시 인간들은 질병, 재해, 기아, 맹수들의 공격으로 항상 생명에 대한 위험을 받고 있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거나 혹은 부족한 면이 없으면 인간은 인간 내부 심리적으로 뭔가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간절한 소망을 갖는다.
그런 점에서 고대 인류의 주술행위나 코스프레에 대해 근본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생각든다. 

인간은 자신들의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항상 뭔가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특히 제목 첫부분에 식인이란 말처럼 인간을 먹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하고 잔인한 행위이다. 하지만 이런 행위 자체도 하나의 문화로서 그들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다.
부족한 단백질을 인간의 고기로부터 얻고, 자신들의 국가가 아닌 다른 부족이나 국가에 대한 침입과 공격에 대비하거나 혹은 그 다른 국가와 부족에 대해 위협함으로서 자신들의 부족을 지킬 수가 있다. 

또한 국가가 형성되면 국가체계에 있어서 신분이 결정되어진다. 신분은 통치하는 사람으로부터 통치받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요소로 나누어진다. 제왕은 이런 국가체계에 있어서 부족들을 이끌어갈 존재다. 그들은 단순히 부족사회 구조에서 군림하기보단, 그 군림을 하기 위해 막대한 재력과 정신적 에너지를 투입한다. 왕국은 부족장이 통치하지만 그 통치자는 부족들을 이끌기 위해선 부족원들을 어루만져야 했다.

이런 다양한 고대부족과 원시부족에 대한 이야기, 현대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서구인들이 바라보는 원시부족에 대한 편견을 이책에선 올바른 관점에서 해석하여 우리의 사고를 전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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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와 상상력
오세정 지음 / 제이앤씨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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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저술하신 오세정 교수님은 필자가 대학교 학부시절에 교양과목을 강의하신 분이다.
예전에 오세정 교수님께 들은 영화이해 수업과 신화에 대한 수업을 받으면서 엄청난 흥미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특히 신화는 우리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이야기에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신이라는 존재는 정말 신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욕구와 상상력을 동원한 허구적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신화는 신의 이야기가 아닌 어느 지역, 민족, 국가에 대한 집단적인 무의식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신화와 관련하여 그 민족과 그 상상속의 이야기는 뭔가 모르게 비슷한 측면이 많이 보인다. 신화에는 우리 인간이 의도하든 혹은 의도하지 않든 인간 자신의 욕망을 반영하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 조상들의 삶의 애환,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새로운 주제로 볼 수 있다.  그런 이야기로 통해 현대사회로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과 연결, 다양한 이야기로 통한 고전문학에 대한 재미도 같이 느낄 수가 있다.
이책에서는 단순히 우리 신화와 고전만 다루는 게 아니다. 우리 조상들의 사고방식과 더불어 이런 고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문화콘텐츠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까지도 생각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그렇게 쉽지는 않다. 우리의 역사와 전설, 민담이 어우러진 서적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인류문화학과 신화학에 대해 조금 공부를 해야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런 학문적인 부분이 갖추어져 우리나라 각 지역의 전설, 민담, 역사적인 이야기를 하나의 문화관광아이템으로 개발한다면 이 또한 우리 경제에도 자녀들의 교육에도 민족관에서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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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운동 - 공산주의 선언 나의 고전 읽기 11
박찬종 지음 / 미래엔아이세움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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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린 시절 그러니깐 초등학교, 그 당시 말로 국민학교 다닐 적이니 대략 20년 이전인 것 같다. 내가 아직 철없는 아이 무렵 마르크스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위험한 존재라는 것과 공산주의를 지닌 북한은 엄청난 괴수들이 사는 나라로 알았다.

왜냐하면 내가 아직 어린 시절 똘이 장군과 같은 애니메이션을 본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덧 나이가 들고 사회생활하면서 그 때의 일을 다시 돌이켜보면 뭔가 이상한 것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2010년 가을, 겨울 이때 국내에서는 경기가 이상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물론 어느 분야와 사업은 잘 되고 있으나 어느 분야와 사업은 모두 잘 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라 겉으로 보는 균형은 이상 없어 보이나 사실 내적으로 들어다 보면 많은 문제가 있음은 분명하다.

참고로 나는 하는 업무가 건설 엔지니어 쪽이다. 주로 대관협의와 관련 보고서를 적기 때문에 관공서 업무를 자주 하는 편이다. 기술력을 가진 엔지니어인 만큼 약간의 전문성을 가진 1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엔지니어 업무를 전국에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뭔가 건설과 엔지니어 계통에서 2010년 후반기로 접어들며 큰 위기를 맞이했다. 그것은 건설 엔지니어 회사들이 재정난과 경기 난으로 큰 고통을 바고 있던 것이다.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나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와 내 주변에 있는 일상까지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런 후유증으로 우리 회사는 일부 직원이 자진퇴사 및 권고해직되었고, 월급도 몇 개월 동안 잠시 감축되었다. 물론 이런 과감한 회사추진계획에 나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당장 회사가 부도가 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미래상을 듣고 있으니 말이다. 참고로 우리 회사는 중소기업이다. 그런 중소기업들이 우리 회사처럼 뭔가 크나큰 고통을 짊어지고 있다. 그런데 그건 비단 우리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는 인원감축에 못 미치는지 자기 회사를 다른 회사에 병합·인수되거나 혹은 아예 부도가 나버렸다. 심각한 재정난으로 허덕이는 업체는 직원 월급이 몇 개월 동안 밀렸다고 한다.

물론 그 고용주는 직원들의 월급을 고의로 주기 싫은 것은 아니다. 주고 싫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을 보고 당시 나 역시 회사에서 나가야 하는가 아니면 있어야 하는가 또는 권고해직 대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고민에 빠져있었다. 물론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이번일로 상당한 국내 경제상황에 대한 모순에 빠졌다.

나는 TV를 거의 보지 않는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인터넷 신문기사로 주로 볼 뿐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TV에 가끔 긴장감이 나도는 기사나 보도가 나온다. 그것은 노동자들의 파업과 시위이다. 물론 내가 위와 같은 일들을 겪기 전에는 파업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나쁘다거나 부당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주된 사유가 임금문제. 산업재해, 근로기준 등과 같은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높은 임금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파업을 하여 국민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준 노동자 부류도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노동자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들은 TV를 보면서 이렇게 여길 것이다. “회사가 너무 하군”, “노동자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지? 그렇게 과격하게 시위할 필요가 있는가?”, “정부는 저런 것을 해결하지 않고 뭐하지?”라고 말이다. 막상 그런 내뱉는 사람들은 자신이 직접 그 일을 당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중심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서 방관하는 태도는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TV에 시위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주변에 누군가가 해고될지 모른다거나 산업재해를 겪으면 그들 역시 분노한다는 것이다. 물론 감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이성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않는다면 분명 문제가 있다. 그것은 노조, 사업자, 정부,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감정적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을까? 


사실 정부기관과 사업자는 기본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받은 사람이나, 노동자는 높은 교육수준을 받지 못했다. 그들이 모두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적어도 사고할 수 있는 영역과 범위는 사업자와 정부기관보다 낮다. 솔직히 노동자들에게 이성적으로 표방하려고 해도 자신들의 지닌 한계점과 또는 높은 교육을 받더라도 정부기관과 사업자들이 서로 도모하여 의견을 나누지 않으면 폭발할 수밖에 없다.

그런다고 해서 노동자, 사업자 모두 존재하지 않으면 국가경제나 그 당사자들의 경제활동에 큰 문제가 미친다. 그러면 이런 모순을 우리는 어떻게 보고 생각해야할까? 이런 모순에 대해 아주 깊고 깊은 사고로 고민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본”을 지은 칼 마르크스와 “자본”을 엮어 책으로 낸 프리드리히 엥겔스였다.

그들이 자본을 출간하기 전에 1848년 “공산주의 선언”을 발표했다. 내가 어릴 시절에 공산주의는 북한과 소련의 정치사상으로 국민들의 눈을 속이고 자신의 이익에 집착하는 어긋난 정치이념으로 알았다. 그런데 막상 공산주의의 의미를 들으니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공산주의와 전혀 관계없고, 공산주의국가인 북한과도 전혀 관계없다. 마르크스가 원한 이 사상은 노동자를 이 사회의 주인으로 하여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진정한 관계를 찾기 위함이지 노동당이 국가정부요직이 되어 노동자를 탄압하는 것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개인 자본 소유를 부정하나 막상 마르크스는 개인 자본을 인정했다. 만약 개인이 자본에 대한 소유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발전할 계기를 상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 공산주의 선언 100%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 우리가 생각하고 봐야할 것들이 뭔지를 다시 돌아 본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내가 깜짝 놀란 사실이 있었다. 현재 우리 한국사람이라면 “일일 근무시간 8시간”, “아동에 대한 노동학대 금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나이키에서는 개발도상국가 어린이에게 과도한 노동시간을 부여하고 1달라도 되지도 않은 일일임금으로 착취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은 수제품이라 하여 고가에 팔려 나이키는 엄청난 이득을 본다.
 

나이키라는 회사가 높은 이익을 받는다거나 고효율적인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가려진 어린아이의 착취이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하면 이상하게 여길지는 몰라도 적어도 9, 10세 되는 아이들을 새벽에 깨워 밤늦은 시간까지 노동시키지 않는다. 이런 가혹한 행위를 하면 상당한 논란이 된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있었던 19세기 유럽에선 당연한 관례이었다.

그렇게 마르크스가 주장한 만큼 그는 현실을 뒤엎기 보다는 현실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여 여기에 대한 근본적인 대처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대표적인 이야기로 이 책에서 마르크스가 유럽지식인으로 인정받으면서 마르크스 사상을 따르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겼다. 그런데 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보며 마르크스는 자신이 하나의 우상이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그저 공산주의이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길 바랐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기 자신이 오히려 정치적인 지도자로 되기보다는 올바른 이론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잘 알던 마르크스와 달리 소련과 북한은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표방했으나 역으로 국민들을 속인 것이다. 소비에비 연방이 해체 전에 노동자 2명에 국가기관 요원 1명이 붙어있으니 그런 모순이 얼마나 심할까? 그들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공산주의라고 했으면서 속으로는 자본주의 국가 이상으로 착취와 탄압을 거행한 것이다.

정말 인간을 사랑하고, 약자 편에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런 행위로 통해 이상적인 나라로 만들겠다니 농담의 한계를 벗어나 이미 블랙홀로 빨려 들어갈 정도이다. 마르크스는 이상적인 유토피아를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현실을 보았다. 오늘날 내가 혹은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현실은 어떠한가? 여전히 한국에서 마르크스는 악령으로 통하는 세계다. 그렇지만 막상 악령은 아니다. 그런 현실 속에 여전히 한국에서 노사관계 문제만이 아닌 남녀차별, 지역차별, 빈곤차별, 학력차별, 인종차별 등과 같은 모순이 발생한다.

자신은 그런 차별로 남을 무시하지 않는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할 경우 그 사람은 주변으로부터 막대한 비난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그가 하는 행동들은 차별을 하고 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은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그는 위선이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가끔 나는 이래 생각한다. 국민을 위해 국가를 위해라고 말이다. 그리고 서민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서민과 어려운 이웃은 파업하고 시위하는 사람이다. 물론 대다수가 그런 것은 아니나 이런 겉으로 들어나는 양심발언과 행동으로 보이는 차별대우는 여전히 이율배반적인 인간, 사회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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