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비발~* > 천공의 성 라퓨타~*^^*



Castle in the sky-Opening theme
출처:http://www.aniju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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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잘 먹고 잘 놀고 잘 지내는 소현이와 민수. 건강하게 자라거래이.^^^^

 

 

 

 

 

 

 

 

 

 

 

 

 

 

 

 

 

 

 

 

 

 

장화신고 공을 차야 멋지게 차지지.ㅋㅋㅋㅋ

 

 


 

 

 

 

 

 

 

 

 


 

 

 

 

 

 

 

 

 

 

 

 


 

 

 

 

 

 

 

 

 

 

 

 

 

 

 

 

 

 

 

 

 

사진을 찍으면 이젠 개폼을 다 잡는 민뚜.ㅋㅋㅋㅋ




 

 

 

 













 

 

 

작년에는 민수 잘 때 봉숭아 물도 들여 주었는데. 올해는 좀 컸다고 뇨자들이 하는거라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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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정에 가도 오기가 바빠서 (사실 핑계다) 몇 년동안 엄마 무덤 한 번 안 찾아 갔었다. 자고로 조상을 잘 섬기라고 했는데 이 불효를 어찌할꾜.
 일요일. 밤 줍는 것도 귀찮아서 포기하고 음력 8월1일 엄마의 생신이었는데 한 번 가 보지도 못해서 나서 보기로 했다. 고속도로를 달려서 1시간30분만에 도착한 진영.(명절에는 6시간 걸린다)
읍으로 갈려고 하다가 갑자기 핸들을 돌렸다. 엄마 산소에 먼저 들렀다가 집으로 가자고 하면서 말이다. 사실 집에 가서 엄마 산소에 간다고 하면 괜히 엄마한테 미안해서 그동안 산소도 빼먹었다. 내 18번이 "마 귀찮구로 뭐하러 가! 잠이나 잘란다" 였다.
잠시후 동네 삼거리에서 막걸리와 엄마가 좋아하는 사이다 한 병 사고 종이 컵 2개 넣고 산으로 갔다.

그런데 "옴마나" 도대체 이놈의 동네가 왜이렇게 변했담. 가는 길마다 대통령 생가 팻말은 서너군데 붙어 있는데 울 엄마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는 도대체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상에 일 년 안 와 봤다고 요로코롬 변하는 동네는 살다살다 처음이었다. 내가 진주에 살은지가 10년인디 내 주위에 큰 길은 안 변했는데 이렇게 몽땅스리 변했다니.........소현아빠와 나는 정말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대통냥이 나온 땅덩어리는 금덩어리였는감...가는 곳마다 공장이 들어서고 아파트가 들어서고 거리 곳곳에 외국인들이 눈에 띄고...........비슷한 곳을 찾아 올라도 가보고 싶더니만 입구는 온데 간데 없고 사방 팔방 공장이니.............겨우 비슷하다 싶어 올라 갔지만 울 엄마 맷등을 보이지도 않고............정말 우울했다. 메뚜기며 갈대숲을 헤치고 나가는 아이들은 신나서 난리를 쳤지만 말이다.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목이 빠지라고 기다리는 엄마 아빠를 뒤로 한 채 산소에 갔다는 소리는 안하고 밥 실컷 먹고  놀고 있다가 어렵사리 "아빠 산소 벌초는 했는교" 하니 엄마랑 같이 했다고 한다. 얼마나 풀이 많았던지 엄마랑 몇시간이나 했다고 하면서 그때부터 산 올라가는 입구를 못찾아서 모험한 이야기를 하셨다. 옆에서 엄마도 우짜면 그렇게 순식간에 갈아 엎어 놓았는지 하시면서 엉뚱한 입구로 가다가 생고생을 한 이야기를 하셨다. 잘 됐다 싶어 간 만에 한 번 가보자고 했다. 슬그머니 말을 꺼내 놓고도 커피마시고 과일먹고 TV보고 소현이랑 앨범을 보는데 착한 옆탱이가 눈치도 빠르게 흐흐흐. "거 갈라고 하면 빨리 갈 것이지." 하면서 호통을 친다. "어 알았다" 하면서 우루루 몇 년 만에 찾은 엄마 맷등이었다.

아버지와 엄마가 안내를 하고 도착을 했는데 거의 1시간이나 헤맨 우리는 세상에나 영 반대쪽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혹시나 "엄마 아까 왔잖아요" 할까봐서 신경이 쓰였는데 그저 메뚜기 잡는다고 정신이 없었다. 귀여운 것들...........민수가 얼마나 잘 올라 가든지. 여자 셋은 남자 셋을 보고 좀 천천히 가라고 가라고 해도 내빼고 없고..............

엄마한테 절을 하였다. 민수도 절하고. 소현이도 절하고. 엄마와 아빠는 저 멀리 산을 바라보며 무덤을 잘 썼니 명당자리니 하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시고.............

"엄마 나 왔어. 알콩같은 새끼 데리고 요렇게 왔어. 자주 못 와서 미안혀. " 갑자기 가슴이 복받혔다. 그러나 세월이 세월인지라 훨훨 털어버리기로 결심한 지라 전에처럼 눈물도 안 나왔다.

막걸리 한 잔을 먹는 아빠한테 " 죽으면 어디 누울라요"하니 아버진 화장을 시켜 달란다. 이 무덤도 죽고 나면 누가 돌봐 주겠나? 하시면서 말이다. "잘 생각했수. 저렇게 누워서 겁도 나는데 그냥 뼈가루 내어서 내 강물에 훨훨 뿌려 줄게요" 하니 소현애비가 참말로 말도 예쁘게 한다고 눈을 째려본다. 흐흐흐흐

산을 내려오면서 엄마랑 손을 꼭 잡고 왔다. "엄마!  아빠가 느지막하게 복이 있어서 엄마 같은 사람 만나서 저렇게 잘 살지" 하면서 말이다. 엄마도 25살 때 얼라 못 낳은다고 소박맞고 혼자 살다가 이제서야 요런 것이 사는 낙이구나 느낀다면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다. 난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지 애미 맷등하나 못 찾는 년이 또 다른 애미의 손이 더 따뜻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나 보다.

울 아부지 마지막 남은 인생 또 다른 사랑이 저렇게 돌봐주니 흙속에 파 묻힌 엄마가 울 아빠를 정말 죽도록 사랑했는가 보다.

비가 칠흙같이 오니  그날과 똑 같은 그 비를 보면서 오래간만에 한 자 적어 본다.




 

 

 

 


 

 

 

 

 

 

 

 

 

 

 


 

 

 

 

 

 

 

 

 

 

 

휴대폰을 처음 갖게 된 할아버지. 음악도 저장해 주고 엄마 휴대폰도 입력해 주는 소현이. "할아버지 이 음악 하세요" 하면서 손녀가 골라준 음악에 감격한 아부지.흐흐흐흐 

엄마왈 "이젠 아빠하고 숨박꼭질 안혀도 되것네^^^^"

 

 




 

 

 

 

 

 

 

 

 

 이제는 "만희네 집"에 나오는 내 고향집은 이사한지 일 년사이에 공장이 들어 서 있고. 오빠와 미꾸라지 잡으면서 게헤엄치던 논 두렁은 아파트가 들어 서 있더라. 차로 나오면서 안 동네 한 바뀌 돌고 오자는 나의 소원에 흥쾌히 응하시던 아빠는 내 마음을 아시는지 세월이 지나면 다 변하는 거여 한마디 하시고 난 소현이와 민수에게  유일하게 남은 고목을 보면서 저기 저 나무에 옛날에 엄마 알던 사람이 목 매달아 죽었는데 밤이면 엄마가 겁이 나서 저길 못 지나다녔다는 둥. 아직 파 헤쳐 지지 않은 둑을 보면서 공부하고 밤에 저 둑을 지나올때 황소개구리 소리땜에 달리기를 하고 왔다느니둥 주절 주절 ...쓰잘데 없는 이야기만 늘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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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sooninara > [퍼온글] 태정태세 문단세

중학교 시절 역사선생님은 일명 [ 민족주체성확립봉 ] 이라 불리는 흉기를 들고 다녔다. 당구대에 쇠줄을 감아서 만든 몽둥이였는데 지각을 하거나 시험문제 틀리면 거꾸로 물구나무를 선 채로  허벅지를 얻어터지곤 했다.  별명도 민족주체성이었다.

이 선생님의 역사 수업은 좀 독특해서 ( 아마 다른 학교도 그렇게 했을것 같다 ) 거의 모든 역사적 사실을 노래와 결부시켜 암기시키곤 했다. 우리는 항상 역사수업 시작하기 전에 노래를 불렀다. 그 당시 반장이었던 나는 문에서 망을 보다가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이면 신호를 보냈고 나의 신호에 맞추어 학생들은 구석기부터 조선말까지에서 한두곡 정도를 선택해 노래를 불러제꼈다. 수업시작전 노래를 부르고 있지 않으며 쪽지 시험을 본후 한차례의 푸닥거리가 있었기에 노래외에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그런 수업방식의 영향인지 촌구석인 우리 학교의 모의고사 역사점수는 항상 강원도 일등이었다.

기억이란 참으로 묘하다. 특히 연상작용에 의한 기억은 오랜 망각의 세월을 뛰어넘어 무의식중에 찾아온다.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 엄마가 섬그늘에~ ] 하는 노래가 들리면 의식 저편에서 [ 상원군 검은모루 ~ ] 로 시작하는 구석기 시대 유적이 같이 떠오른다. [ 나리 나리 개나리~ ] 하면 [ 태정태세 문단세 ~ ] 로 시작하는 조선시대 왕들이 떠오른다.

지금도 생각나는 몇가지를 적어본다.

1. 구석기 시대 유적 : [ 엄마가 섬그늘에~ ] 로 시작하는 [ 섬집아기 ]

상원군 검은모루 웅기 굴포리
단양군 수양개 공주 석장리
청원군 두루봉동굴 제주 빌레못
연천군 전곡리도 유적지라네.

2. 고려시대 왕 : [ 뜸북 뜸북 뜸북새 ~ ] 로 시작하는 [ 오빠생각 ]

태혜정광 경성목 현덕정문순
선헌숙예 인의명신 희강고원종
충렬충선 충숙충혜 충렬충정공민
우왕창왕 마지막왕 공양왕이라네.

3. 조선시대 왕 : [ 나리 나리 개나리~ ] 로 시작하는 [ 개나리 ]

태정태세 문단세 예성연중 인명선
광인효현 숙경영 정순헌철 고순종

4. 조선말기 역사사건 : [ 봄이 오면 산에 들에 ~ ] 로 시작하는 [ 봄이 오면 ]

1876 강화도 조약 불평등 조약
1882 임오군란 제물포 조약
1884 갑신정변 한성 텐진 조약
1885 거문도 사건 러시아 영국

그외에도 꽤나 많은 노래가 있었는데 다른 것은 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 민족주체성확립봉] 으로 맞아야 기억날까 싶다. 위에서 적은 것중 왕들의 계보중 일부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지금 기억이 나지 않는것중 가장 아쉬운 것은 [ 독도는 우리땅 ] 으로 사절까지 만든 조선시대 사상가들의 책 이름이다. 일부만이 생각난다. [ ~안정복 동사강목 한치윤 해동역사 유득공 발해고 이긍익 열려실기술] 로 한절이 끝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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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밥헬퍼 > 신영복의 글에서 읽는 지리산, 남명 조식, 거창고등학교


 

 

 

 

 

 

 

 

 

 

 

 

 

어느 서재에서 이 사진을 봤습니다. 지리산 제석봉의 설경이라는 제목이었는데 사진을 보다가  이 산에는 무엇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오후에 문득 신영복님의 '나무야 나무야(돌베개,1996 106-111쪽),'에서 읽은 글이 떠올라 다시 읽어봅니다.    (사진 stella09님 서재)

....................................................................

빼어남보다 장중함 사랑한 우리 정신사의 '지리산'
남명 조식을 찾아서

                                                                                                   신 영 복


금강산은 빼어나긴 하나 장중하지 못하고(秀而不莊)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莊而不秀)라고 합니다. 금강산은 그 수려한 봉우리들이 하늘에 빼어나 있되 장중한 무게가 없고, 반면에 지리산은 태산부동의 너른 품으로 대지를 안고 있되 빼어난 자태가
없어 아쉽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빼어나기도 하고 장중하기도 하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지만 산의 경우이든
사람의 경우이든 이 둘을 모두 갖추고 있기란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秀)와 장(莊)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을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 수(秀)보다는 장(莊)을 택하고 싶습니다. 장중함은 얼른 눈에 띄지도 않고 그것에서 오는 감동도 매우 더딘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의 '있음'이 크고 그 감동이 구원(久遠)하여 가히 '근본'을 경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해발 2천여 미터의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다 보이는 덕천강가에는 지리산만큼 무거워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대답이 없는(非大 無聲) 고고한 선비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산천재(山天齋)가 있습니다.
퇴계(退溪)와 더불어 영남유학의 쌍벽이었으되 일체의 벼슬을 마다하고 지리산 자락에 은둔하였던 남명은 한 시대의 빼어난 봉우리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정신사에서 그 위상이 차지하는 무게는 가히 지리산의 그것에 비길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퇴계가 "나의 명정에는 처사(處士)라고만 쓰라"는 유연을 남겼다는 말을 듣고 할 벼슬 모두 다 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야말로 나뿐이라는 말을 남겼을 만큼 그는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사(士)에 처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산천재는 남명이 생애 마지막 10년을 보낸 곳으로 지금은 강물을 돌려놓아서 둘레가 매우 삭막하지만 강가의 절벽 위에 서 있던 당시의 산천재와 이곳아 앉아 천왕봉을 마주하고 있었을 남명의 모습은 가히 지리산의 장중함을 연상케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어제 내린 비 뒤끝이 채 걷히지 않아 짙은 구름 때문에 마치 문을 열지않는 남명처럼 천왕봉을 볼 수가 없습니다. 산천재 정면 마루 의 벽면에는 소를 모는 농부와 냇물에 귀를 씻는 소부(巢父) 허유(許由)의 고사가 벽화로 남아 있고 주련(柱聯)에는 남명의 고고함을
전해주는 시구가 있습니다.
 
                     봄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천왕봉을 사랑하여 이곳에 있노라
                     春山底處無芳草 只愛天王近帝居

퇴계가 풍기군수로 있을 당시 그곳의 백운동서원에 어필을 받아 사액서원(賜額書院)의 효시를 열고 곳곳에 서원을 건립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명은 철저하게 선비의 재야정신(在野精神)을 고수하였습니다. 서원이 초기의 개혁적 성경을 잃고 결국 붕당의 후방기지가 되고 향촌사림의 출세의 거점이 되어 경향(京鄕)의 이해관계가 유착된 정치적 집단으로 전락해 가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명은 철저한 재야정신의 역사적 의의를 누구보다도 일찍이꿰뚫어 보고 이를 견고하게 지켜온 형안(炯眼의 소유자였다고 생각합니다. 

경(敬)과 의(義)를 근간으로 하는 학문의 대도(大道)는 그것만으로도 어떠한 현실정치보다 더 높은 차원
에서 더 오랜 생명력으로 사회를 지탱할 수 있고 또
지탱하여야 한다는 강한 믿음을 그는 갖고 있었습니다. 하늘에 높이 배어나지는 않되 흡사 산맥 속에 묻힌 숯처럼 역사의 동력을 갈무리하는 중후한 무게를 그는 재야라는 공간에서 이루어내었던 것입니다.
백성은 물이요 임금은 물 위의 배에 지나지 않는 것. 배는 모름지기 물의 이치를 알아야 하고 물을 두려워하여야 한다는 지론을 거침없이 갈파한 남명.

벼슬아치는 가죽 위에 돋는 철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의 가죽을 벗기는 탐관 오리들을 질타하였습니다.                                    <자료:논개>  

산천재 마루에 앉아서 지리산을 바라보고 있으면 장중한 지리산의 자태가 바로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민중적인 재야성(在野性) 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크게 두드리는 민족사의 고비에는 마치 지리산이 몸을 열고 걸어 나왔던 것처럼
남명의 제자들은 몸을 던져 그의(義)를 몸소 실천하였습니다. 재야의 요체는 한마디로
이러한 진퇴의 중후함이라 생각됩니다.
'오늘의 개량'에 매몰되는 급급함보다는 '내일의 건설'을 전망하는 유장함이 더 소중한
까닭은 오늘의 개량이 곧 내일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재야의 요체는 독립성이라 믿습니다. '오늘'로부터의 독립이라 믿습니다.
구름 속에 묻혀 있는 천왕봉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지리산의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습니다. 성장(成長)과 출사(出仕)의 급급함에 매달려 있는 우리의 오늘을
개탄하던 당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일러준 대로 돌아오는 길에 거창에 들러 거창고등학교를 찾았습니다.
시가지 변두리에 보잘것없는 교사가 울타리도 없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는 대안교육을 모색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자녀를 보내는 곳입니다.
휴일이라 인적도 없는 교정을 돌아보다가 강당의 벽면에서 다음과 같은 직업 선택의
십계(十戒)를 발견하였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한 시대의 빼어남을 지향하는 길을 가지 말고 장중한 역사의 산맥 속에서 익어가는
숯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기계의 부품이 되지 말고 싱싱한 한 그루 나무가
되기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결코 무너지는 일이 없는 지리산의 장중함이면서 동시에
남명의 철학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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