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면서 제일 먼저 살펴 볼 것은 제작진들과 영화감독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존에 만들어온 작품들과 흐름,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고 싶은 내용을 알아야만 정확하게 영화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1,000만 관객을 이룩한 <부산행>은 기존 애니메이션 감독이 실사영화를 제작하면서 성공한 이례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부산행>의 이전 이야기가 <서울역>이란 이유로 보는 경우가 너무 많은데, 여기서 관객들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
그건 그들이 연상호 감독이 그동안 어떤 작품들을 만들어 왔는지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산행>에서 공유가 한 어린 딸을 안고 무사히 아내의 품에 전해주기 위해 목숨을 거는 투쟁을 보여준다. <부산행>은 기존 내러티브(Narrative)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그건 최종장면에서 수안과 임산부 성경이 무사히 군인들로부터 구출을 받는 점이다. 절망의 가운데 마지막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대중의 공감을 상당히 반영했기 때문이다.
만약 사람들이 <돼지의 왕>이나 <내 사랑 단백질>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는 인디영화관에서 36개 좌석에 앉은 30명 넘은 관객 중에서 연상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 되지 않음을 느꼈다. <서울역>은 <부산역>처럼 친절한 영화가 아니다. <부산행>의 주인공은 수안의 아버지 석우처럼 어느 대기업에 다니는 핸섬하고 멋진 아버지가 아니다. 다소 가정환경에 무심하게 보여도 결국 딸의 부탁을 들어주고 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아버지로 끝이 난다.
서울역까지 차를 끌고 가는데, 일반 국산승용차가 아니라 외제차를 타고 간다.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적인 위치에서 보자면 성공한 인간이 단지 불운한 상황에서 재난을 맞이한 것 뿐이다. 하지만 영화 <서울역>은 다르다. 이 영화가 불편한 것은 <부산행>에서 보여주지 않은 국가사회의 맨 얼굴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서울역>은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혹은 기만적으로 숨기려한 이야기를 드러낸 이야기이다. 연상호 감독은 처음부터 관객에서 불쾌감을 주기 위해 이 작품을 기획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부산행>을 생각하고 온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엔딩 크레디트가 마무리되면서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의 입 속에서 별로 좋은 평판은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인터넷 영화정보란에서도 그렇다. 연상호 감독에 대해 조금 더 잘 알았더라면 <서울역>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으면 그런 판단이 나올 수가 없었다고 본다. 영화에서 이미 사람들은 제목과 포스터를 보고 첫 장면에서 나오는 상황을 두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끝나길 바란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면 좋은 영화고, 그렇지 못하면 나쁜 영화이다. 처음부터 인디영화관 그것도 독립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서울역>에서 관객들이 친절한 영화를 바란 것부터 실수라고 여긴다. 연상호 감독이 <서울역>이란 제목처럼 이 영화에서 서울역의 의미는 무엇일까? 영화 초반부 어느 노인이 목에서 피 흘리며 힘들게 서울역 광장을 지나간다. 어느 청년들이 도와주려 하나, 막상 앞에 가자 노숙자인 것을 알고 다시 되돌아온다. 그 두 사람은 처음에 분배와 복지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었으나, 막상 현실은 노숙자를 비롯한 룸펜프롤레타리아에겐 별개의 이야기였다.
경제학적으로 자본주의는 부르주와 프롤레타리아로 구분된다. 부르주아는 자본을 가지고 자신의 자본력을 늘리기 위해 고정된 생산도구에 임금노동자를 하여금 노동하게 하여 이윤을 재생산하는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는 임금노동자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한국으로 따지면 직장에 다니는 소시민 같은 부류이다. 하지만 정작 한국인들은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영화 <서울역>은 바로 그런 현실을 꼬집기는 영화이다.
또한 룸펜프롤레타리아는 프롤레타리아처럼 아무런 자본도 없지만, 노동을 하지 않은 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다. 노숙자, 부랑아, 깡패, 창녀, 사기꾼 등등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은 부류이기도 하다. <부산행>의 주인공은 고소득층의 화이트칼라의 세계로 본다면, <서울역>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패배자들의 인생으로 한국사회를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는 아주 재미없고, 불친절하다. 그런 점을 깨닫지 않고 영화관을 와서 재미없다고 말하면 떠나는 분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영상으로 굴절된 예술을 본 것이 아니라 단지 문화콘텐츠란 이름을 소비하기 위해 온 것이다.
기호가 상품이고, 상품이 기호이니, 연상호 감독이란 네이밍이 하나의 브랜드의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영화 주인공은 원래 사창가에서 도망친 혜선, 혜선의 남자친구 기웅, 그리고 혜선의 비즈니스적인 아버지 석규로 등장한다. 혜선과 동거하는 기웅은 정상적인 집이 아니라 여관방에서 투숙하고, 기웅은 여관비를 제대로 내지 못하여 강제로 퇴실당할 상황에 처해진다. 기웅은 PC방에 가서 혜선의 얼굴을 인터넷에 올리고 성매매 여성으로 광고한다. 이때 예전 포주인 석규가 보고 찾아온다.
기웅은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려 했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었고, 월급을 받아도 여관비의 반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서울역>은 바로 여기서부터 엄청난 주제가 시작되었다. 영화제목 <서울역>처럼 우리가 서울역에서 가장 많이 마주치는 부류는 무엇인가? 바로 노숙자이다. 과거 그들도 나름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가장이었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좌절하여 집을 잃은 채 역사에서 잠을 자고 생계를 유지한다. 가족에게 버림받았기에 연고자도 없고, 하루를 비참하게 살아간다. 구걸하고 술을 마시고, 싸움도 한다.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그들에게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서울역에 좀비에게 물려 감염된 노인이 다시 좀비가 되고, 서서히 주변 사람들을 덮친다. 좀비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어느 순간 서울역 중심으로 좀비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도미노 하나가 쓰러지면 마지막까지 무너지는 붕괴현상이 시작되기 시작한 점이다. 좀비를 피해 사람들은 도망치기 시작했고, 경찰까지 충돌하게 되었다.
문제는 경찰이 출동해도 아무런 대응이 되지 않은 점이다. 혜선이 찾아간 지구대 경찰관이 노숙자들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좀비라는 것보단 노숙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자본주의 시장구조에서 인간은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성보단 겉모습으로 보여주는 것에 따라 차별이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다. 혜선도 처음 자신이 노숙자가 아니라고 하나, 혜선의 신발이 벗겨짐에 따라 경찰 역시 혜선을 노숙자 취급을 한다. 가진 게 없으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존재이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대한민국 국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살아갈 수 있으며, 국가는 여기에 대해 충실한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경찰은 좀비에 의해 일어난 재난을 노숙자나 국가반란세력의 음모로 생각한다. 처음 경찰이 오자 다수 진압부대가 버스로 차벽을 만들어낸다. 혜선이 끝까지 도망치다 중간에 막힐 때 버스위로 올라가는 시민을 향해 경찰은 물대포를 발사한다. 버스 아래로 기어가는 사람에겐 가루를 발사하여 차벽을 넘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시민들은 좀비를 피해 재난을 피해 도망치려는데 오히려 국가치안기관은 시민을 구하지 않고 그들을 폭도로 취급한다. 그들이 폭도로 취급받은 것은 혜선이 파출소 유치장에서 좀비로부터 도망칠 때 옆 자리의 경찰관이 노숙자와 다수의 좀비들을 국가전복자인 폭도로 지칭했기 때문이다.
파출소로 진압 중인 기동대 입장에서 좀비들은 폭로처럼 보이고, 일선 경찰관도 살해당했다. 이런 과정에서 군대가 출동하고, 그들은 총구를 서울시민에게 겨누었다. 혜선과 같이 도망친 노숙자는 좀비를 피하기 위해 차벽을 올라서자 어느 군인이 사격한 총에 의해 즉사한다. 그가 즉사하기 전 2002년 월드컵 한국축구팀 응원티를 입은 남자가 자신은 이때까지 국가를 위해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일을 당한 게 억울하고, 같이 자리에 있던 피난민들에게 너와 다르다고 한다. 사살당한 노숙자 역시 자신 역시 국가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서울역>은 <부산행>보다 더 충격적으로 상황을 보여주고, 현실을 살아가는 국민들은 모두 국가를 위해 살았다고 하나 국가는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그리고 그 마지막 폭로는 한국경제의 뿌리 깊은 장소로 인도된다. 혜선이 마지막으로 도망친 곳은 다림건설 사무소, 설계 및 시공사무실 옆에 값 비싼 자재로 이루어진 모델하우스가 조성되어 있다. 보통 사람으로 도저히 살 수 없는 고가의 내부인테리어로 구성되어 있다.
혜선을 찾아온 기용, 그리고 기용 옆에 있던 포주 석규가 모이면서 이 영화는 한국사회의 숨은 욕망의 신화를 보여준다. 그것은 부동산 신화이다. 혜선과 기용은 집이 없기에 여관에서 생활하고, 노숙자들은 갈 곳이 없기에 서울역에서 방황한다. 포주 석규는 혜선을 이용하여 고급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다. 모두들 집에 대한 욕망과 애한으로 이어진다. 혜선은 자기 집에 가고 싶다고 하나, 석규는 혜선 때문에 빚을 지어 그것을 해결하려고 혜선의 집에 갔다고 한다.
혜선의 아버지는 딸의 빚을 갚기 위해 1주일이란 시간을 달라고 했고, 석규가 다시 찾아가자 혜선의 아버지는 자취를 감추고 만다. 혜선은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한다. 집을 가출하여 어둠의 세계에 몸을 들인 이후로 아버지에게 가지 못한 혜선, 그래도 언젠가 다시 귀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하지만 그 믿음조차 깨지고 혜선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게 된다. 결국 약자를 먹으면서 성장해온 한국사회, 그 중심이 부동산시장이고, 부동산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돌아가야 할 터전을 빼앗은 리바이어던 같은 괴물이었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도미노의 운명처럼 쓰러져간 것이다. 도미노 붕괴에서 도미노는 자신만이 아니라 주변까지 내몰고 간다. 좀비들은 많은 도미노 중에 하나이다. 작은 도미노 하나가 거대한 도미노 벽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만든 도미노 판에서 어느 한 도미노의 붕괴를 외면하고 있다. 점차 증가되는 노숙자의 수, 임금저하와 물가상승은 소시민들로 하여금 마음을 얼어붙게 만든다. 영화를 보면 지하철 광고판이 눈에 명확하게 들어온다.
부동산시장은 마치 사람들로 하여금 행복의 세계로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왜 국가는 좀비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오히려 그들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을까? 개처럼 일하고 살아온 이들은 그들의 눈에는 하나의 소모품이고, 소모품이 다 되면 아무 필요 없는 폐기물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부산행>에서도 좀비로 서울이 난리 나는 상황에서 뉴스기사에선 국가전복세력이 반란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들이 희생당하는 이유는 노숙자들은 찾아갈 곳이 없기에 돌아갈 곳이 없기에 아무 필요 없기에 그런 것이다.
서울역에는 한국에서 아무 필요 없는 사람들이 뭉치는 공간이다. 희망도 삶의 의지도 없이 그저 하루를 어떻게든 보내려고 하는 그들, 연상호 감독은 결코 친절한 제작자가 아니다. 이미 영상에서 보이는 그림체가 <돼지의 왕>과 <창>에서 등장하는 그림체와 유사하다. 부드러움보단 날카로운 이미지로 관객에게 충격을 던져준다.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 역시 현실의 문제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오늘도 뉴스에서 이런 기사가 나온다. 강남 부동산 불패가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승천하고 있다. 작품에서 좀비를 만드는 것은 전염병이나, 현실에서 인간을 좀비처럼 만드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다.
단지 애니메이션 안의 좀비는 머리가 박살나지 않은 한 계속 멈추지 않고 움직이나, 현실의 좀비들은 한 번 잘못 맞으면 즉사한다. 하지만 억울하다 말도 못하고 사회적으로 반란분자 내지 폭동으로 취급당한다. 영화 마지막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석규의 소망은 고급 아파트를 사서 예쁜 여자를 데리고 와서 침대 위에서 격렬한 섹스를 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것도 좌절되자, 혜선을 강제로 범하려 하나, 막상 혜선의 심장이 정지한다. 그리고 좀비로 변한 혜선에게 물어 뜯인 채 그 삶이 끝난다. 우리를 착취하는 것은 따로 있는데,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 착취하며 파멸해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