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 오늘의 젊은 작가 54
박서영 지음 / 민음사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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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파국으로 끝난다고? 싶은 당혹감이 좀 있다.
짧은 장편이라서일까?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의 딸이 주인공인 설정.
약간의 이물감이랄까. 불편감이랄까. 그런 지점도 분명 있다.

나무에게 치명적인 병을 옮기는 존재인 엄마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벌목.
아무래도 우울한 설정일 수밖에 없지 싶다.
그래도 조 단장이라는 기댈 구석이 있어 다행일까.

지독한 증오로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처음 알게 된 표현.
'윤몰하다' 물 속에 가라앉아 빠지다. 어떤 세력이나 현상 속에 휩쓸려 없어지다.

- 나는 그 말을 알지 못했고 늘 익숙한 침묵을 택했다. 항상 이래 왔다. 무엇에도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그저 살아 숨 쉬는 것에만 최선을 다할 뿐인 인상으로...... 어디서나 겉돌 수밖에 없는 뚱한 표정......
나를 수식하는 건 나무 벌목이라는 생계 수단과 서른이라는 애매한 나이, 그리고 여자라는 성별이다. 하얀 피부와 주근깨투성이인 얼굴, 15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키, 누리끼리한 손발톱..... 이것만으로도 남들과 구분되는데 어눌한 발음까지 그대로 드러내면 내가 짐승의 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기분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그저 숫기 없이 나무 베는 여자로 각인되고 싶다. 이것이 사람 집단에 동화되기 위한 나의 최선이다. - 38

- 나는 버려진 것이다. 다나가 연리재에서 들려주었던 처절한 경험을 나도 똑같이 겪게 되었다. 버려진다는 건 이런 것이었다. 사람의 규칙 바깥에 내던져지는 것. 사람의 규칙을 알고도 그와 무관한 삶을 살도록 강요받는 것. 버려졌다는 것보다 다나의 마음을 내가 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끔찍했다. - 76

- 어떤 딸은 엄마에 대한 분노를 먹으며 자란다. 나는 엄마와 다르다는 믿음이 비로소 나를 자유롭게 한다. - 82

- '미워하거나 미워했던 것들을 쓰시오.'
시험지를 내민 삶의 뻔뻔한 표정.
사실 내가 가장 미워하는 건
이 시험지를 내민 삶이다.
내가 미워하는 모든 것으로 빚어진 삶.
도망치려 들어선 모든 길목마다 마주친 삶의 그림자.
삶에게 몸이 있다면 장기를 모조리 꺼내고 싶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벌을 삶이 받았으면 좋겠다. - 작가의 말 중


2026. mar.

#다나 #박서영 #오늘의젊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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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조승리 지음 / 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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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궁장의 고백을 읽고 관심이 생겨 정보 없이 책을 샀는데,
작가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예상치 못한 정보에 조금 놀랐다.

그런 이유로 에세이 전반이 장애와 뗄 수 없는 에피소드들이었다.
그 지난하고 고된 경험을 쉽게 공감한다 감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체념을 한다라고 작가는 썼지만,
절대 체념하지 않는 삶의 태도와 자세가 기세로 느껴지는 이야기들이다.

다른 책도 더 궁금해진다.

차례에 앞서 점자도서나 전자책으로 만들 때를 위해 표지 설명을 덧붙인 점이 좋았다.

- 나는 어둠을 훑어보았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늘을 수놓는 수백 송이의 불꽃이 궁금했다. 그러나 지금 저 불꽃을 볼 수 없다 해서 아쉽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불꽃은 더 찬란하고 빛나기 때문이다. - 15

- 카프카를 읽고, 하루키와 윤대녕과 빌 브라이슨과 레이먼드 챈들러를 만났다. 내게는 시간이 없었다. 병원에서는 10여 년 정도 시력이 남아 있을 거라고 진단했다. 나는 마음이 급해졌다. 손에 닿는 대로 책을 꺼내 활자를 눈에 담았다. 당시 나는 무지했다. 책은 눈으로만 읽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문학전집을 모두 읽고 싶었다. 기형도의 시집을, <호밀밭의 파수꾼>을,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읽어야 했다. 그래야만 내 현실을 견딜 수가 있었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채로 집에 가면 엄마는 제발 책 좀 읽지 말라며 야단을 쳤다. 그러나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 16

- '극복'이라는 말처럼 오만한 단어가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고, 가난을 극복하고, 불합리한 사회를 극복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생각한다. 나는 영원히 내 장애를 극복하지 못할 거라고. 나는 단지 자주 내 장애를 잊고 산다. 잊어야지만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빨리 체념한다.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다. - 38

- 다리를 끌어안고 몸을 동글게 말았다.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몸을 앞뒤로 흔들었다. 나는 마모된 몽돌이다. 까맣고 동그란 몽돌. 바다는 나를 끌어당겼다가 멀찍이 밀어놓기를 반복한다. 누구에게나 불행을 견디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불행을 참아내고 있다. - 158

2026. may.

#이지랄맞음이쌓여축제가되겠지 #조승리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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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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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하게 배고파지게 만드는 힐링 소설.

제도적 뒷받침되는 파트너쉽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든다.
여러 형태의 공동체 연대가 필요한 시대이기에 이런 이야기가 설득력이 있는 것.

그저 작은 도움으로도 땅을 박차고 일어날 기운을 차릴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삶에 대해 그 어떠한 적극적 의지가 도무지 생기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걸 담담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도 좋았다.

인생의 어느 시점 삶의 무게가 유독 무거워지는 그런 때
매일매일 수행해야 하는 득도 없고 티도 안 나는 집안일에 익사할 것 같은 사람들을 돕는 일.
딱 따스한 힐링을 줄 수 있는 소재로
설정 자체가 일본 드라마스럽고,
여성성, 임신에 대한 집착? 이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키지만
어느 정도 그 나라의 문화적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나도 빨래랑 청소쯤은 해요."
"그래도 그런 일은 여자가 역시 더 잘하니까."
"성별은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잘하는 건 여자여서가 아니라, 시행착오를 겪으며 고민하고 실천을 반복하면서 잘하게 된 것뿐이에요. 남자도 마찬가지로 하면 똑같이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을 조금 더 우호적으로 말했다면 인상도 달라졌겠지만, 오노데라 세쓰나는 날카로운 눈초리에 정색한 얼굴이었고 어조도 담담했다. - 28

- 가사 대행을 하다 보면 대충 사람의 성향이 보이는데요, 성실하고 노력가일수록 남의 도움을 받는 데 서툴러요. 쓰러지기 직전이나 쓰러진 후가 아니면 도와달라는 것 자체를 태만이라고 느껴요. 스스로 얼마나 힘든지 자각 못 하는 사람도 많고요.
세쓰나의 진갈색 눈이 이쪽을 힐끔 봤다. 그쪽처럼요,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 114

- 모르지.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같은 집에 살았어도 섹스를 했어도 인간은 자기 이외의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어. 안 것 같은 기분이 들어도 결국엔 착각이야. - 242

- 우리 발밑에 있는 것은 그토록 불확실한 세계이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훨씬 더 불안정한 존재다. 그 슬픔을 세쓰나는 끔찍할 정도로 알고 있다. - 355

2026. mar.

#카프네 #아베아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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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 세븐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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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이야기는 거의 다수를 좋아하지만 레벨 세븐은 지나치게 늘어진다.

이렇게까지 길게 설명을 늘어놓고, 마지막에 갑작스럽다 느껴지는 복수 크루도 좀...

1990년 작품이라니... 오래된 만큼 그만큼 낡아서? 그런 건가 싶다.

기억 억제 약물에 전기 충격 등 딱 와닿지 않는 소재들이지만 어쨌든 1984년의 정신과 환자 인권 침해 실화를 모티브로 했기에 당위성을 얻는 소재가 되었다.
거기에 얽힌 사건이 단일 사건이 아닌 점은 흥미로운 요소가 될 수 있지만, 이 경우엔 오히려 이야기의 호흡을 오히려 방해한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모든 나쁜 사건들은 부와 권력과 공권력과의 유착이 매번 문제랄까... 그러니까 악이 성립되는 거겠지만.


- 전혀 불쾌하지 않다. 인생은 즐겁다.
이제부터 하려는 일이 성공하면 훨씬 즐거워지리라. 청년은 믿었다. - 15

- 에쓰코는 생각했다. 대체 한 인간이 일어설 수 없게 될 때까지 지치도록 일해야 하는 법 따위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가. 한 인간을 그렇게까지 부려먹을 권리가 누구에게 있다는 말인가. - 73

- 우리 가족은 두 번 살해당한 게 된다- 라고 유지는 생각했다.
첫 번째는 사이와이 산장에서 총에 맞아 살해당했다. 그리고 남겨진 유지와 아키에의 기억이 지워지고 다시 기억이 났을 때 또 한 번 살해당한 것이다.
어떤 비극이든 슬픔은 한 번으로 끝난다. 어떤 비탄이든 가장 깊은 곳은 한곳으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한 번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똑같은 슬픔을 똑같은 깊이로 다시 경험해야 한다.
용서는 불가능하다. 창 쪽을 향한 아키에의 하얀 볼을 바라보면서 유지는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할 가치가 있다- 고. - 380

- 별장지는 어둠의 저편에서 망령처럼 솟아올랐다.
불빛도, 음악도, 빛도 없다. 한여름의 정체된 어둠의 밑바닥에서 고요히 죽어 있다. 나란히 선 몇몇 별장의 지붕은 묘비처럼 그저 초연하게, 모든 생생한 생명 활동으로부터 뒤쳐진 듯 보였다. - 560

2026. may.

#레벨세븐 #미야베미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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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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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기도 전에 이미 별 다섯을 주고 읽어나가는 시집.

어쩌면 이렇게도 시리게 다가오는지 모를 일이다.

모든 시에 플래그를 다닥다닥 붙이고
결국은 그것들이 의미 없어지게 되고...

신의 의미에 대해 언급되는 마지막 부는 조금 취향 밖이지만
그러나 해설을 통해 시인을 더 알 수 있는 지점.

늘 좋은 시인.

- 소식은 없었다
밤에 생긴 상처는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도망치지 못했다
2020년 6월
허연 - 시인의 말

- 트램펄린에 날 던지면서 말한다
"말해줘 가능하다면 내가 세상을 고르고 싶어"
생각이 있으면 말해주리라 믿었지만
트램펄린은 그냥
나를 떨어뜨리고
미워하지도 않으면서 나를 떨어뜨리고
그러면 내 처지도 최선을 다해 떨어지고
세상에서 트램펄린이 모두 사라졌으면 좋겠다 - 트램펄린 중

-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보통은 별이 떠야 알 수 있지만
강 하구에 찍힌
어제 떠난 철새의 발자국이
그걸 알려줄 때도 있다
마을도 돌고 있는 것이다
(...)
이 거리에서 이런저런 생들은
지구의 가장자리로 이미 충분하다 - 어떤 거리 중

- 십일월의 나는 나쁘게 늙어가기로 했다
잊고 있던 그대가
잠깐 내 안부를 들여다본 저녁
창문을 열면
늦된 날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절망의 형식으로 이 작은 아파트는 충분할 걸까
한참을 참았다가
뺨이 뜨거워졌다
남은 것들이 많아서 더 슬펐다
(...)
미친 듯이 슬펐는데 단풍은 못되게 아름다웠다
신전 같은 산 그늘이 나를 덮었고
난 죽지 못했다 - 십일월 중

-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아
당신은 모르지
내일에도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는지

바람이 분다
새벽 1시의 바람이 분다 - 새벽 1시 중

-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는 연습을 하자. 언제 커피 한잔 하자는 말처럼 쉽고 편하게, 그리고 불타오르지 않기. -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중

- 소금을 물에 녹이듯
굴욕을 한입 가득 물고
파도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나는 어두운 열매를
눈물 없이 먹을 수 있을 줄 알았고
나는 여전히 당신의 밀도에 녹는다 - 바닷가 풍습 중

- 그 어떤 실망도 없이 강물이
내 앞을 떠나는 것을 보고 있다
어떤 불안도 없다
나보다 더 추한 미래는 알지 못하므로
기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강물이 그랬던 것처럼 - 열대 중

- 스쳐 가는 생각들
순서 없이 파고드는데
시가 아닌 건 없다. 잠들기 다 틀린 새벽
아무것도 남지 않고 시가 남았다. - 24시 해장국 중

- 그해에는
적절치 않은 음표들이
자신의 처지를 저주하다
무한대로 아름다워지곤 했다 - 트랙 중

- 나는 완성이 아니었구나. 내게 절창은 없었다. 이제 내 삶을 뒤흔들지 않은 것들에게 붙여줄 이름은 없다. 내게 와서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명이다.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적어도 이 생엔. - 절창 중

- 생각해보면
너무 많은 바람, 너무 많은 빗물
이런 게 다 우리를 힘들게 했지

우리의 한숨이 너무 깊어서
우리는 할 일을 다한 거 같았고
강변에서 일어나기로 했지 - 이별의 서 중

2025. dec.

#당신은언제노래가되지 #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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