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문학동네 시인선 226
진수미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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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좋아서 고른 시집인데, 확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그 무엇을 찾으려고 열심히 읽었다.

요즘 골라 읽는 책들....에게서 재미를 찾는 게 좀 어려운데... 시국 탓인가.
피로하고 우울해서일까.

금요일 하루 기분 좋았다는 게 믿기지가 않네 ㅋㅋㅋㅋ 헛웃음만 나고....

테니스 엘보가 심해져서 왼팔을 못 쓰고 있어서 더 그런 거 같고... 

- 이름 붙일 수 없는 망가짐을 보라.
어쩌면 이리도
나는, 나라는 존재는
좋아지기만 하는 걸까.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진
원고 파일처럼
지상이라는 무밭에서 솎아지고 사라지길
꿈꾸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이 꿈은 어서 깨도록 하자. - 시인의 말

- 궁극적으로 질문인 세계여 여자, 한복판, 찔렸다...... 무표정한 당신, 사실의 톤으로 만져지는 것들을 묻는다면, 양파의 궤도로써 도는 세계여 지금 당신의 이름으로 벗기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 10번 출구에서 돌아보라 - 강남역에서 중

- 삶이란 모두 잠든 밤
삐걱대는 마루를 디디는 일
발끝을 뾰족 세워도
존재의 기척은 요란하다
당신을 깨우고야 만다 - 센세라는 이름의 고양이 중

- 생은 한없는 모욕
순종과 굴종 사이에서 눈알 굴리는 것 - 처형의 이듬 중

- 삶이란
누군가 한 번은 밟아야 하는
개똥의 다른 이름
젖은 교차로에서
냄새나는 생이
끈덕지게 달라붙는 나의 바닥을
세상 모서리에 비벼 닦는다
스크린도 무대도 없이
아름다운 나의
개똥,
당신들 - 젖어서 아름다움 중

- 하염없이 배제당하는 아이야
하염없이 밀려나는 아이야
그럼에도
삶을 선택하는 아이야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는 걸까 - 개미는 애인이라도 있지 중

<심해어>
내게는
두 개의 눈이 있고

눈을 반쯤 감은 현실이 있고
스크린이 있고

액자처럼
세계를 껴안은 어둠이 있다

어둠은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의 이름도 사라지지 않는다

스크린에는
하염없이 이어지는 빗줄기가 있고
납작 엎드린 고요가 있고

우리는
왜 이리 슬픈 일이 많은 건가요?

지층처럼 단단해진 어둠
못생긴 입술이 있고

눈을 감으면
왜 동시에 감기나요?

느릿느릿 어둠을
툭 밀어내는 물음이 있고
(전문)

- 나는 내가 불편해
한없이
아마
이 생 내내 그럴 거야. - 자연광 독서 중

- 괴로움에 사상이 있다고
도스토옙스키는 말했다
당신 문제는
사상이 없었다는 것
괴로움이 너무 많았다는 것
당신은 나의 삶을 예측했다
헤아릴 수 없이 아득했던 그때
욕설 대신
이리도
많은 별을 천장에 새겨주었다 - 천장관찰자의 수기 중

-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
이 책의 모든 문자가 사라졌다
당신이 읽은 문서는
한갓 신기루
그러니까 이미 없는 것들에
잠시 눈이 어지러웠다는 말씀 - 신적인 너무나 신적인 중

2025. mar.

#고양이가키보드를밟고지나간뒤 #진수미 #문학동네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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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 - 바른 욕망
아사이 료 지음, 민경욱 옮김 / 리드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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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기는... 무슨 호들갑이냐 싶다.

정상 범주? 가 아닌 마이너 한 성욕의 부당한? 취급이 그토록 억울한가? 
사회생활도 어려워, 난 오해 받고 있고, 고립감에 외로워...라고 징징대는 것만 같다.
이건 페도필리아랑은 다른 거라고 말하는(물론 엄밀히 아동이 주 목적은 아니다만...) 그들의 존재를 숙고해 보자는 건지.. 이 이야기가 뭘 추구하는 건지...
취향을 완성하려면 애들 빼고 자기들끼리 모임을 만들던가 하면 되지 않나 생각하는데, 모르겠네. 대체.

물론 작가가 이상 욕구를 인정하자!라고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억울함이 너무 대변되어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읽고 앉았는지.... "또" 낚인 소설이다.
돈도 시간도 좀 아깝다.

뭐 통찰은... 다른데 쓰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징징대지 말고.
누가 안 놔뒀냐고...... 싶은 것.

- 그런데 조금씩 깨달았습니다. 얼핏 보면 독립되어 보이는 메시지가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세상에 흘러넘치는 정보는 거의 모든 작은 개울이 모이고 또 모여 커다란 바다를 이루듯, 이 세상 전부는 사람들 몰래 설정된 커다란 목표로 수렴되어 간다는 사실을. - 6

- 다양성, 이 단어 속에는 축복과 비슷한 이미지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정하자.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더라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자. 나답다는 데 당당해지자. 타고난 속성을 다른 이가 판단하는 건 틀렸다.
가슴이 상쾌해질 정도로 축복이 반짝이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결국, 소수자 가운데서도 주류에게만 해당하는 말이자 말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의 '자신과 다른 것'에만 해당하는 말입니다. 
상상을 초월한 나머지 이해하기 힘든, 직시할 수 없을 만큼 혐오스러워 거리를 두고 싶어지는 것에는 단단히 뚜껑을 덮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말들이죠. (...) 나라는 인간은 사회로부터 확실히 선을 긋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냥 놔두길 바랍니다. 그냥 놔두기만 하면 알아서 살 테니까. - 8

- 사회는 날마다 변한다. 가치관, 사고방식, 상식, 어제는 이랬던 게 오늘은 그렇지 않게 된다. 가치관을 재는 눈금이 항상 흔들리는 시대이므로 법 아래의 평등만은 지켜야 한다고 히로키는 생각했다. - 19

- 나쓰키는 슈의 부고를 들었을 때 동창회는 중지될 줄 알았다. 그런 모임은 열 수 없을 줄 알았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밝은 모임을 여는 걸 슈도 좋아할 거라는 의견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간은 생각이란 걸 놓아 버릴 때 종종 '이런 때일수록'이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157

- "특수한 욕구를 지녔다고 해서 뭐든 해도 된다는 건 아니야."
(...)
"아무리 채우지 못한 욕구를 지녔다고 해도 그것을 사회에 화풀이해서는 안 돼."
히로키는 한 글자 한 글자를 고시카와의 피부에 새기듯 말했다.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야. 어떤 종류의 욕구를 지닌 인간이라도 법률이 정한 선을 넘으면 벌을 받아야 해."
사회정의를 위해. - 359

2025. mar.

#정욕 #아사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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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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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이 꽤나 흥미로웠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은 너무 관념적이고 추상적 이미지만 가지고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래서 솔직히 지루하다.

결국은, 정체되어 있는 로드무비랄까.
이 스토리는 굳이 이 정도 볼륨의 책으로 읽기엔....

어린 시절의 인연으로 서로에게(정말 서로인가?는 차치해두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데.
재밌을 법도 한데 지루하다는 게 특징이다.

그녀가 그에게 의존적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인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살아있는 인간은 그녀였고, 그의 존재는 왠지 실제가 없는 엔피씨 같은 느낌이 든다.

페트리쇼르(Pétrichor)라는 단어가 신선했다는 소득이 있었다. 식물이 가뭄을 만났을 때 분비하는 기름방울이 진흙이나 암석에 스며들었다가 비가 건조한 대지를 적시면 이런 기름이 만들어내는 냄새에 빗물이 섞이는 것. 프랑스어인줄 알았더니 원래 영어 단어에서 온 말이라고.

-  보통은 그가 유일한 관객이었다. 전부 그가 못 본 영화들이었다. 흑백도 있고 컬러도 있었다. 고화질이 아닌 데다 색채가 뒤섞이기 일쑤였고, 걸핏하면 영상이 끊겼다. 주인이 커튼을 들추고 들어와 테이프가 손상되었다고 선포하며 새 영화로 바꿔 주었다. 그러다 보니 적지 않은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상상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결말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할까.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결말을 갈구할까. 사람들은 화해나 파국, 여행의 종점, 도로의 끝, 우기의 끝, 서설의 강림을 기대했다. 지금부터는 즐거움만 있거나 영원히 슬플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인생에선 원래 선명한 마침표가 없다. 종종 작별 인사를 건넬 기회를 놓치고, 눈을 뜨건 감건 영원히 못 보는 경우도 있다. - 132

- 죽음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사바사나 자세를 할 때마다 여러분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겁니다. 자신이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빠르거나 느리게 빛나거나 암울하게 다들 죽어가고 있지요. 강줄기나 사막, 구름이나 나무뿌리, 빗방울이나 바위도 마찬가집니다. 진지한 자세로 누우세요. 편안하게 몸에 힘을 빼세요. 천천히 호흡하면서 죽음을 연습하세요. - 136

- 모든 등불이 밝은 빛을 쏟아내는 밤이었다. 그는 어쩌다 여기 오게 된 걸까. 줄곧 빛을 피해 왔는데, 어쩌다 이렇게 수정처럼 밝은 파리의 옥상에 오게 된 걸까. - 137

- 기자가 그에게 감동해서 우느냐고, 고진감래라고 생각하느냐고, 마침내 인정을 받았기에 우는 거냐고 물었다. 그는 언어로 자신의 눈물을 해석할 길이 없었다. 이런 순간에 언어는 무용지물이었다. 눈물이 바로 그의 언어였다. 눈물에 자신의 문법과 구두점과 발음과 서사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눈물을 알아듣지도 못하고 읽어내지도 못했다.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물은 그 순가 그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 146

- 그녀가 마지막으로 화를 낸 게 언제였더라.
정확히 특정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화를 내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화를 내려면 진심이 필요했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이 아니고 성실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진심을 원하지 않았다. 진심은 너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분노하기 위해선 온몸의 근육을 다 동원해야 하고, 감정이 격앙되면 자칫 진심의 말이 튀어나오게 된다. - 237

- 마침내 그녀는 준비가 다 되었다. 기다리지 않고 큰 걸음으로 앞을 향해 나아갈 작정이었다. - 480

2025. mar.

#67번째천산갑 #천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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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6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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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그라드는 영광.
격변에 순응하고 소멸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영주.

그 세월을 통과하면서도 최소한의 권위를 유지하고 사그라드는 건 그 와중에도 특권이며, 이 글의 관능성, 귀족적 삶에 대한 동경.... 그런 걸 느껴보자는 걸까.
격변의 시대에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무저항으로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득권의 모습이 어쩌면 그 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동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국민 소설이라고? 잘 모르겠다. 이걸로 드라마가 나오고,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딱히 극적 요소랄 게 있는 서사인가 싶지만... 
아름답게 영상화하려면 넉넉하게 충족하는 이야기인 것 같기는 하다.

왕정이 공화정이 되는 과정이 순탄했을 리 없으나 피의 기록은 약간의 암시와 단편적 묘사로만 이루어져 있고, 존엄했던 마지막 영주의 시점으로만 서정적인 진술이 이루어져서 뭐랄까.... 존엄하게 소멸하겠다.라는 의지랄까. 

기대했던 그 시절의 서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콘체타의 서사.

뭐 이런 정도의 감상으로 마무리된다. 


- 매일 올리는 묵주기도가 끝났다. 영주는 삼십 분 동안 차분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기했다. 이 삼십 분 동안 웅얼거리는 다른 사람들 목소리가 뒤섞여 나지막이 일렁였는데, 여기서 사랑, 순결, 죽음처럼 예사롭지 않은 말들이 황금 꽃잎처럼 떨어졌다. - 9

- 그의 권위적인 기질, 어느 일면에서 엿보이는 엄격한 도덕성, 추상적인 사고에 대한 선호는 팔레르모 사회 같은 느긋한 서식 환경에서는 종잡을 수 없는 오만으로, 반복되는 도덕적인 가책으로,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경멸로 변했다. 영주가 보기에 그들은 느릿느릿 실용적으로 흐르는 시칠리아라는 강물에 표류하는 사람들 같았다. - 13

- 어머니에게는 자부심과 지성을, 아버지로부터는 호색가의 기질과 경솔함을 물려받은 파브리초 영주는 제우스처럼 눈살을 찌푸린 채 끊임없이 불만을 품고 살았다. 자신이 속한 계급이 몰락하고 가문의 재산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대응책을 강구할 생각도 전혀 하지 않았다. - 14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모한 짓은 하지 않고 현상 유지에 전념하는 것? 그렇다면 얼마 전 팔레르모의 황량한 광장에 울려 퍼진 것과 같은 메마른 총성들이 의미하는 행동이 필요한 것인가? 하지만 그런 총격전들 역시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 23

- "너 미쳤구나, 탄크레디! 저런 자들과 한통속이 되다니! 그런 놈들은 다 마피아에 사기꾼들이야. 팔코네리 가문 사람은 국왕을 위해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 탄크레디의 눈에 다시 미소가 번졌다. "당연히 왕을 위해서죠. 그런데 어떤 왕이요?" 그는 곧 진지해졌는데 그런 모습이 신비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지금 우리가 나서지 않으면 저들이 공화국을 만들 거예요.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면 모두 다 바꾸어야 해요. 제 말 뜻 아시겠어요?" 탄크레디가 조금 울컥한지 외삼촌을 포옹했다. "곧 뵐게요. 삼색기를 흔들며 돌아오겠습니다." - 38

- 많은 일이 일어나겠지만 모두 희극이 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옷에 핏방울 몇 개가 묻었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낭만적인 희극. 이곳은 타협의 땅이었다. - 48

- 그래도 작고 초라해진 꿈을 주머니에 넣은 채 보잘것없는 위치에서도 자신의 일을 계속해 나가는 사람에 대한 연민이었다. 또 가난하지만 점잖은 그에게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는 감탄하는 마음까지 생겼다. 그리고 실로 마음 깊은 데서, 거만한 그의 마음속에서 혹시 돈 치초가 살리나의 영주인 자신보다 훨씬 신사답게 행동한 것은 아닌지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147

- 돈 칼로제로가 스스로 깨달은 바를 당장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면 그건 성급한 말이다. 그 후 좀 더 매끈하게 면도하는 법을 알았고 세탁에 사용되는 비누의 양에 전보다 덜 놀랐을 뿐 다른 점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를 기점으로 세다라와 후손들은 끊임없이 세련되게 다듬어졌고 계급 상승을 이루었다. 그들은 3세대에 걸쳐서 유능한 농부에서 무방비 상태의 귀족 신사로 변해 갔다. - 176

- 탄크레디는 키스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시칠리아를, 이토록 아름다우면서도 믿을 수 없는 땅을 다시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팔코네리 가문이 수 세기 동안 군림한 땅을, 지금 무의미한 반란 끝에 (그의 선조들에게 항상 그랬듯이 그에게 항복하는) 육체적 희열과 황금빛 수확이 약속된 시칠리아를 되찾은 듯했다. - 194

- 언제나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불안하지만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안심이 되었다. 아마도 자신의 죽음은 무엇보다 온 세상의 죽음이 될 테니까 그렇지 않을까? - 288

- 바다의 포효가 완전히 가라앉았다. - 319

- 그녀의 내면은 완전히 텅 비었다. 다만 작은 털 더미에서 불편함의 안개가 피어올랐을 뿐이었다. 이것이 오늘의 아픔이었다. 불쌍한 벤디코조차도 쓰라린 기억을 암시했다. 그녀는 종을 울렸다. "아네타, 이 개는 정말 너무 벌레 먹고 먼지가 쌓였어요. 갖다 버려요."
사체가 끌려가는 동안 유리로 된 눈은 버려진 것들, 되돌려지고 싶은 것들의 무기력한 비난을 담아 그녀를 응시했다. 몇 분 후, 벤디코의 남은 형체는 청소부가 매일 방문하는 마당 한구석으로 던져졌다. 창문에서 던져지는 동안 그 형태가 잠시 재구성되었다. 긴 콧수염을 기른 네 발 달린 동물이 저주하듯 오른쪽 앞발을 들어 올리며 공중에서 춤을 추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다음 모든 것이 납빛 먼지 더미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 350

2025. mar.

#표범 #주세페토마시디람페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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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세계 문학과지성 시인선 481
백은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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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적인 세계관과 그 서사가 존재하는 시는 읽기는 가능하나 흥미가 감소한다. 너무 시인만 아는 이야기와 세계를 예쁘게, 혹은 처연하게 꾸민 느낌이랄까.

종잡을 수 없이 이리저리 튀어오르는 이미지와 시어들, 이야기가 나의 읽는 행위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고.

- 단정한 기계들 깊은 밤
투명한 구름 속을 헤맨다면
서서히 지워질 수 있다면
이토록 차가운, 붉은
고깃덩어리들 그러면 나는
불 속에서 너를 지켜볼게 - 시인의 말

- 계획이 다 탄로 난 뒤에는 어떤 채도를 갖게 될까 노랗게 물든 손가락으로 너는 묻는다 - 어려운 일들 중

- 계속 쓰면 부서질 것들도 부서질 듯 모이고 참 이상하죠?
이상하게도 그런 생각은 하루하루 사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병원 손님 의자 테이블 중

- 이게 끝이면 좋겠다 끝장났으면 좋겠다
젖은 솜처럼
해수어와 담수어의 사이만큼
이미 실패했지만 다시 실패하고 싶다 - 가능세계 중

<아홉 가지 색과 온도에 대한 마음>
초록이었을까. 그건. 눈이 내렸을까. 아니면 손과 손, 지나가는 바람 또 바람. 그런 것들뿐이었을까. 그녀에게. 알 수 없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새는 지도를 버리고 숲 쪽으로 기울어진다. 빛이 많은 악기를 조심하라고 우리는 서로의 이마에 화 자를 새겨주었다.

오늘 밤 내가 할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녀가 그녀의 숨을 벗고 어디로 갈지 몰라 헤맸던 것처럼. 부숴버리고 싶은 가느다란 뼈들. 나는 나의 밖으로 나를 데리고 나갈 거야. 꿈에는 매번 같은 의자에 앉아 같은 사람과 얘기 나눴다. 더 어두워진다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을 무섭다고 하지 못하는 것.

수심은 빛을 갖는다. 새의 날개가 부러진다. 우아한 추락이구나. 붉게. 이번 사냥엔 동원될 것이 많다. 나는 네 옷섶을 풀어 최초의 발톱과 눈먼 사자의 털을 넣어준다. 그리고 상아를 깎아 만든 우윳빛 젓가락 한 벌. 빛을 통해, 빛을 통해 어두워질 것.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나요. 냄비는 뜨겁고 손과 물 혹은 손에 갇힌 손, 물에 갇힌 물. 그건 균열에 대한 이미지. 눈이 내리기 직전에는 모든 것이 자리를 바꾸지. 알 수 없는 중력, 알 수 없는 목소리. 복도를 가로지르는 칼날.

뒷모습은 증식한다. 하나둘. 그녀의 안개가 힘없이 수면을 드리웠던 것처럼. 꼼짝 말고 여기 있어. 초록일까. 몸을 관통하는 바람에 대한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무릎을 접고 그녀는 진창으로.

그때부터 이마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길렀다. 작은 나무상자가 불에 덴 잠을 훔쳐갔기 때문에. 그녀가 새를 잡아왔기 때문에. 나는 한 가지 소리만을 움켜쥔다. 거꾸로 처박힌 이미지들. 그것에 관여하는 음은 증발하는 성질. 불의 가장자리와 동일한 손이다.
(전문)

- 나는 슬픈 이야기를 하려고 했어ㅓ 실은. 너무 슬퍼서 있지도 않은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그런데 자꾸 구름만 봤어. 어째서 세상은 이 따위고, 어째서 새나 강물 같은 것을 보며 평화롭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하고 생각하니까. 슬픈 마음을 슬프다고 하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것 같아서. 낮아지고 있어. - 종이배 호수 중
- 배운 적도 없는데 터져 나오는 첫울음처럼 마주 잡는 두 손, 흩어지는 한순간의 떨림 이름 붙이고 싶은 여러 가지 색들 뾰족한 연필을 쥐고 꾸욱 손가락을 찔러보는 책상 앞의 나날 밤은 어김없이 밤이구나. - 열대병 중

2025. mar.

#가능세계 #백은선 #문학과지성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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