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평짜리 숲 트리플 30
이소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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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과 에세이.

빛이 한 점도 들지 않는 장소와, 늘 밝은 빛의 세상인 장소.
극단의 대립 배경 속의 다른 성격의 두 인물.
각각의 세계가 보여주는 부조리가 부각되는 이야기.

- 아무튼 정거장 4가 사라져준 덕에 우리는 비로소 어디로 갈지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로소'라는 말이 비인간적으로 들린다. 비로소 산다. 비로소 간다. 비로소 이주한다. 비로소 정거장을 벗어날 수 있다. 비로소 나는. - 22

- 우리는 사라진다. 그러나, 엄마 말대로 우리라는 것이 사라진다는 것이 과연 정말 없었던 일처럼 감쪽같이 두 눈을 감추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끝끝내 미뤄두고 싶다. '영원히'라는 말은 지금 붙이지 말아야겠다. 나는, 아니, 우리는 그 단어의 무게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이니까. - 50

- 슬픔에도 돈이 든다고 하지만, 아진은 이제 그 말을 다르게 고치고 싶다. 돈이 없어서 자유가 없어? 그럼 돈을 벌어야지. 당신은 절대로 벌지 못하는 방식으로. - 64

- 어떤 하루는 가끔
지구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끝이
또 다른 내일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 131, 에세이 중

- 철학자 샹탈 무페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는 '적대 antagonism'라는 개념에 대해 이야기를 남긴 적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평등과 혁명을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상정되는 어떤 '적대'의 형상이 실은 혁명의 움직임을 지속하게 하는 조건 그 자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의 '적대'는 사회체제 속에 내재된 모순, 균열, 틈 등의 명칭으로 다양하게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 해설 중

2025. apr.

#세평짜리숲 #이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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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황석희 - 번역가의 영화적 일상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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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예전만큼 해외 영화를 보고 있지 않아서 영화 번역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글들에서 잘 된 번역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긴 했다.

어떤 일상의 스케치를 그렸는지 궁금해서 읽어보았다.

대체로 수긍할 만한 이야기였는데, '요기'라는 표현을 낯설어 하는 관객들이 있다는 말에 조금 놀랐다.
아주 안 쓰는 말도 아닌데, 잘 모른다고?

언어는 세월의 풍화에 이리 깎이고 생성되고 한다지만,
그런 감각이 너무 빠르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는 언어 사용자들의 노력이 너무 부족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

활자의 시대가 가고 영상의 시대라고도 하지만....... 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실수는 누구나 하지만 인정하고 고치는 건 쉽지 않다. 늘 자존심의 문제거든. 훗날 내 딸이 커서 이 영화를 같이 본다면 해줄 이야기가 하나 늘었다. 이참에 근사한 어른인 척 거드름 피울 멘트도 하나 짜놨다.
"아빠는 반성에 자존심 같은 거 없어." - 24

- 너무 꼰대 같고 재미없는 소리지만 일정한 성취에 기본이 되는 건 따분하고 지루하고 고된 반복을 묵묵히 견디는 무던함, 그리고 제 살길을 어떻게든 찾아내 지소할 줄 아는 현실감이다. 대개는 그런 것들이 쌓여 성취가 된다. '대개는' - 89

2025. may.

#번역황석희 #황석희 #달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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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사슬과 빛의 조각 레이디가가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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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미스터리와 사회적 문제를 1, 2막으로 나누어 펼쳐지는 이야기.

1막의 고립된 섬에서의 연쇄 살인은 약간의 재미는 있었으나, 2막으로 이어진 사건 해결의 후일담 부분에서 그 흥미가 반감되는 구조였다고 느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한으로 살인을 계획하고 무인도 여행에 나서는 초반부까지가 기대치의 최고.
철저하게 숨길 의도는 없었는지 초반에 이미 범인의 윤곽이 드러났다는 점도 그렇고 살해 계획을 세운 화자의 원한도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 저 여섯 명은 쓰레기 같은 것들이지만 저런 것들을 사랑하는 기특한 사람도 있다. 내가 여섯 명을 죽이면 아마 그들의 친구나 부모들은 나를 원망하고 내가 죽기를 바라겠지. - 45

- 무슨 이유로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인정할 수 없어요. 그런 전제조건이 없다면 우리는 사회를 신뢰할 수도 없고 타인에게 다가갈 수도 없습니다. 이 사람은 악인이니까 무슨 일을 당해도 된다든가 살해되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인간의 생사를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지극히 잔혹한 일입니다. 슬픈 일이에요. - 374

2025. may.

#끊어진사슬과빛의조각 #아라키아카네 #북스피어 #레이디가가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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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의 세계 위픽
이장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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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초능력. 사회화로 인해 생긴 달갑잖은 능력들이 소재로 등장하는 점이 재밌다.

작은 동네 마트 안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소시민들의 작은 능력과 소소하면서 번다하며 중요한 감정들.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는 아주 짧은 단편들의 시리즈로 늘 흥미로운 시각의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일단 책들이 참 예쁘다고 늘 생각한다.
좋아하는 시리즈.:)

- 손님들이 등장하면 명희는 조건반사인 듯 긴장을 했다. 암에 걸려 있는데도 겨우 이런 것 때문에 긴장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원래 조건반사란 그런 것이 아닌가. 습관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닌가. 몸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거머리 같은 것. 집요한 것. 사형수가 사형대를 향해 걸어가다가 바닥에 고인 물을 저도 모르게 피해 가는 습관 같은 것. 명희는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22

- 그런 것을 유머라고 하는 사람들이 짜증스러웠다. 짜증스럽다가 실망스럽다가 종내는 환멸이 느껴졌는데 환멸이라니 아, 이런 게 환멸이구나. 특정한 누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넓고 깊게 고이는 부정적 감정...... 이겨내고 싶지도 않고 해결책도 보이지 않으니 그냥 외면해버리고 싶은 감정...... - 53

- 그렇다.
현실은 늘 픽션을 초과한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늘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난다.
픽션은 언제나 상상할 수 있는 것만을 상상하지만
현실은 늘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습격한다.
갑작스럽고
징그럽고
끔찍한 방식으로.
희망은 조금씩
과장되어도 좋다.
그렇다고 생각한다.
초인은 오늘 마트에서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저 사람일지도 모르고
이 사람일지도 모르고
당신일지도 모르고
우리 모두일지도 모른다.
계엄령의 밤은
끝날 것이다.
종료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한에는 - 작가의 말 중

2025. mar.

#초인의세계 #이장욱 #위픽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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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호위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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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에 읽은 책.
플래그 붙인 부분을 다시 읽으니 모든 이야기의 분위기가 다시 살아난다.

이 세계의 주변에 대한 시선들이 돋보이는 이야기들.

조해진 작가의 신간을 사두고 뒤늦게 읽은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얼른 신간 읽어야지.

- 오년 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날에도 고모는 저런 자세로 병원 출입문 앞에 서 있었을 것이다. 인간이란 구르는 걸 멈추지 않는 한 조금씩 실이 풀려나갈 수밖에 없는 실타래 같은 게 아닐까. 그때 고모는 그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고 했다. 병원 문을 열고 나가면 실타래는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굴러갈 것이고, 실타래에서 풀려나간 실은 밟히고 쓸리고 상하면서 먼지가 되어갈 것이다. 친밀했던 사람, 아끼던 사물, 익숙한 냄새를 잃게 될 것이고 세상도 그 속도로 고모를 잊어갈 터였다. 어느날은 거울 속 늙고 병든 여자를 보며 이유도 모른 채 뚝뚝 눈물을 흘리기도 하리라. 하나의 실존은 그렇게 작아지고 또 작아지면서 아무도 모르게 절연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누구의 배웅도 없이, 따뜻한 작별의 입맞춤과 헌사의 문장도 없이...... 오후가 저녁이 되고 저녁이 밤이 될 때까지, 실제로 고모는 그 문을 열지 못했다. - 사물과의 작별, 82

- 독일에서 돌아온 이후, 나는 종종 동료 작가들과 철거지역이나 노동자들의 집회 같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 피켓을 들기도 했고 낭독을 하기도 했다. 처음엔 분연했지만 집으로 돌아올 땐 쓸쓸했다. 무력하게 지켜볼 땐 갑갑했는데 거리에 서 있을 땐 내 몸에 비해 너무 큰 옷을 입고 있는 듯 어색했다. 작가가 작품 이외의 다른 채널로 말을 거는 게 합당한 건지 알 수 없었고, 그리 유명하지도 않고 작품활동도 하지 않는 내가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도 되는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그 안으로 뛰어들어가는 것도, 심지어 뛰어들어간 뒤 적당한 자세를 잡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는 것도, 모조리 가식 같기만 했다.
최근에 내가 택한 방법은 나의 자격을 의심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과정이 대단할 것도 없고 떳떳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이의 고통을 대변하며 잿빛 거리에 서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자격을 되묻는 반복은 발터, 법도 정의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이 세상 한곳에 나만의 의식적 함몰구역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작은 웅덩이 같은 그곳은 안온하고 평화롭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웅크려앉아 있어도 되는 것이다. 권장량의 탄수화물과 지방을 섭취하면서, 소화하고 배설하는 내장뿐인 몸으로, 시계의 초침 간격이 과연 정직한가와 같은 부질없는 의혹과 다투며...... - 동쪽 백의 숲, 97

- 독일의 러시아 침공 당시, 고작 열여섯살에 간호병으로 입대한 큰언니가 종전과 함께 일년 만에 귀가한다는 통지서를 받고 온 가족이 마중을 나갔는데 아무도,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고요. 플랫폼에는 열일곱살의 싱그러운 처녀가 아니라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신산스러운 분위기의 여인이 서 있었으니까요. 훗날 백발이 어색하지 않은 나이에 이른 할머니의 큰언니는 다행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했다고 해요. 늙어서, 잊어가고 있어서, 곧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애가 기다란 원통 모양이라면 그녀에게 다행이라는 말은 시간의 그물망을 통과하여 그 밑바닥에 쌓인, 정제되고 또 정제된 결정체 같은 것이겠지요. 전쟁은 그런 것일 테지요. - 산책자의 행복, 126

- 실은 늘 이번 소설집을 기다렸다.
나와 나의 세계를 넘어선 인물들, 그들은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소통했고 유대를 맺었다. 그들은 나보다 큰 사람들이었고 더 인간적이었다.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 말

2025. jan.

#빛의호위 #조해진 #단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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