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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메 -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
수잔 J. 네피어 지음, 임경희.김진용 옮김 / 루비박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의 저술한 분은 미국 인문학자로서 미국이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문화보단 동양국가 중의 하나인 일본문화를 잘 아는 교수다. 이 교수가 바라본 일본문화라는 것은 일본인들이 가진 무의식적인 요소를 비롯해 역사, 사상, 사건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매체로 통해 일본을 알아본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니메라는 책 이름 어두에 인문학으로 읽는 저패니메이션이 아닌가? 내가 이 책을 처음 알게 된 동기는 도서관에 만화애니메이션 관련 도서를 찾다가 우연히 가이낙스 불멸의 명적인 안노 히데아키 감독 작품인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한 장면이 나와서이다.

이 장면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극장판 end of eva에서 nerv  파일럿인 아야나미 레이가 아담과 리리스와 결합하여 최종적인 진화로 이어져 지구의 모든 생명을 최고 진화단계로 가는 과정을 보여준 장면이다.

그런데 사실 이 최종진화라고 보는 인류보완계획은 인간을 영속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최종진화 단계라는 점에서 마지막 그 순간 바로 죽음이란 점이다. 아야나미 레이가 리리스로 되어 지구 상의 모든 생물을 흡수할 때 나온 노래가 바로 달콤한 죽음이여 어서오라이다. 그런 내용인 만큼 신세기 에반게리온 TVA와 극장판이 나온 20세기 말의 일본과 세계는 그렇게 밝지 못함을 암시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작품 상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 장면이 비참하거나 절망적이며 혹은 현실에 대해 비관적일까? 그것은 바로 그 사회가 지닌 어떤 특수한 상황이나 배경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들을 보고 판단하고 연구하여 정리한 서적이 바로 아니메라는 서적이다.

이 서적을 읽다보면 기존 서구 합리주의 시선으로 동양을 바라보기 보다는 일본 그 자체에 대해 들어가서 거기에 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 많다. 그래서 이 책은 서구문화가 우월하다는 것보단 서구문화와 달리 일본문화가 어떻게 성립되어 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문화가 현성된다는 것은 그 시대적인 인간과 사건들이 일련된 연속적 사건을 지속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 내용이 될것이라 본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매체와 장르 중에 왜 하필 애니메이션일까?

흔히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는 나라다. 게다가 저패니메이션이란 japan + animation = japanimaion이라는 이른바 정식 명칭이기 보다는 다소 낮게 바라보는 속칭이 하나의 언어로써 되버린 것이다.

일본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만화애니메이션이 상당히 대중적이란 점과 일본 경제산업적인 부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면 충분히 미디어로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점과 애니메이션은 인간이 생각하는 이른바 이성적인 부분보다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감정뿐만 아니라 무의식적인 요소도 잘 반영할 수 있어 그런 무의식적인 면까지 읽음으로써 그 민족의 정체성까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 애니메이션 안에는 인간이 현실세계에 표출할 수 없는 거대한 일들이나 혹은 어느 개인이 가질 수 없는 욕구와 욕망을 그대로 서슴없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반딪불의 묘"와 같은 경우에는 반전 애니메이션이라는 속성도 붙어 있지만 그 표면 위에 보이는 내면 속에는 전쟁에 대한 피해의식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피해의식부터 시작하여 각종 애니메이션 설정, 배경, 인물은 한 시대의 인간을 반영하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하며, 그런 왜곡성이 왜 나오는지도 알 수 있다.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저 오타쿠라고 밀어 붙이기 바쁘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왜곡성이나 혹은 어긋난 가치관이 그대로 우리에게 유입될 가능성은 배제될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우리는 일본과 일본이 만든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바라봐야할 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것은 단지 단순히 보고 웃고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일지도 모르나 인간은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기 보단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다소 위험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좀 더 일본에 대해 이해하여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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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에덴 극장판 1
카미야마 켄지 감독 / 버즈픽쳐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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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리가 흔히 보던 애니메이션 중에서 공각기동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공각기동대는 신세기 에반게리온과 아키라와 같이 20C 사이버펑크 저패니메이션 3대 명작으로 뽑힌다. 그리고 이 공각기동대는 극장판으로 만든 오시이 마모루 감독 버전이 있는 반면 TV에서 2002년부터 방영한 카미야마 켄지 감독 버전이 존재한다.  

TVA에서 제작된 공각기동대는 극장판과 달리 여성사이보그에 대한 고찰로 통한 여성이 기계와 합일되어 기존 오이디푸스 가부장체계를 부정하는 것으로 작품이 전개된다면 TVA에서는 기존 정치, 사회, 경제 등 다양한 현실 문제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 작품이다. 



주: 사이버펑크라는 단어를 줄이면 SF라고 하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어인 공상과학영화(science fiction film)가 아니라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펑크(Punk)의 합성어이다. 사이버네틱스란 생물 및 기계를 포함하는 계(系)에서 제어와 통신 문제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고, 펑크는 1970년대 락뮤직 흐름에서 이른바 펑크락이 등장했는데, 이 펑크는 젊은이들이 기존의 기성세대에 반항하는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사이버로 통한 인간 및 생물과 기계의 조합에서 반항의식을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사이버네틱스가 나오는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펑크라는 저항의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 작품들을 이른바 사이비펑크라고 명명한다.




극장판 공각기동대에서 주요 문제원인 발단자가 인형사라면 TVA에서는 웃는남자 즉 스마일맨이다. 그렇게 스마일맨 중심으로 하여 파시즘에 대한 문제, 정치의 부패, 대중사회의 군중심리에 대한 문제를 공안9과로 통해 우리에게 전달한다.

 이렇게 카미야마 겐지 감독은 현실에 대한 비판을 공각기동대에 더불어 그런 문제점을 이번에는 동쪽의 에덴에서도 언급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역시 공각기동대를 만든 감독의 작품인지 음악담당자가 카와이 겐지라는 것을 보면 공각기동대의 작품배경, 인물설정, 상황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부분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쪽의 에덴에서 그가 다루고 싶은 문제는 무엇일까? 우선 이 문제를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우리는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진 관료화, 체계화, 획일화라는 기준과 틀에 맞추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문제는 그런 틀과 기준에 조금이라도 못미치거나 혹은 부적격자로 판단된다면 현실에 보이는 현상들을 어떻게 보일까? 

여지없이 등급을 정해버리게 됨으로써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게 아니라 인간이 기준에 의해 차별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 차별 중에서는 경제력, 학력, 지역, 민족, 인종, 젠더, 사상 등 다양하고 복잡한 인자가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작품이 바로 동쪽의 에덴이다.  


그렇다면 에덴이란 무엇일까? 서양 사상 중의 하나인 기독교 성서에서 에덴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이브가 살던 곳이고, 에덴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브는 뱀에게 속아 금단의 사과를 먹음으로써 인간은 혼란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문명을 탄생한 이래 계속적으로 폭력과 억압 그리고 분쟁 등과 같은 갈등을 맞이하는지도 모른다. 동쪽의 에덴에서는 그런 에덴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나와 과연 우리가 찾아가야할 천국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천국에 이르게 하는데 문제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알려준다.  

동쪽의 에덴에서 왜 하필 방향이 동쪽일까 싶지만, 기본적으로 유럽은 서구사회, 한국과 일본, 중국은 동양이라고 한다. 동쪽은 작가나 감독이 거주하는 동쪽인 일본도 될 수 있으며, 혹은 예수가 태어날 때 찾아온 동방박사 3명, 즉 동쪽에서 온 3명의 현인이 있어서 방향성을 준 것이 아닐까도 싶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타키자와와 모리미로 이둘의 만남은 자국인 일본이 아닌 미국 백악관 근처에서 만난다. 모리미는 미국으로 올때 분명히 무기같은 위험한 물건을 소지하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 자신의 가방에는 총기가 보관되어 있었고, 이때 나타나 벌거숭이 남자인 타키자와로 통해 구출받아 다시 일본으로 넘어온다.  



일본으로 넘어오게 되면서 타키자와는 모리미와 모리미 친구, 그리고 주변에 등장하는 셀레상의 만남으로 통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나온다.


 그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현실에 대한 문제점이 보여주는데, 그것은 일본사회에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과연 내일이란 미래가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작품의 여자주인공인 모리미는 용모단정하고 머리도 나쁘지 않은 보통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데 그녀가 회사에 입사하기 위해 면접보러 가던 일화에서 우리는 이 사회의 일면을 볼 수 있다.  



모리미가 중년층으로 회사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남자 간부에게 모욕을 당한 점이라던가 혹은 그런 남자들이 "밑에 올라오는 사람들은 위에 있는 사람을 받치기 위한 것들(정확한 번역이 아닐수 있음)"이란 말처럼 이 현실사회에서는 이미 기성세대들이 모든 권력을 잡음으로써 새롭게 올라오고 있는 신세대들에 대해 따듯한 조건조차 주지 않은 비정한 세상이었다.
 

또한 비정한 세상에서는 이른바 니트족에 대해 매우 비인간적으로 대한 점이었다. 니트족들은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해 자신의 틀과 어두운 마음에 갖힌 사람들이다. 그런 니트들이 처음부터 니트가 되고 싶었을까라는 것이다. 니트라고 니트가 아닌 사람들처럼 웃고 즐기고 먹고 사회생활을 하고 싶을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서의 니트는 어느새 사회적인 차별로 인해 낙인이 찍혀버려 더 이상 자신들이 밖으로 얼굴을 내비출 수가 없던 것이다. 타키자와의 엽기행위 중에서 니트들을 다 모아서 외국으로 갔다가 그들을 다시 해방시켜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극한 상황을 주게 되었다. 물론 그 방법이나 수단은 옳지 못하나 결과론적으로 니트 중에서는 과거 생활을 청산한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타키자와가 행동한 것이 좋은 의미라 하나 인간이 인간에게 대하는 인격적인 태도는 결코 비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문제는 타키자와가 아닌 타키자와와 반대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타키자와처럼 강제적인 수정궤도를 제공하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필요를 느낄 수가 없어서 말살하려 한다. TVA 말부분에 니트들에게 공중에서 무서운 미사일이 폭격하려 하지만, 타키자와가 니트들의 아이디어를 빌려 그 위험한 미사일로 인해 희생자를 내는 것을 방지했다. 



그렇다면 타키자와에 대한 윤리적인 부분이 강압적이라도 그가 하고자 하는 의의는 상당히 깊고 올바를 수밖에 없는 극단적 현실이었다. 왜 타키자와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세상을 구하는 것은 어느 개인 하나로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에게 영향을 주려면 거기에 대한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사소한 것까지 포함된다. 남녀, 경제, 정치, 지역, 학력 등등에서 말이다. 타키자와가 세상을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 권력을 어떻게 제대로 사용하고 보여주는 것인가이다. 셀레상이라는 사람들이 특수한 휴대폰 쥬이스를 가지고 무엇을 하는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만능적인 능력을 보이는 휴대폰 쥬이스를 가지고 좋은 일에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좋지 않은 일에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쥬이스에는 엄청난 금액이 입금되어 있는데, 만약 그 금액잔고가 0으로 되는 순간 셀레상은 게임오버가 되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실제 그것이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 모르나 작품 초반에 등장하는 형사는 쥬이스로 통해 금액을 다 소모하여 결국 게임오버가 되었다. 그런데 약간 의문사항으로 그의 죽음은 쥬이스 운영체계에서 보낸 암살자라기보단 원망에 가득찬 아내의 칼부림이었다. 단순히 돈이 다 되어 게임이 다 된 것으로 보기에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한 양심적인 의사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병들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받쳤음에도 죽지 않았다는 증거다.



그런 점으로 보아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다 비명에 죽은 형사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타인을 택한 의사의 최후는 인간의 윤리적인 선택에 따라 그 희비가 갈리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런 셀레상들의 자신을 위한 투쟁과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한 투쟁에서 주인공 타키자와는 동료를 만나게 된다. 그의 동료는 미국에서 우연히 만난 모리미의 대학친구들이다. 그들은 모리미와 같은 대학 동아리로 이름은 동쪽의 에덴이다.

동쪽의 에덴 회원들을 보면 다소 뛰어난 인물은 보이지 않으나, 히라사와 카즈오미라는 참모는 다른 학생과 달리 매우 컴퓨터와 인터넷, 그리고 사회상을 절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작품 내에서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난다. "자신은 니트족을 원해서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확실히 인물도 준수하고 매우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재였다. 그러나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여 일반회사에 취업하여 관료조직에 뛰어들기 보단 그저 니트족으로 살아가길 원한다.




즉, 니트족이라고 해서 모두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아니라 충분한 능력이 있어도 스스로 니트족으로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살 때 어느 일정기준으로 통해 인간을 구분짓어 그 사람을 마치 세상의 쓰레기인양 취급하는 슬픈 인간상을 보게 된다. 그런데 히라사와는 그 슬픈 니트족이 자신에게 슬픈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그리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으로 대처한다.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맞춰가는 톱니바퀴로 살아가긴 보단 자기 자신이 하나의 톱니바퀴로 사회 속에서 독자적으로 굴러가길 원한 것이다.  

히라사와 친구 중에 매우 뛰어난 컴퓨터 프로그래머 니트족이 있다. 그의 이름은 이타즈 유타카로 분명히 유타카는 매우 비상한 머리로 컴퓨터와 인터넷 프로그램을 상당히 잘 다룬다. 그러나 그는 세상에 대한 트렌드에 너무 따라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그는 집에만 박혀 컴퓨터 앞에 앉아만 있는 히키코모리 즉 은둔형 폐인이 되버린다. 어떻게 보면 유카타의 행위는 기성세대로 본다면 조금 뒤쳐진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그의 인간성에 대한 비하와 무시로 연결되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를 쓸모없는 폐인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다. 그가 비록 좋은 머리와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동쪽의 에덴에서 카미야마 켄지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존의 기성세대로 채워진 이 세계는 젊음이에 대한 꿈과 열정을 살려주긴 보다 그저 자신들의 틀과 기준에 맞추어 가야하는 것과 그것에 미치지 못하면 니트족처럼 사회적으로 억압당해야 하는 점이다. 그런 부당함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니트족에게 대하는 행위는 하나의 당연성을 뛰는 헤게모니(어느 한 세력이 다른 세력을 지배하는 형태)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타키자와는 무엇을 원한 것인가? 그는 자신이 악당으로 되는 것을 각오하면서 니트족들을 억지로 구했다. 그렇지만 그에게 돌아간 것은 비난과 원망이었다. 현대사회에서 누군가 어느 조직이나 행위의 정점이 되면 그 모든 책임과 영향은 그 정점에 있는 사람에게 갈 수 밖에 없다. 타키자와의 셀레상으로써의 역할은 그런 정점을 두고 자신을 희생했는가 혹은 안했는가로 그의 가치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셀레상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만 채우는 인간들은 대중들을 위해 사용하는 권력이 아닌 단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한 용도였다. 권력을 가지게 되면 거기에 알맞은 능력과 권한이 따르지만 그 권한에 따라서는 하나의 책임과 처벌이 따른다는 점에서 다른 셀레상들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고 그저 방관하기만 한다. 어떻게 하면 방관하면 낳을지도 모른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 셀레상이나 아무 죄없는 일반인들에게 피해주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말이다.



이 넒고 넓은 세상에서 손을 잡고 있는 타키자와와 모리미, 그리고 옆에 수많은 동료들은 이 세상에서 저절로 생긴 비틀림에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전해주고 싶은가? 동쪽의 에덴이란 그저 우리에게 허망하고 멀기만 한 꿈일까? 아니면 타키자와가 혼자만의 세상에서 왕자가 되어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하는 것일까? 세상은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모두에게 전해 줄 수는 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 젊은 사람들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야할까? 현재 사회의 톱니바퀴로 굴러가고 있는 내 생활에서 우리는 어떻게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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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 1 - 창간호
풀빛미디어 편집부 지음 / 풀빛미디어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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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비평 1권, 2009년에 제작되어 2010년에 발간된 도서로 출판내역을 찾아보니 주로 상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 강사, 졸업생, 대학원생, 학부생 기타 다른 시민단체나 다른 구성원으로 통해 제작되었다.

여기서 보이는 만화비평이란 도서에서는 한국 만화 현황을 이야기하고 그것이 어떻게 하여 곡해되어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이기 보다는 대중문화로부터 소외되었는 밝히고 있으며, 만화를 그저 해롭다는 인식보다는 해롭지 않다는 것으로 전환하기 위해 적어진 책인듯 하다.

특히 과거 일제강점기 전후로 한국 만화의 역사에서 시작하여 한국 만화 역사를 조명했는데, 만화는 단순히 웃고 놀고 즐기는 하나의 오락기능이 아닌 그 시대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일종의 정보매체였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21C에는 한국 사람 대부분이 한글을 읽고 보고 쓰고 말할 줄 안다. 하지만 만화가 처음 나온 100년 전 당시만 하더라도 혹은 아직 근대화가 막 시작하던 1960년대에도 한글이나 한자를 보고 쓰고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많이 없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읽고 쓰는 한글이나 한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니 글자 대신에 정보를 받아들이거나 혹은 전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매체는 그림이 최고였다. 그림은 글 대신 선과 면 그리고 색이 들어가 있는 시각적인 정보매체로 누구나 그림만 보고 대충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만화는 그런 그림에 글자를 일부 추가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의미와 내용을 쉽게 전달하고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매체이다. 참고로 김용석 교수의 "서사철학"에서 7가지의 서사구조를 소개했는데, 그 중에서 "신화, 대화, 진화, 동화, 영화, 혼화(애니메이션), 그리고 만화"로 소개했다.

그런 점에서 만화는 글과 그림으로 이루어져 어려운 내용으로 느끼는 문자서사에 비해 쉽게 이해되고, 실시간으로 화면과 소리가 변화되는 영화나 애니메이션에 비해 만화는 의문나는 사항에 대해 다시 되돌아갈 수 있어 정보의 수용으로 보면 상당히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 정보의 접근성이나 용이성이 높은 만큼 그 정보에 반영되는 내용이 반드시 좋은 정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존중하거나 인정해야 하는 게 당연하다. 만약 어느 인간이 다른 인간을 인정하지 않고 타인에게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는 것은 인간으로써 가치를 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비윤리적인 가치가 쉽게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노출될 수 없다. 그래서 그런 정보를 만화로 통해 반영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만화라는 작품 안에 폭력성이나 선정성 코드를 반영하여 작품성을 전개할 수 있지만, 그런 방법이 하나의 공식으로 되어버리면 사회적인 문제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타인에 대한 폭력, 인간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 등은 여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고쳐나갈 문제나 그것이 만화에서는 그것 자체가 즐거움을 주는 요소로 되버릴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런 선정성과 폭력성이 반영된 작품이 문화검열이란 도마위로 올라가서 거기에 맞는 처분을 당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 자체로 하여 만화가 나쁘게 되어버리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한국에서 만화라고 이야기하면 아이들이 시간없이 보는 것이라 하며 만화를 보면 공부에 방해된다거나 혹은 만화라고 하면 폭력적이거나 야한 것만 나와 사회에 도움되지 않은 불순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만화라는 매체가 더욱 나쁜 쪽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만화에 대해 올바른 가치관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우리는 문학이라고 하면 고귀하고 숭고하며 뭔가 내용이 철학적이고 심오한 것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문학 중에 소설도 과거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불순한 이야기였고, 중국고전의 명작인 삼국지 역시 조선시대 사대부로부터 지탄을 받은 소설이다.

게다가 영상매체시대의 도래로 영화 역시 1920년 전만 해도 예술이라기 보다는 그저 시간남는 사람들이 여흥을 즐기기 위한 하나의 엔터테인먼트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혁명과 그 외 여러가지 실험적인 영화, 그리고 역사성이나 상징성을 드러내는 영화로 통해 예술로 인정받았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영화는 제7의 예술이라 하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만화는 프랑스에서 제9의 예술이다.

우리나라에서 프랑스하면 예술과 철학의 국가라면서 파블로 피카소라고 하면 이른바 조금 돈있거나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이 앞 다투어 미술관으로 돌진한다. 그런데 정작 프랑스에서 예술과 철학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관심이 없는 게 현실적인 유감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만화를 아동문학과 관련지어 만화로 통해 세상을 알고 배우는 것을 유도하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초등학생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이전이 어린 어린이에게 길고 복잡한 문자서사인 소설보단 글과 그림이 동시에 들어간 동화나 만화가 좋다. 그러나 동화는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클 뿐만 아니라 만화에 비해 넣을 수 있는 내용과 분량이 한계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만화는 동화보다 서사적인 내용을 더욱 강조하면서도 더욱 길게 진행하여 어린이들에게 호기심을 지속적으로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라는 것이 유치해서 어린이에게 보는 것이 아니라 만화로 통해 어린아이에게 좋은 글을 읽게 해주고 만화로 통해 세상을 알게 해주고 만화로 통해 친구를 사귀게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다. 만화가 나쁜 것이 아니라 단지 만화 중에 나쁜 것만 있다는 것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인식하게 하여 만화를 보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그런 만화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우리 스스로 만화에 대해 깊고 심도있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화비평 그것은 반드시 어느 만화책 1권을 집어들고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만화로 통해 이 사회와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이 소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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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례탑 1 - 고독한 영웅의 시간 여행기 , 완전판
노미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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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살례탑은 최후의 반전과 반전을 기다리는 극적인 플롯을 담은 작품이다. 여기서 살례탑은 몽골군 장수 이름 중의 하나인 살례타이라는 사람이다. 배경은 고려시대로 하여 우리나라가 몽골군 즉 원나라와 전쟁을 펼치면서 일어나는 일들로 통해 역사적인 상황과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하나의 역사극적인 만화로 제작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소년은 사실 집안에서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 부모님은 건재하시나 자신을 친아들처럼 여기기 보다는 마치 남처럼 대하는 어른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소년은 거기에 대해 매우 비뚤어진 마음을 가지게 된다. 어느날 소년은 수영장에 친구들과 놀러가면서 풀장에 수영하던 중에 이상한 귀신에게 발을 붙잡혀 자신도 모르는 낯선 세계로 공간이동을 하게 된다.

분명 자신이 사는 곳은 자기집이다. 게다가 부모님의 얼굴은 같다. 그런데 자신의 복장과 집안 모습. 그리고 주변 상황이 매우 다른 것이 아닌가? 소년은 자신이 처음엔 이상한 곳으로 와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처럼 여겼으나 이제 자신이 현실세계가 아닌 과거로 타임워프한 것을 깨달고는 이제부터 벌어진 비극에 자신의 전생과 현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소년은 사실 당시 그 고려시대에서는 살아있던 존재가 아니었다. 어느날 불의의 병으로 인해 의식을 잃은채 계속 잠만 든 병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현대사회에서 고려시대에 그 소년이 그 자리에 누워있는 사람의 의식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 소년이 눈을 뜨고 의식을 찾아 혼란해 하고 있을 때 고려와 몽골군의 전쟁이 일어난 때였다.

소년이 눈을 뜨고 자신의 원래세계에 있던 아버지와 똑같이 생긴 아버지는 사실 고려국의 용감하고 덕이 많은 대장군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아버지는 몽골군과 싸우면서 무참하게 살해당해 목까지 참수되어 고려의 비참함을 상기시키다. 게다가 어머니도 살해당했다. 게다가 소년을 풀장에서 발을 잡은 귀신은 소년이 살아가고 있는 고려시대에서는 자신의 가족이었다. 그녀도 역시 의식 불명이었으나 소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무참히 몽골군에게 죽을때 그녀는 몽골군에게 겁탈을 당한다.

소년은 이런 몽골군에 대한 비인간적인 행동에 분노하여 몽골군과 싸운다. 이 소년은 이 시대로 넘어오기 전에 검도를 하던 사람이라 그 검도실력으로 적군을 죽여나가고 최후에 그 몽굴군 장수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강력한 살례탑을 만난다. 그런데 이 살례탑이 상당히 잔인한 사람이라 자신의 부모님들을 이렇게 무참하게 살해당한 것도 다 살례탑의 폭력적인 행위었다. 소년은 마지막으로 살례탑과 마주하면서 깜짝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살례탑이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는 것이다. 소년은 살례탑이 자신의 원래 전생임을 느끼고 과거의 업보다 다시 환생한 현대사회에서 다시 돌아온 것을 깨달게 된다.

그리고 자신은 살례탑을 유인하여 살례탑에게 목을 베이고, 살례탑은 고려의병장인 김경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소년은 다시 눈을 뜨니 원래의 현실로 돌아와있었다. 그 전까지만 해도 냉정하고 쌀쌀맞은 부모님이 왠일로 친절하게 변해 있었다.

그리고 모든 문제를 해결한 소년에게 한가지 아쉬움이 뒤따랐다. 당시 소년이 몽골군과 싸울때 몽골국의 공주와 비극의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다른 것은 모두 해결되어 가족과의 화해라는 제의적인 문제도 해결했다. 그러나 소년이 구해주고 소년을 구해주던 몽골공주와의 재회는 현대사회에서 이룰수 없게 되었다.

과거와 현재의 업보와 미련 그리고 거기에 대한 복수와 한풀이를 살례탑이란 만화에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소년은 타인의 한을 자신의 희생으로 하여금 승화했지만, 자신 속의 있는 한은 그대로 거기에 나두고 왔다. 인간이 가진 한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설령 몇백년 전 그 누군가라도 혹은 자신의 무의식 속에 각인된 옛날 기억이라도 남아있는 미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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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자매 이야기 1
카즈토 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빈곤자매 이야기 쉽게 풀어쓰면 가난한 자매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어느 소외된 계층을 관찰하고 살펴보는 잔잔하면서 슬픈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일본 어느 마을에 사는 2자매의 일상을 다룬 것으로 별 보잘 것 없이는 사람들이나 알고보면 그들은 우리의 이웃이고 친구들이고 세상에 그런 사람들은 수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단지 만화애니메이션이란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세상에 돌아가는 이야기들이 얼마든지 넘치고 넘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빈곤자매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이 사회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들을 다룬다.

이미 어린나이에 부모님 없이 소녀가장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하는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배달일을하고 배달일을 마치면 집에 와서 밥만들고 도시락을 싸는 언니, 그리고 그 언니를 우산삼아 보호받는 어린 여동생, 우리는 부모없이 지내는 소녀 혹은 소년가장들의 슬픈 이야기들을 여기서 그대로 느낄 수 있다.

특히 비가 오면 지붕에서 빗물이 스며들어올 정도로 누추한 집이나, 언니는 배달로 벌은 돈으로도 한달 월세조차 맞추기가 어렵다. 그리고 하루 세번 식사조차도 쌀과 반찬으로 인해 고민한다. 우리는 밥 한번 먹고 말고의 차이는 그저 선택이나 이들에겐 생존이 달려 있었다.

요새 이 작품이 갑자기 생각나는 이유가 뭘까? 만화애니메이션을 대해 사람들은 흔히 세상과 동떨어진 것이라 하지만 사실 그러할까? 최근 뉴스에서 급식을 계속 제공하는가 마는가, 대학교 등록금과 수업료가 올라가니 마니, 공공물가가 오르니 마니라는 뉴스를 계속 접한다.

물론 시대가 흐르면 그것에 맞추어가야 하는 것이 인간이나 문제는 세상 모든 사람이 맞추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렇게 경제적 부담율이 올라가도 별 걱정없이 살아갈 사람도 있으나 누구는 전기세나 수도세가 조금이라도 올라가면 무서운 듯이 떠는 사람도 있다.

이 가난하고 소외된 2자매도 그런 세상의 각박하고 삭막한 현실 속에 하루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다. 하루 벌어 꼬박꼬박 돈은 받지 못하면 언제 집에서 내치거나 밥도 못먹는 최악의 상황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는 이 작품으로 통해 세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들을 봐야 하는 것일까?

최근 뉴스에 보니 한달에 75만원 용역하시는 아주머니와 할머니들, 게다가 1끼 식사비가 300원이나 400원 그런 분들이 전국에 수십만명이고 그렇게 같이 살아가는 가족이 수십만명에 수백만명이 이를 것이다. 가난은 죄가 아니나 가난으로 인해 죄인처럼 살아가야 하는 굴레, 왠지 이 작품의 2소녀의 이야기가 간절하게 느끼는 것은 무얼까?

그런다고 모든 것이 삭막하다 해서 따듯한 온정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렇게 안타깝게 서로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우리의 자화상이 슬픈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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