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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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어왔다. 무슨 의무 같은 것은 아니고, 그냥 최근에 발표되는 소설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이번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은 다 다르다. 그만큼 작품 하나하나가 저만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나 우리 삶을 표현하는데 작가의 주제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에 제일 선명하게 다가온 작품은 길란이 쓴 '추도'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 남의 생활을 엿보는 것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회. 한 가정에 닥친 비극이 아니라, 그러한 비극 속에서도 그들의 삶에 대한 동경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다양한 SNS를 통해서 남의 생활을 만나는 우리의 모습, 그런 남의 모습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생활을 보고 동경하는 모습. 그래서 이런 책 제목도 있지 않은가.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는.


여기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니까. 또 그러한 자본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면 되니까. 하지만 자신이 자본을 이용했다고, 또는 자본을 지닌 사람을 이용했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자본에게 또 자본을 쥔 자들에게 이용당함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소설들도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이번 소설집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들 소설이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


무언가 분명하게 말을 하지 않고 부연 안개 속을 헤치며 나아가는 느낌이 들게 한다는 것. 가령 서장원이 쓴 '히데오'를 보더라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라고 차별받던 히데오가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차별을 극복한다기보다는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그 속에서 또다른 자신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일본인 아버지를 두었다는 공공연한 비밀을, 나중에는 스스로 떠벌리고 (밝히고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히데오는 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점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자신이 살아가는 발판으로 삼으니, 떠벌린다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다니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를 바라보는 화자는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겉돌고 있다는 느낌. 이러한 겉돌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소설이 위수정이 쓴 '귀신이 없는 집'이다. 


귀신이 없는 집은 좋은 아닌가?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귀신이 없어서 망해버린 마을 이야기가 나온다. 귀신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는데, 그렇다면 귀신은 무엇인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하게 하는 존재, 즉 자신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게 하는 존재가 아닐까. 여기에 '크로스드레서'인 재원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의 또다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크로스드레서의 삶.


하지만 그것은 남 앞에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자신의 비밀. 이런 비밀을 아는 아내 상미. 상미도 없는 집, 적막만이 있는 집. 그런 재원에게 귀신은 무엇일까? 왜 그는 귀신이 없다고 했을까를 생각하는데...


어쩌면 귀신은 자신의 또다른 성향을 인정하는 존재 아닐까? 그런 존재가 없는 집에는 적막만이 있을 뿐이지 않을까 하는데...


그렇다고 명확하게 무엇이 귀신이다 말할 수가 없다. 마치 믿음과 광신을 구분하기 힘들듯이. 이렇게 이분법으로 저것은 광신이야, 이것은 믿음이야라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믿음과 광신은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믿음이 누군가에게는 광신이 될 수도 있음을 함윤이가 쓴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에서 만나게 된다.


이렇게 무어라 명확하게 정리할 수 없는 소설들. 그런 소설들이 이번 수상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상을 이것이다 저것이다고 딱 정리할 수 없음을, 그렇게 분명한 목표를 보지 못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의 삶이라는 것을 이번 수상작품집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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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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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사람은 듣고 싶은 소리만 듣는다더니, 아니 강대국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만 펼친다고 해야 할까?


'팔레스타인, 가자', 여전히 고통 받고 있는 땅. 이토록 집요하게 괴롭힐 수 있을까? 괴롭힘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절멸을 노리고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자신들도 '디아스포라'를 겪었으면서, 그런 이산의 고통을 겪었으면서도 팔레스타인에서 박해자로, 이산을 강제하는 존재로 군림하는 이스라엘을 보면...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는 테러범이기 때문에 처단해야 한다고, 가자에 있는 민간 시설을 폭격하고, 자신들에게 저항한다는 이유로 표적 살인을 저지르는 그들에게,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비판을 하는 나라도 있겠지. 그런데 잠시 뿐이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가자를 폭격한다. 봉쇄한다. 자신의 땅에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사람들. 가족들끼리도 왕래하기 힘든 사람들. 가자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비극, 우리나라에도 이젠 제법 그들의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 우리 곁에 팔레스타인 문학이 다가오고 있는 것. 


이 소설집, 가산 카나파니의 소설에 나오는 내용,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라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


"왜 당신들은 물탱크의 측면을 노크하지 않았지? 왜 물탱크의 옆구리를 쾅쾅 치지 않았던 거야? 왜? 왜? 왜?"(124쪽)


쿠웨이트로 밀입국을 하기 위해 트럭 물탱크에 들어간 세 사람. 지금 우리나라도 푹푹 찌는 날씨인데, 사막에서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밀폐된 물탱크. 그야말로 비유적 의미로 찜통이 아니라 사실적 의미로 찜통이었을 것이다.


밀입국을 시켜주는 브로커도 그 점을 알고 있다. 그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성불능이 된 사람. 하여 그는 7분만 참으라고 한다. 그 정도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두 번의 검문. 


한 번은 7분만에 통과한다. 찜통 속 사람들은 기진맥진한다. 밀입국. 살기 위해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것. 지구에는 국경이 없지만 나라끼리는 임의적으로 국경을 만들어낸다.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갈 수가 없다. 특히 약한 나라 없는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니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이런 방법밖에 없다. 그동안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을 테고... 이들을 물탱크(물은 없다. 그러니 그 물통 안이 얼마나 덥고 산소가 없을지는 상상할 수 있다)에 들어가라고 하는 '아불 카이주란'을 미심쩍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게다가 첫 번째는 성공했지 않은가.


두 번째 관문. 변수가 생긴다. 이리저리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관리가 나온다. 시간은 흘러간다. 아불 카이주란은 초조해진다. 빨리 해결하려 하지만 뜻대로 안 된다. 7분이 지나고 또 지나고, 또 7분이 지난다. 


이들이 견딜 수 있는 시간의 세 배가 흘러간다. 황급히 차를 몰고 물탱크를 열어보는 카이주란. 아, 결국 그들은 살아남지 못한다. 살기 위해서 밀입국을 하려 했으나 그들은 죽어서 밀입국을 하게 된다. 이런 밀입국자들, 뉴스에서 많이 보아왔다. 


세계는 가자뿐이 아니라 도처에서 이런 비극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데도 세계는 침묵하고 있다. 충분히 함께 살 수 있는 나라들임에도, 자신들의 몫에서 조금만 떼어도 되는데, 안 한다. 모르쇠로 일관한다.


오히려 그들이 밀입국을 하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는다. 어쩌다 성공한 사람이 있어도 다시 추방하기도 한다. 그러니 밀입국을 하려는 사람들,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 또한 밀입국을 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사는 사람이라도 카이주란처럼 불임의 존재가 된다.


그들은 세대를 영속시킬 수 없다. 강제로 세대를 단절당했음을 이 카이주란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집 첫소설은 가자의 비극을 밀입국을 하려는 세 사람과 이들을 밀입국시키려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보여준다. (여기서 브로커 역할을 하는 카이주란은 동포애보다는 돈이 더 목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도 팔레스타인 사람이라는 동포애는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에서는 왜 쾅쾅 치지 않았느냐고 절규하지만, 아니다. 이들은 쾅쾅 치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다. 그런 소리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오랜 시간 방음벽을 치고, 귀를 닫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다. 반복되고 있는데도 여전히 귀를 닫고 있다. 그들은 계속 소리치고 있는데도. 하여 소설의 결말을 다시 읽어야 한다.


"왜 그들이 그렇게 외치고, 쾅 쾅 치고 있는데도, 할 수 있는 사람들, 할 수 있는 나라들은 듣지 않고 침묵하고 있는가? 왜 대답하지 않는가? 왜 이토록 오래 모른 체하고 있는가?"라고.


첫소설말고도 가자의 비극을 보여주는 소설로는 '슬픈 오렌지의 땅, 움 사아드, 가자에서 온 편지'가 있다.


'가자에서 온 편지'에서 주인공은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자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한다. 마치 작가의 인생을 보여주는 듯한 구절인데.


"나는 이곳에 머물면서 결코 떠나지 않을 거야.(210쪽) ...... 내 친구여, 돌아오게나! 우리 모두는 자네를 기다리고 있다네.(219쪽)"


이때 자네는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난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이 아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사람들이다. 그렇다. 이들은 결코 소리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소리치고 있다. 그 소리를 단지 우리가 듣지 않고 있었을 뿐.


이제는 세계가 그러한 외침에 응답해야 한다. 그래, 우리 그 소리 들었다고. 당신들의 닫힌 문 열어주겠다고.


최근에 읽은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만큼 울림을 주는 소설이다. 아마 그 책을 읽고 이 소설을 읽으면 더 마음에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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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숲은 어디로 갔을까
김덕일 지음 / 상상창작소 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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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자연의 경계. 서로가 서로를 넘나들면서도 어느 정도는 서로의 경계를 인정해주어야 하는 관계.


하지만 인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자연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느 종의 번식이 왕성해지면 한정된 지구라는 공간에서 다른 종의 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공간의 줄어듦. 줄어들어도 생존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이 줄고 줄어 결국에는 생존에도 문제가 된다면, 그때는 한 종의 생존만이 문제가 아니라 많은 종들의 생존에 문제가 된다.


이렇게 다른 종들의 영역을 침범하는 종. 인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예전 왕들은 백성들의 안전과 생활을 위해서 자신이 일을 해야만 한다고 했는데, 적어도 말만이라도 그렇게 했는데, 또한 완전히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시늉을 내서, 백성들의 삶이 완전히 피폐해지게 하지는 않았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다른 종을 멸종에 이르게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인류세라는 말이 굳어지지 않도록, 지속가능이라는 말이 정말로 지속가능하도록 해야 하는데, 여전히 인간은 성장 신화에 갇혀 있다.


성장, 성장이 안 되면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는 듯이, 해마다 성장해야 한다. 그렇게 성장하는데 문제는 지구가 유한하다는 것. 즉 정해진 공간에서 인간이라는 종이 계속 성장한다면 다른 종들이 살아갈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심지어는 사라지고 만다는 것.


그 중 하나가 바로 '숲'이다. 숲을 없애고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작업들이 지속되어 왔다. 우리나라 역시 산림이 전체 면적의 70%를 차지한다고 했었는데, 과연 그런가.


여전히 우리나라는 숲이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계속 줄어들고 있다. 줄어들어서 인간의 경작지로 변하든지, 주거지로 변하든지, 그도 아니면 인간의 관광지로 변하고 있다. 


그 변한 곳에서 살아가던 종들은 쫓겨날 수밖에 없고, 숲도 제 기능을 많이 잃어간다. 그런 변화, 그것을 사진으로 담은 작가, 그가 바로 김덕일이다.


자신이 살던 곳에서 5년 동안 그곳의 풍경을 사진으로 찍었는데, 논과 밭과 그곳에 있는 무덤, 그리고 숲의 사진이다.


이들이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함께 공존하는 모습이기도 하지만, 점점 그러한 공존에서 인간의 영역은 넓어지고, 자연의 영역은 좁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공중에서 찍은 사진들. 사진으로 보고 멋있다 할 수 있겠지만, 점점 줄어드는 숲을 보면서, 또 숲을 파헤치고 파괴하는 인간들의 행위를 보면서 마냥 멋있다고는 할 수 없다.



밭과 숲, 그 사이에 있는 무덤은 자연과 공생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사진처럼 숲의 한 가운데를 파괴한다면 과연 이것이 공생일까?


인간이 살기 위해서 자연을 어느 정도는 침해할 수는 있지만, 자연이 회복불능의 상태로 되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지경까지 가면 인간도 살기 힘들어진다.


이 사진집을 보면 마냥 멋있다고만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영역이 이처럼 자연의 영역을 계속 잠식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인간과 자연의 경계, 공생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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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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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탱크 속에서 쾅 쾅 치고 있는데도 오히려 방음벽을 쌓고 있지 않은가? 지금 세계는. 가자의 비명 소리, 이 소설을 통해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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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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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단지, 야자 중 ××금지, 낭인전, 풀각시, 교우촌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괴력난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괴력난신, 어렵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나, 그냥 귀신 이야기라고 하면 될 것을.

 

불가사의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때 우리는 이를 귀신의 소행인가 한다. 귀신, 괴력난신.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존재. 아니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

 

현실의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이기에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결하기도 한다. 아니, 현실에 좌절했을 때 우리는 다른 존재를 불러낸다. 도저히 내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존재의 힘을 빌리려는 마음.

 

그러한 마음들이 귀신을 불러낸다고 보면, 이 소설에 나오는 귀신 또는 귀신과 비슷한 존재들은 모두 현실의 부조리를 해결하기 위한 한 방편이 된다.

 

성주단지에서 주인공은 저는 귀도 보고 신도 보았던 거예요’(42)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또는 알 수 없는 존재도 소중히 여기고 마음을 다해주는 사람에게 귀신의 해코지가 닿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때 귀신은 누굴까? 교제 폭력(데이트 폭력이라고 하는 말을 더 많이 쓰나?)을 행사하는 사람은 주로 남성이다. 단지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끝없는 괴롭힘을 당하는 여성들이 많다.

 

이런 여성들에게 교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은 귀()라고 할 수 있다. 귀신이다. ‘이라는 말을 붙이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 누가 이 귀를 막아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막아주는가?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이 알지 못하는 존재의 도움을 이끈 것은 바로 주인공의 행위다. 그러니 결국은 자신의 의지, 행동이 귀신을 물리쳤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주체성, 능동적 대응이 나머지 소설들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문을 열 수 없을 때 그 앞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문을 부수고 나오는 주인공. 이는 자신의 한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 그 한계를 남들이 깨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한계를 넘어서는 주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 닫혀 있으면 열어야 하는데, 열쇠가 없다면 문을 부수면 된다. 그렇게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자신들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동을 다른 존재도 보았기를... 문을 여는 방법이 하나만이 아님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 세 사람의 마지막도 지켜보지 않았을까? 목검으로 문을 부숴버리던 모습을? 정말로 그러했다면, 아영은 소녀도 같은 방법을 쓰기를, 그곳에서 나오기를 바랐다.’(113)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 소녀는 아영과 친구들이 다른 세계에서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준다. 자신도 그쪽 세계로 넘어와 갇혀 있었으므로... 상대의 어려움을 알기에 힘이 되어주고자 했던 존재이기에, 아영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행동으로 그 소녀 역시 어려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이런 연대 의식, 약자들의 연대 의식이 드러나는 소설이 풀각시. 화려한 영화 뒤에 감춰진 다른 존재들의 고통. 그렇게 고통을 약한 존재에게 전가함으로써 자신들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존재들.

 

하지만 약자들은 그렇지 않다. 이들은 서로 연대한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이 고통받더라도 상대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행위를 한다.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더욱. 이런 연대를 통해서 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에서 구하게 된다.

 

살을 날린다는 것은 그 살을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의 팔을 자를 때는 당연히 내 몸도 잘릴 것을 각오해야지요. 같은 팔이 잘리지는 않더라도 어딘가는 잘리기 마련입니다.’(229)라는 말.

 

이렇게 자신이 아플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행위. 이것이 바로 연대다. 상대의 고통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기에. 이러한 연대를 통해 고통은 잊힐 수가 없다. 잊히지 않기에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할 수가 없다. 그래, 꼭 당사자이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의 모습이 김이삭의 이 소설집을 통해 형상화되고 있다.

 

낭인전도 마찬가지다. 변강쇠전을 비튼 소설인데, 옹녀가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렇다. 늑대인간이든 유랑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그 사회에서 밀려난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열심히 살려고 해도 사회가 그들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그들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는 오래갈 수가 없다. 이는 교우촌이라는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던 조선 후기. 그 사회에서 천주교 신자로 살아가려는 사람들. 그들을 괴물 취급하는 사람들.

 

하지만 다름으로 괴물을 만들어내면 그 괴물에 먹히는 것은 결국 자신들일 수밖에 없음을 소설은 천주께서 저희 마을을 정말 가련히 여기시나 봅니다. 특히 굶주리는 아버지를요.’(276)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다른 존재를 괴물로 취급하고 밀어내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괴물임을, 따라서 자신 역시 파멸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서 여성들은 그러한 점을 잘 안다.

 

하여 여성들은 내 안의 괴물을 키우지 않는다. 남들이 괴물이라고 여기는 존재가 괴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괴물을 만들어낸 사회에 저항한다. 홀로 또 함께...

 

이렇게 이 소설집은 괴물을 만들어내는, 즉 괴력난신이든 귀신이든, 그러한 존재들을 만들어내는 존재는 사회에서 권력을 쥔, 남들의 고통 위에서 자신의 영화를 좇는 이들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약자들이 연대를 통해서 또 자각을 통해서 괴력난신에서 벗어나 삶의 당당한 주체가 됨을 보여준다.

 

주체로 서는 여성들의 모습. 이 소설집을 통해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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