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단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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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이들이 기록하고 증언하는 내란에 대한 가정 세계.

그저 상상의 영역인 글일 뿐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옥 같다.

가습기 피해자, 세월호 유족, 전장연, 구미 노동자,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 ...
온갖 소수성의 대표적인 그룹들이 설명 없는 무차별적 폭력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상상은 처참하다.
소외되는 수도 외의 지역성에 대해서도 언뜻 내비친다.

서늘하고 건조하게 서술되는 호러.

충격적이었고 비상식적이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독서라서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 연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서나 달려왔다. 지회장이 먼 길을 달려온 동지들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이 북적북적 해졌다. 회의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 58

-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좀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기다릴 수 있었다. 함께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 61

- ' 선량한 일반 국민.' 단단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확히 그 표현에 딱 맞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방법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단단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평생 갈고닦아 몸에 익힌 생존의 기술이었다. - 74

- 단단은 특정 정당 국회의원들이 내란을 옹호하기 위해 표결을 거부한 날 집에 돌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색깔을 숨겼다. 그 색깔을 다시 꺼낼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었다.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 77

- 독재자는 작은 독재자를 원하지 않는다. 선동가는 종교의 가면을 써서 권력에 빌붙고 독재자를 옹호하는 행위를 통해 세속 권력을 그러모았다. 계엄을 논하는 집회와 시위는 정치활동이다. 정치활동은 포고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종교지도자를 사칭하는 선동가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독재자의 관점에서는 위협이 될 뿐이었다. 집회와 시위를 무력화한 뒤 계엄군은 병원으로 향했다. - 89

- 저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 어떤 목숨을 빼앗았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 - 107

- 죽은 사람들이 계엄군의 등에, 어깨에, 머리에 올라탔다. 자신이 죽은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계엄군의 허리에, 무릎에, 다리에 매달리기도 했다. 죽은 자들이 일어섰다. - 139

- 미래가 없는, 혹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

2026. mar.

#처단 #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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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민음의 시 337
김이듬 지음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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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었지만
체념과 처연함이 담긴 세상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그게 몹시 쓸쓸하다.
그래도 어느 덧 봄이 되어 있다.

-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 - 자서

-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 이 세상에 없는 것 중

-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 에튀드 중

- 순식간
가벽 너머에서 만발한
꽃향기가 넘쳐 왔다

세상의 모든 꽃이 일제히
내 감은 눈앞에서 피어났다

쉽게 만족하는 나한테서
시무룩하게 너는 뒤처져 걸었다 - 봄, 비, 공원 중

- 나한텐 그림이 전부야
세상이 어두워서 어두운 그림만 그렸는데
이젠 그림이라도 밝게 그리기로 했어 - 현기증 중

- 거머쥔 것이 태도를 형성한다 - 귤 따기 체험 중

- <쪽에서 쪽빛을 얻기까지>

세상이 꽃밭이라면 나는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었겠지.

다행히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풀덤불 가시투성이라서, 나는 두 발로 뛰어다니네.

너는 수수만년 혹독한 밤을 지난 것 같아. 그래서 즐거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 내가 근처에 왔다가 들렀다고 말하면 믿어 주는 친구.

쪽풀을 뜯는 네 뒷모습 보다가 나는 항아리를 씻네. 네가 푸르죽죽하게 쪽물 밴 손바닥을 내밀며 어서 가라고 말하기 전에 내 손바닥 펼쳐 잿물을 젓네.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색깔을 만들어야 할까, 촌스럽게 유행에 너무 뒤떨어지는 거 아냐?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을 만큼 내 감정이 간결해진 걸까.

물감 이전에 천연염료가 있었다고, 항아리 이전에 흙이 있었다고 네가 말하는 소리가 좋아서 나는 속뜻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기로.

네가 내 삶을 구하러 온 친구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있는 그대로 네 빛깔이 좋아.

친구는 나를 툭툭 치며 마구 구겨지고 더러웠던 내 마음을 밟는다. 커다란 대야에 넣어 밟아 빠는 흰 광목천처럼 나는 너의 색깔을 담을 준비가 되었다.

- 어금니가 한 개 없고 잇몸도 나쁘다
나는 혼자 충분히 늙었다
이렇게 살다가 고독사할 게 자명해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우리는 불화한다 - 나의 이방인 2

-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데
남은 날들이 별로 길 것 같지 않은데

슬픈 농담인지
고맙다
행복하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숨들은
생에 깊이 사무친다

속절없이
사랑한다 - 초봄 대피소 중

- 눈을 깜박하는 사이 오십 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 슬픔이 전부일까 두 사람은 우물거리며 내게 길을 보여주었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 재에 몸을 묻고 중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중


2026. mar.

#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 #김이듬 #민음사 #민음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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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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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추천 추천 도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고, 읽는 기간이 한창 브리저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엄청났던? 시기였는데, 브리저튼을 시청하다 말고 이 책을 다 읽어버릴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지니아를 둘러싸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토니, 캐리스, 로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실상 모두 질리는 캐릭터들이라, 적당히 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으리만치 맹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그래서인가 질색하면서도 즐겼달까.

여성과 남성 모두 스테레오 타입이랄 수 있는 진상들의 집약체.
고등학생 정도의 자녀를 둔 나이의 여성들이 스스로 지나치게 나이 듦에 대해 정의하는 게 좀 의아스럽기는 했다. 캐나다의 90년대는 그럴 법 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는 결국 웨스트를 용서하지 못했으면서도 비위를 맞춰주며 살아가는 토니.
제일 한대 때려주고 싶은 캐릭터는 웨스트...

로즈는 지니아의 경험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캐리스는 지니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과신했기 때문에,
토니는 지니아와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도둑 신랑의 컨셉을 도둑 신부로 바꾸어 전복을 꾀했더라도 피해자는 오롯이 여성으로 남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남자들도 당해보라지'라는 마인드는 결국 '동족' 여성에게도 해를 입힌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환기하게 된다.

- 까마득한 옛일인데 이유가 무슨 상관일까. 참변은 참변일 뿐이다. 상처는 상처로, 죽음은 죽음으로, 잔해는 잔해로 남을 뿐이다. 원인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지니아는 그대로 방치해야 할 기분 나쁜 사건이었다. 그녀의 진의를 파헤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 14

-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다.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끝날 때 끝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일에는 서론이 필요하다. 서론과 후기와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한 차트가 있어야 한다. 그녀가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역사는 하나의 건축물이다. 어느 지점으로든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선택이 임의적이다. 그래도 연속성을 깨뜨리고 시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순간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사건들을 돌아보며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런 사건들이 출발점이 되고 종착역이 된다. 이를테면 탄생과 죽은, 결혼이 그렇다ㅏ.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 14

- 토니는 지니아가 언제나 그들 옆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ㅏ. 우리가 그녀를 붙잡고 있어. 그녀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있어. 놓을 수가 없는 거야. - 58

- 캐리스는 오래전에 기독교를 포기했다. 성서가 고기들로 넘쳐나는 게 한 가지 이유였다. 어린양, 수송아지, 비둘기 등 온갖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진다. 카인이 채소를 제물로 바쳤을 때 하느님은 그것을 거부하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피도 너무 자주 등장한다. 성서 속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흘리고, 손에 피를 묻히고, 개한테 피를 핥게 한다. 학살도 너무 자주 등장하고, 고통도 너무 자주 등장하고, 눈물도 너무 자주 등장한다.
동양의 종교가 훨씬 더 차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 불교신자로 지냈지만, 알고 보니 지옥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종교는 처벌에 너무 집착한다. - 119

- 그녀는 난생처음 이런 회의에 참석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업이란 뭔가 신비롭고 그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며, 아버지가 남몰래 문을 닫고 하는 일인 줄 알았다. 아버지들만 할 수 있고, 여자들은 너무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들이 한 방에 모여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금 펜촉이 달린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상대방을 속일 방법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이 사업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닫느라 애를 먹었다. 여보세요! 이게 끝이에요? 맙소사,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네! 그녀는 정말 잘하고 있다. 대다수의 분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 175

- 역사는 언제나 시간을 거슬러 기록된다. 토니는 이 문장을 거꾸로 적는다. 우리는 늘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을 선택해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지만, 그 사건이 의미심장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우리다. 우리가 이편에 있다면 그 사건과 사건의 당사자들은 저편에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과거인 동시에 우리 손 안에 있다. - 201

- "여자로서 감당해야 할 별것 아닌 형벌인걸, 뭐."
토니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형벌이기는 하지만, 별것 아닌 형벌. 괴로움과 번민은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무시할 수 있는 문제였다. - 282

- 지니아는 사회체제를 거부하는 데에도 비용이 든다고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대가가 따른다. 해방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 제일 먼저 총알을 맞는 법이다. - 303

- 하지만 토니는 한편으로 그녀가 대단하다고도 생각한다. 못마땅하고 당황스럽고 과거에 겪었던 모든 가슴앓이가 되살아나기는 하지만, 지니아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녀를 대하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용감하고 거의 모든 것을 경멸하며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구는 그녀에게 동참하고 싶은 마음. 어머니가 눈썰매를 타고 언덕 밑으로 사라졌을 때 느꼈던 심정과 비슷하다. 눈썰매를 타고 언덕 밑으로 사라져 가는 어머니를 보며 "안 돼! 안 돼!"와 "잘한다! 잘한다!"를 동시에 외쳤던 그때하고 비슷하다. - 331

-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떤 존재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사랑스러운 사람, 존경하는 사람, 무서운 사람, 셋 중에서."
"존경하는 사람. 아니,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아니야. 나는 무서운 사람이 되고 싶어."
"왜?"
"그래야 훨씬 효과적이니까. 사실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것 하나뿐이야." - 339

- 그 여자, 질투가 나서 그랬을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질투 같은 건 매우 하찮은 문제라는 양.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질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감정이다. 일관성 없고 혼란스러우며 수치스러운 동시에 망원경 너머로 바라본 풍경처럼 독선적이고 집중적이며 유리처럼 단단하다. 고도의 집중감과 고도의 무력감이 혼재한다. 질투로 인상 살인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이는 것보다 궁극적인 지배는 없을 테니 말이다. - 11

- 나는 예전부터 독실한 신자가 못 됐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잖니, 하느님이 누구 것이냐고. 세상에 종교가 없었다면 그렇게 시끄러울 일은 없었을 거다. - 103

-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 그 애를 없앨 수도 없고. 지금은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거 아냐. 지니아는 주어진 운명이야. 날씨처럼 우리와 상관없이 그냥 존재하는 거지. - 273

- 토니에게 지도가 필요한 이유는 그녀가 항상 지도를 보는 이유와 일치한다. 지도를 보면 지형을 보고 상상하고 기억할 수 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지니아다. 그녀는 지니아를 기억할 책임이 있다. 끝을 맺어 줄 책임이 있다. - 309

- 적은 누구였을까? 그녀는 과거의 어떤 원한을 갚으려고 했던 걸까? 전장은 어디였을까? 한군데는 아니었다. 온 사방과 이 세상이라는 조직 자체가 전쟁터였다. 아니면 눈에 보이는 곳이 아니라 뉴런 사이,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뇌의 그 조그마한 불길 사이였을 수도 있다. 지니아한테는 전깃불 같은 꽃이 어울릴 것이다. 누전처럼 밝고 치명적인 꽃, 강철을 녹여 만든 엉겅퀴처럼, 불똥처럼 씨를 터뜨리는 꽃. - 318

2026. mar.

#도둑신부 #마거릿애트우드 #민음사 #모던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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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 신부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44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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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추천 도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고, 읽는 기간이 한창 브리저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엄청났던? 시기였는데, 브리저튼을 시청하다 말고 이 책을 다 읽어버릴 정도로 재밌게 읽었다.

지니아를 둘러싸고 피해자라 주장하는 토니, 캐리스, 로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실상 모두 질리는 캐릭터들이라, 적당히 현실적이고 믿을 수 없으리만치 맹하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그래서인가 질색하면서도 즐겼달까.

여성과 남성 모두 스테레오 타입이랄 수 있는 진상들의 집약체.
고등학생 정도의 자녀를 둔 나이의 여성들이 스스로 지나치게 나이 듦에 대해 정의하는 게 좀 의아스럽기는 했다. 캐나다의 90년대는 그럴 법 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는 결국 웨스트를 용서하지 못했으면서도 비위를 맞춰주며 살아가는 토니.
제일 한대 때려주고 싶은 캐릭터는 웨스트...

로즈는 지니아의 경험에 압도되었기 때문에,
캐리스는 지니아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과신했기 때문에,
토니는 지니아와 남자에게 맹목적으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당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도둑 신랑의 컨셉을 도둑 신부로 바꾸어 전복을 꾀했더라도 피해자는 오롯이 여성으로 남게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남자들도 당해보라지'라는 마인드는 결국 '동족' 여성에게도 해를 입힌다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부정적인 에너지에 대해 환기하게 된다.

- 까마득한 옛일인데 이유가 무슨 상관일까. 참변은 참변일 뿐이다. 상처는 상처로, 죽음은 죽음으로, 잔해는 잔해로 남을 뿐이다. 원인을 왈가왈부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지니아는 그대로 방치해야 할 기분 나쁜 사건이었다. 그녀의 진의를 파헤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 14

- 문제는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다. 시작할 때 시작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끝날 때 끝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모든 일에는 서론이 필요하다. 서론과 후기와 동시에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한 차트가 있어야 한다. 그녀가 학생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역사는 하나의 건축물이다. 어느 지점으로든 들어갈 수 있고 모든 선택이 임의적이다. 그래도 연속성을 깨뜨리고 시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순간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런 사건들을 돌아보며 그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런 사건들이 출발점이 되고 종착역이 된다. 이를테면 탄생과 죽은, 결혼이 그렇다ㅏ. 전쟁 역시 마찬가지다. - 14

- 토니는 지니아가 언제나 그들 옆에 앉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ㅏ. 우리가 그녀를 붙잡고 있어. 그녀 이야기를 입에 올리고 있어. 놓을 수가 없는 거야. - 58

- 캐리스는 오래전에 기독교를 포기했다. 성서가 고기들로 넘쳐나는 게 한 가지 이유였다. 어린양, 수송아지, 비둘기 등 온갖 동물들이 제물로 바쳐진다. 카인이 채소를 제물로 바쳤을 때 하느님은 그것을 거부하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피도 너무 자주 등장한다. 성서 속 사람들은 시도 때도 없이 피를 흘리고, 손에 피를 묻히고, 개한테 피를 핥게 한다. 학살도 너무 자주 등장하고, 고통도 너무 자주 등장하고, 눈물도 너무 자주 등장한다.
동양의 종교가 훨씬 더 차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때 불교신자로 지냈지만, 알고 보니 지옥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의 종교는 처벌에 너무 집착한다. - 119

- 그녀는 난생처음 이런 회의에 참석했던 때를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사업이란 뭔가 신비롭고 그녀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영역이며, 아버지가 남몰래 문을 닫고 하는 일인 줄 알았다. 아버지들만 할 수 있고, 여자들은 너무 멍청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자들이 한 방에 모여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금 펜촉이 달린 만년필을 만지작거리며 상대방을 속일 방법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이 사업이었다. 그녀는 놀라서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닫느라 애를 먹었다. 여보세요! 이게 끝이에요? 맙소사,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네! 그녀는 정말 잘하고 있다. 대다수의 분야에서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 175

- 역사는 언제나 시간을 거슬러 기록된다. 토니는 이 문장을 거꾸로 적는다. 우리는 늘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을 선택해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지만, 그 사건이 의미심장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우리다. 우리가 이편에 있다면 그 사건과 사건의 당사자들은 저편에 있다. 그들은 오래전에 사라진 과거인 동시에 우리 손 안에 있다. - 201

- "여자로서 감당해야 할 별것 아닌 형벌인걸, 뭐."
토니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형벌이기는 하지만, 별것 아닌 형벌. 괴로움과 번민은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무시할 수 있는 문제였다. - 282

- 지니아는 사회체제를 거부하는 데에도 비용이 든다고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라 대가가 따른다. 해방의 선봉에 선 사람들이 제일 먼저 총알을 맞는 법이다. - 303

- 하지만 토니는 한편으로 그녀가 대단하다고도 생각한다. 못마땅하고 당황스럽고 과거에 겪었던 모든 가슴앓이가 되살아나기는 하지만, 지니아를 응원하고 격려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녀를 대하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용감하고 거의 모든 것을 경멸하며 탐욕스럽고 제멋대로 구는 그녀에게 동참하고 싶은 마음. 어머니가 눈썰매를 타고 언덕 밑으로 사라졌을 때 느꼈던 심정과 비슷하다. 눈썰매를 타고 언덕 밑으로 사라져 가는 어머니를 보며 "안 돼! 안 돼!"와 "잘한다! 잘한다!"를 동시에 외쳤던 그때하고 비슷하다. - 331

- "너는 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떤 존재로 생각했으면 좋겠어? 사랑스러운 사람, 존경하는 사람, 무서운 사람, 셋 중에서."
"존경하는 사람. 아니, 사랑스러운 사람."
"나는 아니야. 나는 무서운 사람이 되고 싶어."
"왜?"
"그래야 훨씬 효과적이니까. 사실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그것 하나뿐이야." - 339

- 그 여자, 질투가 나서 그랬을 거야.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질투 같은 건 매우 하찮은 문제라는 양.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질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악의 감정이다. 일관성 없고 혼란스러우며 수치스러운 동시에 망원경 너머로 바라본 풍경처럼 독선적이고 집중적이며 유리처럼 단단하다. 고도의 집중감과 고도의 무력감이 혼재한다. 질투로 인상 살인이 그렇게 많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이는 것보다 궁극적인 지배는 없을 테니 말이다. - 11

- 나는 예전부터 독실한 신자가 못 됐다. 내가 입버릇처럼 말하잖니, 하느님이 누구 것이냐고. 세상에 종교가 없었다면 그렇게 시끄러울 일은 없었을 거다. - 103

-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어. 그 애를 없앨 수도 없고. 지금은 사라지더라도 언제든 다시 돌아올 거 아냐. 지니아는 주어진 운명이야. 날씨처럼 우리와 상관없이 그냥 존재하는 거지. - 273

- 토니에게 지도가 필요한 이유는 그녀가 항상 지도를 보는 이유와 일치한다. 지도를 보면 지형을 보고 상상하고 기억할 수 있다. 그녀가 기억하는 것은 지니아다. 그녀는 지니아를 기억할 책임이 있다. 끝을 맺어 줄 책임이 있다. - 309

- 적은 누구였을까? 그녀는 과거의 어떤 원한을 갚으려고 했던 걸까? 전장은 어디였을까? 한군데는 아니었다. 온 사방과 이 세상이라는 조직 자체가 전쟁터였다. 아니면 눈에 보이는 곳이 아니라 뉴런 사이, 타올랐다 사그라지는 뇌의 그 조그마한 불길 사이였을 수도 있다. 지니아한테는 전깃불 같은 꽃이 어울릴 것이다. 누전처럼 밝고 치명적인 꽃, 강철을 녹여 만든 엉겅퀴처럼, 불똥처럼 씨를 터뜨리는 꽃. - 318

2026. mar.

#도둑신부 #마거릿애트우드 #민음사 #모던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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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 단편선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3
서머싯 몸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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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머싯 몸이라는 작가는 읽을 때마다 늘 그랬다.
늘 곰곰이 되짚어보게 만드는 훌륭한 묘사.

유머러스한 내면의 통찰이 훌륭한 관찰자의 시선이 있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믿게 된다.
당대의 작가로서 가지기 쉽지 않은 드문 윤리, 성, 계급 의식까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게 아닐지.
역시나 이번 단편선을 읽으면서도 시대상 대비 여성 묘사는 진보적이라고 느꼈다.

단편 소설의 간결함 속에서도 풍부한 시선들이 담겨 있는 재밌는 독서.
작가의 시선이 인간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이라기보다는 연민과 이해의 시선이라는 점도 몹시 공감.

- 하지만 대중이 어떤지 알 거예요. 훌륭한 묘기를 선보이면 열광하다가도 그들은 변화를 원하죠. 아무리 뛰어난 묘기라도 싫증을 내고 더 이상은 보러 오지 않아요. 당신도 겪을 일이랍니다, 내가 겪었던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에요. - 23, 춤꾼들

- 나는 그 소설을 읽지 않았다. 어떤 책이 돌풍을 일으키면 일 년은 기다렸다가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전혀 읽을 필요가 없는 책들이 얼마나 허다한지 생각하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 60, 비둘기의 노랫소리

- "난 사람들이 모르는 걸 집어내는 안목이 있지."
그는 말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었지만, 그는 그것이 괜한 것을 들추는 것은 아닐까 돌이켜 볼 줄은 몰랐다. - 107, 사자의 가죽

- 페리에 부인은 분통이 터졌다.
"대체 왜 그 청년을 거부하는 거니? 그 청년이 널 강제로 취했어. 그래, 그때 그 사람은 술에 취했지. 여자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닐 거야. 그 사람이 네 아버지를 때렸고, 네 아버지는 돼지처럼 피를 흘렸지만 네 아버지가 그 사람에게 앙심을 품었더냐?"
"불쾌한 사건이었지만 난 다 잊었다."
페리에가 말했다.
아네트는 거칠게 웃음을 터뜨렸다.
"성직자가 되지 그러셨어요. 상처받은 걸 진정한 기독교 정신으로 기꺼이 용서하시다니."
"그게 잘못이냐?" 페리에 부인이 발끈해서 물었다. "그 남자는 보상을 하려고 최선을 다했어. 그 남자가 아니었으면 지난 몇 달 동안 네 아버지가 어디서 담배를 구했겠니? 우리가 굶주리지 않은 것도 다 그 사람 덕이야."
"자존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품위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선물을 그 사람 얼굴에 던졌어야죠."
"너도 덕을 봤잖아, 아니니?"
"아뇨, 아니에요."
"알면서 거짓말하지 마라. 넌 그 남자가 가져온 치즈랑 버터, 정어리는 거부하고 먹지 않았지. 하지만 네가 먹은 수프는? 내가 그 사람이 가져온 고기를 수프에 넣는다는 거 너도 알잖아. 오늘 밤 네가 먹은 샐러드는? 그 사람이 가져온 기름이 아니었으면 맛대가리 없는 샐러드를 먹었을 테지."
아네트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알아요.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너무 배가 고팠어요. 네, 그 사람이 가져온 고기가 수프에 들어간 걸 알면서도 그걸 먹었어요. 너무 먹고 싶었어요. 그걸 먹은 건 내가 아니에요. 내 안의 굶주린 짐승이 먹은 거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쨌든 먹었잖아."
"치욕스러워. 절망적이야. 그놈들은 탱크와 비행기로 먼저 우리의 힘을 꺾어 놓고, 우리가 무장 해체되니까 굶기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꺾고 있어." - 159, 정복되지 않는 사람들

- 타인의 삶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지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거늘, 놀랍게도 사람들의 태도나 습관, 견해를 수정해야 한다고 거침없이 논평하는 자신만만한 정치인이나 개혁가 같은 인사들이 종종 있다. 나는 조언하는 것이 늘 주저된다.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만큼 속속들이 알지 않는 이상 어찌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행동하라는 조언을 할 수 있을까? 맹세코 나는 나 자신을 거의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은 조금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이웃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는 각자 외로운 탑에 홀로 갇힌 죄수들이고, 인간의 형상을 한 다른 죄수들과 기존의 신호로 의사소통을 하지만, 그 신호의 의미는 내가 생각하는 바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가 반드시 같은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인생은 한 번만 살 수 있는 것이고 가끔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도 일어나는데, 내가 뭐라고 이래라저래라 남에게 어떻게 살라는 말을 감히 한 단 말인가? 인생은 어려운 숙제다. - 195, 행복한 남자

- 현실이 내포한 여러 가지 불편한 요소들 중 하나는 완성된 이야기가 드물다는 것이다. 흥미를 자극하는 사건들이 있어도 관련된 인물들이 짙은 안갯속에 있기 마련이라 도대체 앞으로의 일을 가늠할 수가 없다. 우리가 예상한 불가피한 재앙은 전혀 불가피한 것이 아니며, 엄청난 비극은 예술성이 결여된 잡담 수준의 촌극으로 축소되고 만다. - 202, 낭만적인 아가씨

- "스페인에서 인간의 생명이 경시되는 것이 투우 때문은 아닐까요?"
"인간의 생명이 중시되어야 한다고 보세요?" - 222, 명예가 걸린 문제

-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 <요약(summing up)>(1938)에서 단편 소설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과연 체호프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쓸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그러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끊어지지 않는 선처럼 설명부터 결과까지 치밀하게 짜여 진행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단편 소설은 단일한 사건의 내러티브다. 그것이 물질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서술에 불필요한 것은 모두 제거하여 사건에 극적인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른바 '종지부' 찍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비판은 논리적이지 않은 경우에만 타당하다고 보았고, 비논리성에 따라붙는 비난도 정당한 이유 없이 순전히 효과만 노리고 비논리성을 남발하는 경우에만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나는 단편 소설을 흐지부지한 말줄임표보다는 마침표로 끝내는 것을 더 선호했다. - 작품 해설 중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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