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주부의 일기
수 코프먼 지음, 구원 옮김 / 코호북스(cohobooks)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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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여성을 미치게 하는가?

흥미로운 해피 엔딩?

허영과 권태의 대결 끝에 미친 완벽한 주부가 되기로 결심하는 어이없게 웃기는 결말.

브루클린을 읽고 이어 읽었는데 아무래도 정서적인 유사성이 있어서라는 추측이 있어서였는데, 
자본주의 관점에서의 계층 차이가 확실히 있으나, 정서라는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 기록, 실로 멋진 단어다. 경기의 수치 따위 말고 진술의 개념인 기록 말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기록. 일기나 수기라는 단어 보다 훨씬 낫다. 일기라는 단어를 보면 캠프장의 여자아이들이 떠오르는데, 꼭 뚱뚱하고 땀 많은 아이들이 투실투실한 목에 열쇠와 자물쇠가 달린 녹색 가짜 모로코가죽 일기장을 걸고 있는 모습이다. 한편 수기라는 단어는 대학에서 문학 시간에 공부한 앙드레 지드나 버지니아 울프, 고리키 혹은 보들레어를 떠올리게 한다. 보들레어의 "광기의 날개가 일으킨 바람이 나를 스쳐 갔다"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긴 하지만.
어쨌든 기록은 좋다. 기록은 옳다. 그래, 기록하면 좋을 것 같다. 예컨대, 이것은 오늘 아침 7시 22분에 우리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기록이다. - 7

- "사실." 조지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진심으로 당신은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워야 해."
나는 등을 대고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당신이랑 그놈의 격언들. 그러는 당신은 그걸 실천하고 있어?"
"노력하고 있어. 해내고 있는 것 같아. 당신처럼 잔뜩 성이 난 채로 돌아다니진 않으니까. 나는 모든 걸 가능한 한 단순하고 간소하게 유지하려고 해."
"신경 쓰고 챙겨야 할 사람이 자기 자신밖에 없으니까 별로 어렵지 않겠지." 나는 씁쓸히 말했다. - 243

- "당신은 정상이 아냐." 조너선 역시 목소리를 한껏 낮추고 말했다.
"아니, 그 반대로 난 너무나 멀쩡해. 사실 내가 정곡을 찔렀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 이 집에서 가스라이팅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다고." - 326

- "나는 극작가가 아니야." 나는 스커트의 지퍼를 올리며 말했다.
"감당하지 못할 일에 휘말려버린 멍청하고 미친 주부일 뿐이야." - 332

- 조지는 내가 한 가지에 마음을 붙이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과연 그게 무엇일까? 알 수 없었다.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결국 벤치에서 일어나 집에 돌아왔고 여기에 쓰기 시작했다. 이 정도 쓰고 나니 이제 내가 무엇을 결정할 것이며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알겠다. 누구? 그게 누구냐고? 완벽 주부 타비타 트윗칫 댄버스가 아니면 누구겠는가. 앞치마를 두른 여자. 쇼핑 목록을 쓰는 여자. 열쇠 다발. 그게 나다. 내게 딱 맞다. 왜 여태 그걸 몰랐을까? 아마도 내가 그런 주부로 사는 걸 조너선이 허락하지 않아서겠지. 르네상스맨에게 어울리는 부인의 모습이 아닐 터이니까. 글쎄, 나는 조너선이 원하는 이미지에 부합하려고 노력해봤다. 온갖 이미지를 다 시도해보았지만, 이제 알겠다. 나는 전통적인 주부가 될 것이며, 조너선은 그게 싫어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완벽 주부 타비타 트윗칫 댄버스로 거듭나자. - 363

- 바퀴벌레는 숫자 사이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미친듯이 기다가, 다음 순간 팔짝 뛰어 날카로운 모서리에 긁히지 않고 유리판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시계 옆면을 타고 조리대로 내려간 뒤에 벽으로 기어가 타일 사이의 회반죽 구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상처는 입었을지언정 기죽지 않고, 처자식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 378

2026. apr.

#미친주부의일기 #수코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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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한 편 읽을 시간 난다시편 5
정일근 지음 / 난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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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목서, 은목서의 향기가 가득 느껴진다.
입말 같은 날 것 같은 시들.

한 달간 쏟아낸 시들로 엮은 시집이어서인지
단 한편의 길 시를 읽은 듯한 기분도 든다.

마산, 바다, 금목서, 은목서, 겨울의 이미지들.

- 훅, 시간은 가고 툭, 시절은 익어 저물지만
여전히 나는 나이다.
그래서 시를 쓴다. - 시인의 말 중

- 십일월로 가면 겨울이 온다고
사랑할 꽃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인디언이 말하지 않았는가
십일월은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 달이라고
우리 생에서 사라진 것은 없다고
이렇게 피울 늦꽃 있으니
생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늦꽃 중

- 다 꺽어와야 전부 아니지
꽃 한 송이로
꽃밭 다 보여줄 수 있듯
시는 씨앗 한 톨로
숲의 전부 다 보여주지
하나로 열, 백을 보게 하고
별에서 우주로, 우주 안에서 우주 밖까지
우리를 꿈꾸게 하는 거지. - 시가 꾸는 꿈 중

2026. apr.

#시한편읽을시간 #정일근 #난다시편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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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하기, 소유되기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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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그 무엇은 우리를 어떻게 규정하는지.

읽기 전 지레짐작으론 지루하지만 읽어볼 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짧은 글들로 구성되어, 지루할 겨를 없이 자본주의와 돈의 힘에 따른 세계의 구성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의미가 널뛰듯 건너뛰기도 하지만, 의식의 흐름에 따른 사고 또한 사회학을 연구하는 일종의 방법론일지 모르겠다. 당연시하는 것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한 그런 방법.

짧아서 속도감 있다는 장점은, 반대로 한 꼭지가 길지 않아 여운을 가질 새 없이 다음 꼭지로 넘어간다는 점일 수도 있다.

시장경제, 자본주의의 안락함을 누리는 계층으로서의 중산층의 위선을 냉소하는 시선이 강하다.
작가 스스로 소유하는 자라는 정체성에 대한 불편한 심리의 기록이기도 하다.


- 우리가 가구점을 방문할 때마다, 나는 이상하고 구체적이지 않은 갈망에 휩싸인다. 나는 모든 것을 원하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 17

- 그녀는 모순적인 삶을 살며, 모순된 욕망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그녀는 더 원하면서도 덜 원한다. 나도 그렇다. - 41

- 그레이버는 우리가 스스로를 소비자라고 여길 때 무언가 파괴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일 바깥에서도 생산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 47

- '어쩌면 나는 삶에ㅔ 더 많은 불안정성이 필요한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지나치게 편안해졌는지도 몰라.' 나는 빌에게 말한다. '아니야, 불안정성에는 대가가 있어.' 빌이 내게 일깨운다. 그리고 지나치게 취약한 상태라는 것도 있다고 알려준다. 빌은 잠시 말을 멈춘 뒤, 사실은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나는 그에게 설명해 주려고 하다가 사실은 나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자본주의가 어디서 혹은 언제 시작되었는지도 잘 모른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알아본 뒤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약속한다. - 64

- 예술과 여성은 둘 다 <쓸모없지만 예쁘>고 <사소한>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내가 마음에 걸리는 단어는 <교양>이다. 나는 그것과 무관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추구한다. - 87

- 그 속에서 웬 여자가 걸레를 들고 울타리에 기대어 선 채로 생각에 잠겨 있다. 그 위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계급 의식이란 당신이 울타리의 어느 편에 있는지 아는 것이다.> - 102

- <풍요한 사회>에서 갤브레이스는 미국에는 더 이상 유한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부자들은 일한다. 적어도 바쁘게 활동한다. 여가의 유행은 끝나고 새로운 계급이 등장했으니,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닌 사람들의 계급이다. 그들도 급여를 받지만, 급여가 핵심은 아니다. 그들은 충족감을 느끼기 위해서 일하며, 일 자체를 보상으로 여긴다. 급여는 부수적인 문제인데, 하지만 갤브레이스가 지적하듯이 <위신의 지표>이기는 하다. 그리고 이 계급 사람들에게 위신은 존경과 더불어 만족감의 원천이다. 그들은 급여를 많이 받고 싶어 하지만, 돈이 동기냐는 말을 들으면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갤브레이스에 따르면, <그런 것이 바로 새로운 계급의 노동이다. 귀족이 봉건적 특권을 상실할 때 느꼈을 슬픔도 이 계급 사람이 오직 급여만이 보상인 평범한 노동으로 전락할 때 느낄 슬플에는 댈 수 없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얼굴을 붉힌다. 들킨 기분이다. 그리고 이 챕터 전체를 다시 읽다가, 갤브레이스는 이 새로운 계급을 전도유망한 사건으로 본다는 점을 깨닫는다ㅏ. 갤브레이스는 풍요한 사회라면 그저 일일뿐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를 지속적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준 노동 시간도 줄여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계급은 자신의 즐거운 노동 시간 중 일부를 모든 사람이 더 즐겁게 일할 방법을 찾는 데 써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 122

- 사람들은 영국 소유의 인도 농장에서 재배된 차에 카리브해 농장에서 노예들이 생산한 설탕을 타서 마셨다. 차는 식사 대용으로는 부실했으나 그래도 따뜻하고 달콤했다. 그것은 위안이자 낙이었고,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들이 겪는 박탈 덕분에 누리게 된 일상의 사치였다. 오늘날 우리가 마시는 것도 여전히 식민주의의 유산이다. - 162

- 모든 종류의 소유권은 잘해 보아야 위태로운 사업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 167

- 나는 남자가 여자에게 집안일을 다 맡겼더니 생산성이 높아지더라는 이야기가 왜 새로운 소식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곧 이것이ㅣ 발전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우리가ㅏ 예전에는 이것을 그냥 결혼이라고 불렀으나 지금은 지배라고 부른다는 점이 뉴스인지도 모르겠다. - 178

-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부제는 <월 스트리트 이야기>다. 바틀비는 수동적 저항자다. 노동자인 그는 처음에 특정한 일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그다음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겠다고 거부하고, 급기야는 해고되기조차 거부하는데, 매번 <저는 그렇게 안 하고 싶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말함으로써 거부한다. 그의 저항에는 목적이 없으며, 그가 저항 외에 딱히 무엇을 성취하려는 생각도 없는 듯하다. 나는 바틀비가 감옥에서 아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그의 이야기가 왠지 내게는 여전히 승리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제인 데마레는 <바틀비의 자유는 인생과 양립할 수 없는 종류>라고 말한다. - 222

- 메리엄-웹스터 사전이 선정한 <오늘의 단어>는 <위태로운 precarious>이었다. 덕분에 나는 이 단어의 원뜻은 <타인의 의지나 괘락에 의존하는 상태>라는 것을 배웠고, 이 단어가 <기도 prayer>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다는 것도 배웠다. 위태로움은 도처에 있는 듯 모인다. 어쩌면 그것은 애나 로웬하웁트 칭이 말했듯이 <우리 시대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한 프레카리아트라는 계급 전체를 규정하는 특징이다.

- 정말로, 문제는 사치였다. 그리고 내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였다. <풍요한 사회에서는 사치품과 필수품을 제대로 구별할 수 없다. > 존 케네스 캘브레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 삶의 작은 필수품들, 독서와 글쓰기는 모두 사치였다. 내가 글로 쓰는 순간도 모두 사치였다ㅏ. 그런데도 글쓰기 자체는 내게 필수로 느껴졌다. 필수와 사치를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이 단어와 씨름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사전을 찾아보니, 사치란 <대단히 안락하고 헤프게 생활하는 상태>라고 적혀 있었다. 어쩌면 내가 사치를 정의하는 데 애먹었던 것은 내가 대단히 안락한 상태로 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상태를 중산층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가 중산층이나 부유층을 묘사할 때 흔히 쓰는 완곡어법이 <안락하다>는 것이다. - 370

2026. apr.

#소유하기소유되기 #율라비스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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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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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된 이들이 기록하고 증언하는 내란에 대한 가정 세계.

그저 상상의 영역인 글일 뿐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지옥 같다.

가습기 피해자, 세월호 유족, 전장연, 구미 노동자, 이주 노동자, 성소수자 ...
온갖 소수성의 대표적인 그룹들이 설명 없는 무차별적 폭력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상상은 처참하다.
소외되는 수도 외의 지역성에 대해서도 언뜻 내비친다.

서늘하고 건조하게 서술되는 호러.

충격적이었고 비상식적이었던 그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독서라서 마음이 가볍지는 않았다.

- 연대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어디서나 달려왔다. 지회장이 먼 길을 달려온 동지들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사무실이 북적북적 해졌다. 회의가 전혀 다른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 58

-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좀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다. 기다릴 수 있었다. 함께 살아 있을 수만 있다면. - 61

- ' 선량한 일반 국민.' 단단은 그게 무슨 뜻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확히 그 표현에 딱 맞는 모습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방법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단단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평생 갈고닦아 몸에 익힌 생존의 기술이었다. - 74

- 단단은 특정 정당 국회의원들이 내란을 옹호하기 위해 표결을 거부한 날 집에 돌아가 자신이 가진 모든 색깔을 숨겼다. 그 색깔을 다시 꺼낼 날이 곧 올 것이라 믿었다. 혹시 모르니까, 만에 하나를 위해서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 77

- 독재자는 작은 독재자를 원하지 않는다. 선동가는 종교의 가면을 써서 권력에 빌붙고 독재자를 옹호하는 행위를 통해 세속 권력을 그러모았다. 계엄을 논하는 집회와 시위는 정치활동이다. 정치활동은 포고령에 의해 금지되었다. 종교지도자를 사칭하는 선동가를 따르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독재자의 관점에서는 위협이 될 뿐이었다. 집회와 시위를 무력화한 뒤 계엄군은 병원으로 향했다. - 89

- 저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 어떤 목숨을 빼앗았는지 알지도 못할 것이다.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을 것이다. - 107

- 죽은 사람들이 계엄군의 등에, 어깨에, 머리에 올라탔다. 자신이 죽은 몸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계엄군의 허리에, 무릎에, 다리에 매달리기도 했다. 죽은 자들이 일어섰다. - 139

- 미래가 없는, 혹은 미래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황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 작가의 말 중

2026. mar.

#처단 #정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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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민음의 시 337
김이듬 지음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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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로 오해할 수 있었지만
체념과 처연함이 담긴 세상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

그게 몹시 쓸쓸하다.
그래도 어느 덧 봄이 되어 있다.

- 오래도록 어둡고
우울한 음악을 들었다
그러다 거대한 불에 휩쓸렸다
올해
봄날은 잿더미
암흑세계였다
생체발광할 수 있다면
차가운 빛을 만들 텐데
더듬어 시를 켰다
절벽이 보였다 - 자서

- 나는 약이라고 부르고 시계방 주인들은 알 혹은 배터리라고 부르는 이 작고 둥근 것을 매만진다 다 닳은 세계를 손바닥에 놓고 본다

다 소모된 것과 사라진 것의 차이는 뭘까
모두 끝났다고 말해도 될까
이 세상에 원래 없었던 것 같은
그것을 찾아 나는 어딜 이토록 떠도는 것인지 - 이 세상에 없는 것 중

- 처음 듣는 음악처럼 귀에 들어온다
네가 올 거니까
새벽은 더 이상 푸른 절벽이 아니고
밤은 더 이상 미완의 종말이 아니다 - 에튀드 중

- 순식간
가벽 너머에서 만발한
꽃향기가 넘쳐 왔다

세상의 모든 꽃이 일제히
내 감은 눈앞에서 피어났다

쉽게 만족하는 나한테서
시무룩하게 너는 뒤처져 걸었다 - 봄, 비, 공원 중

- 나한텐 그림이 전부야
세상이 어두워서 어두운 그림만 그렸는데
이젠 그림이라도 밝게 그리기로 했어 - 현기증 중

- 거머쥔 것이 태도를 형성한다 - 귤 따기 체험 중

- <쪽에서 쪽빛을 얻기까지>

세상이 꽃밭이라면 나는 꿀벌이 아니라 말벌이었겠지.

다행히 네가 사랑하는 세상이 풀덤불 가시투성이라서, 나는 두 발로 뛰어다니네.

너는 수수만년 혹독한 밤을 지난 것 같아. 그래서 즐거운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사람, 내가 근처에 왔다가 들렀다고 말하면 믿어 주는 친구.

쪽풀을 뜯는 네 뒷모습 보다가 나는 항아리를 씻네. 네가 푸르죽죽하게 쪽물 밴 손바닥을 내밀며 어서 가라고 말하기 전에 내 손바닥 펼쳐 잿물을 젓네.

이렇게까지 번거롭게 색깔을 만들어야 할까, 촌스럽게 유행에 너무 뒤떨어지는 거 아냐? 이렇게 쏘아붙이지 않을 만큼 내 감정이 간결해진 걸까.

물감 이전에 천연염료가 있었다고, 항아리 이전에 흙이 있었다고 네가 말하는 소리가 좋아서 나는 속뜻 같은 건 신경 쓰지 않기로.

네가 내 삶을 구하러 온 친구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있는 그대로 네 빛깔이 좋아.

친구는 나를 툭툭 치며 마구 구겨지고 더러웠던 내 마음을 밟는다. 커다란 대야에 넣어 밟아 빠는 흰 광목천처럼 나는 너의 색깔을 담을 준비가 되었다.

- 어금니가 한 개 없고 잇몸도 나쁘다
나는 혼자 충분히 늙었다
이렇게 살다가 고독사할 게 자명해
탄식을 주워섬기는 너는 내 안의 방랑자
우리는 불화한다 - 나의 이방인 2

- 지금이 가장 불행한 시절일 것도 같은데
남은 날들이 별로 길 것 같지 않은데

슬픈 농담인지
고맙다
행복하다고 한다

살아남은 목숨들은
생에 깊이 사무친다

속절없이
사랑한다 - 초봄 대피소 중

- 눈을 깜박하는 사이 오십 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 슬픔이 전부일까 두 사람은 우물거리며 내게 길을 보여주었다 나는 따라가지 않았다 - 재에 몸을 묻고 중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미움이 없어 분노가 없어 관심과 눈치도 없이 봄이 지나갔다 지나고 보니 봄이었다 - 아무도 미워하지 않고 한 계절이 지나갔다 중


2026. mar.

#아무도미워하지않고한계절이지나갔다 #김이듬 #민음사 #민음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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