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페미니스트 선언, 그날 이후의 페미니즘
윤김지영 지음 / 일곱번째숲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아마도 이제까지 읽은 여성주의 책 중 가장 시의적절하고 가장 국내 현실을 반영한 책이 아닐까 싶다. 다루는 내용들의 범위도 책 한권에 담기에 모자람이나 넘침이 없다고 생각한다.

너무 개론적이지 않은 것, 다층의 독자를 염두해 두지 않은 점도 좋았다.

어지간한 문단은 모두 인용해도 좋을 만큼 내가 쓰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이 많은 책.

그래서 독자에 따라서는 매우 취향을 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매우 추천.

한국사회의 특징은 혐오의 대상이 여성에게 집중되고 특화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식민지 남성성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본 남성에 의해서 자신의 국토와 주권을 모두 빼앗겼던 한국 남성은 전형적인 강자로서의 남성성이 박탈당한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남성성을 복원하는 길은 내국인 여성에 대한 착취와 폭력이라는 경로를 따랐지요. 해방이후, 독재정권, 군사정권을 통해 비대해진 남근성을 가진 ‘아버지의 이름‘이 사회 곳곳에 설치되었습니다. - 24

현실을 뒤흔들기 위해서는 ‘불화‘를 피할 수 없겠지요. 모순은 불화를 통해서만 드러납니다. 불화를 가시화하는 일은, 새로운 일상의 관계성과 친밀성의 구도를 재조직할 것을 요구하고, 상상하고, 실천해 나가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 29

스스로 헬페미니스트라고 명명하는 한 활동가는 ‘남아선호사상‘이라는 용어에 담긴 위선에 대해서도 폭로합니다. 특정한 젠더를 가진 사람을 선택적으로 죽이는 문화가 마치 논리와 이성의 산물인 ‘사상‘인 것처럼 포장되어 온 것을 ‘여아살해풍조‘라는 용어로 대체해 버립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아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대적으로 행해진 젠더사이드에 대해 명명함으로써 기존의 용어가 어떤 진실을 가리는 장치였는지가 드러난 것이지요. 여아 살해는 여성의 개인적 선택일 수 없습니다. 부계혈통을 전수할 도구적 몸으로 남편의 친족으로 편입된 여성에게 여아 살해는 강요된 의무의 결과였을 뿐이지요. - 42

헬페미니스트는 ‘경단녀(경력단절 여성)‘라는 용어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이것이 구조적 현상에 대한 사회학적 용어가 아니라, 뭐뭐녀라는 여성혐오적 의미계열에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경력단절상태를 여성 노동자의 표준형으로 설정할 위험성에 대해 지적하는 것입니다. 경단녀라는 용어 대신 ‘임신, 출산해고 대상자, 육아해고 대상자‘로 명명하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경력단절 현상의 젠더화는 여성의 자발적 선택이나 모성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차원에서 강요된 선택, 즉 사회적 해고임을 전략적으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 44

헬조선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로 지속적으로 소환되는 ‘출산율‘ 저하라는 사회문제 역시 문제가 있는 프레임이라는 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출산율 저하라는 용어는 곧장 의무와 본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가임기 여성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여성을 아이 낳는 재생산 기계로만 한정하려는 여성혐오적 인식의 전수방식이기도 하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헬페미니스트는 출산율이 아닌 ‘출생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길 적극적으로 제안합니다. natality rate나 birth rate이라는 단어들ㅣ 출생율이 아닌 출산율로 번역, 사용되어온 것 자체가 임신과 출산, 양육의 문제를 여성 개인의 본성과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구조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요. 출생율이라는 용어가 도입될 때에야 비로소 출생율 저하는 곧 태어나는 자의 감소라는 인구학적 현상으로 읽히며, 이 현상을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다각도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 45

2017.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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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7-23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좋았어요. 평소에 보고 듣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라고 느꼈어요.

hellas 2017-07-23 17:05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적확한 국내현실반영:)
 

신간이 나올 때마다 반가운 마음이 드는 애정하는 작가.

예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시니컬하고 어른답고 반면 어른답지 못하면서 뭔가 차별화되는 비범함이 있고 비밀스럽지만, 구지 무엇인가를 은폐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유머를 잃지 않는 캐릭터들이라서 편한한 점도 있지만,
이데아며 메타포며 상당히 시각적으로 쉽게 캐릭터화해버려서 그게 좀 웃기는 지점이랄까.

조금 늘어지는 묘사가 지루하게 만드는 포인트이고, 아무래도 하루키가 아니었다면 그냥저냥이네..라는 감상을 남길 수도 있겠다.


내가 원한 것, 혹은 필요로 한 것은 그곳에서 긍정적으로 반짝이는 의지였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확고한 열원 같은 것이었다. 내겐 무척 친숙하지만 아직 부족한 것이었다. - 49

숲의 정적 속에서는 시간이 지나고 인생이 흘러가는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았다.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한 생각이 가고 다른 생각이 온다. 한 형상이 가고 다른 형상이 온다. 나 자신조차 반복되는 나날 속에서 조금씩 무너졌다가 재생된다. 무엇 하나 같은 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은 상실된다. 시간은 내 등뒤에서 조금씩 죽은 모래가 되어 무너지고 사라진다. 나는 그 구덩이 앞에 앉아 시간이 죽어가는 소리에 마냥 귀를 기울였다. - 369

하얀 저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오늘 저녁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것이 꿈속에서 겪은 일처럼 느껴졌다. 뭐가 정상이고 뭐가 정상이 아닌지, 뭐가 현실이고 뭐가 현실이 아닌지 점점 구분하기 힘들어졌다.
눈에 보이는 것이 현실이야, 기사단장이 귓전에 속삭였다. 두눈 똑바로 뜨고 봐두게나. 판단은 나중에 하면 돼. - 474

선생님은 그림에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잠시 침묵을 지키던 마리에가 문득 생각난 듯이 말했다.
고마워. 나는 순순히 감사를 표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무척 용기가 생기는구나.
선생님도 용기가 필요해요?
물론이지. 용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거야. - 538

아무리 큰 고통이 따른다 해도. 어차피 여기 있는 모든 것은 연관성의 산물이지 않은가. 절대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고통도 무언가의 메타포다. 이 촉수도 무언가의 메타포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 빛은 그림자고, 그림자는 빛이다. 그렇게 믿는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은가? - 425

이 세계에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는지 몰ㄹ. 내가 말했다. 하지만 적어도 무언가를 믿을 수는 있어.
그녀가 미소지었다. 그날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돌아갔고, 나는 먼지투성이 코롤라 왜건을 몰아 산머리의 집으로 돌아왔다.- 584

2017.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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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8
서정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처음은 조금 낯설었으나, 곧 완전한 취향임을 깨달음.

피식피식 웃음이 남.

의도한 것이 그것이라면 진짜 취저. 추천해요.

이상하게도, 삶은 지속된다. 편집되지도 않고, 축약되지도 않고, 머물지도 않는다. 꽤 세월이 흘렀고,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상할 따름이다. 이게 왜 이상한 일인지 가끔 생각해볼 때가 있다. 살면서 이 순간이 이 삶의 하이라이트이란 걸 다들, 어떻게 알아채는지. 여긴, 배경음악도 없고, 특수효과도 없고, 플롯도 없고, 하여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이상하다. - 시인의 말 중.

밤은 멀고, 우리는 봉지를 하나둘, 씩 뜯어 물을 붓는다. 왜, 너희끼리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지 마라. 사랑은 그런게 아닌 걸 우린 너무 잘 안다. - 인스턴트 사랑주스 중.


2017.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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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7-07-13 16: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추 :)

hellas 2017-07-13 18:35   좋아요 0 | URL
진짜 계속 웃으면서 봤어요 :)
 
한 권으로 읽는 베블런
엘리자베스 매켄지 지음, 이지원 옮김 / 스윙밴드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우당탕탕 대소동. 정신없는 다람쥐와 그에 버금가는 두 가족.

분명 재밌는 설정이고, 사랑스럽고 정떨어지는 인물들인데 정작 나는 시큰둥 했을까를 생각하면.

정신머리 없는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고 싶은 내 마음을 몰라주는 이야기라서 인듯.

베블런에게 깊은 연민과 지지를 보내지만 정작 베블런도 주위에 두고 싶지는 않은 인물이라서.

혹은 분별없는 이 날씨 때문일지도.

각자의 가족에게 원한을 쌓아두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폴과 베블런.

행복하길 바래. ㅋㅋㅋ

한때 그녀는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이전 세대의 오락과 쓸모를 위해 몸 공장에서 생산된 하인이라고 생각했다. 한 인생이 일종의 변명처럼, 다른 인생의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소모되는 것이라고. - 17

폴이 너와 전혀 맞이 않는 상대고 네 인생을 망칠 거라는 인식이 점점 더 분명해지지 않는지, 그것만 확실히 해둬. 앨버틴이 이렇게 말하고서 물었다. 너 <결혼 - 죽거나 살거나> 읽어봤어?
베블런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아돌프 구겐뷜-크레이그의 역작이야. 그 사람 말에 따르면, 결혼은 오직 죽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지속적이고 불가피한 대립이지.
돌겠네! 꼭 그래야만 하는 걸까? 베블런은 전에 없이 괴로워했다. 난 이미 오직 죽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는 지속적인 대립을 겪고 있어, 엄마랑. - 103

폴은 차라리 발톱을 모조리 뽑히는 편이 낫겠다는 식으로 굴었다. 그는 그 무해한 만남을 앞두고 표나게 기분이 가라앉았고, 만나는 동안에도 불만 가득한 채 민달팽이처럼 축 늘어져 있어나 방어적인 태도로 감정을 폭발시켰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는 미친 사람처럼 낄낄댔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을 거부했다. - 197

베블런은 어떤 경험을 그녀만큼 즐기지 않는 사람들과는 그것을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빨리 기분이 울적해지거나, 혹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하게 제 인생의 한 시간이 쓸쓸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 그녀가 어머니와 함께 어떤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그녀의 눈에는 그 모임이 아무리 멋지고 흥겨워 보였더라도, 멜러니는 나중에 그에 대해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217

2017.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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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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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유의미할지라도 재미가 없으니 나에겐 실패.

선과 악에 대한 흔한 오해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실체로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다. 세상이 선과 악이라는 두 영역으로 나뉘어 태초부터 영원까지 대결한다는 가정, 최후의 아마겟돈에서 선이 승리하고 악이 소멸되리라는 믿음.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가정과 믿음에 불과하다. - 227

2017. j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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