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킬 제너레이션 - AI 시대, 생존을 위한 언어력 수업
김재인 지음 / 오리지널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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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보라. 믿을 수 있겠는가? 혹시 가짜 뉴스 아니냐고?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겠다. 우리나라는 문맹률이 거의 0에 가까운 나라니까. 하지만 문맹률과 문해율을 구분해야 한다. 단지 글자를 읽을 줄 안다는 것과 글자를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니까.


'2024년 12월 10일자 <<이코노미스트>>는 '성인이 읽는 법을 잊어가고 있나?'라는 기사에서 OECD의 2023년 조사 결과를 소개합니다. 조사는 언어력, 수리력, 응용문제 해결력 등 세 가지 능력에 대해 이루어졌습니다. 그중 언어력에 관련해서 충격적인 내용은, 28%의 한국 성인의 언어력이 10세 아이 수준에 못 미친다는 것입니다. (OECD 평균은 25%), 반면 고급 수준의 성인은 7%에 불과했습니다.(OECD 평균은 14%)' (23쪽)


이런 상태라면 저자의 말처럼 탈숙련 세대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책 제목인 '디스킬 제너레이션 The Deskill Generation'은 이렇게 인간이 지닌 기본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는 읽기 능력이 퇴화된 세대를 의미한다.


왜 읽기 능력이 퇴화되었을까? 아니 퇴화가 아니라 10세 수준에서 더 이상의 발달을 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는데, 인공지능과 같은, 또는 스마트폰을 공기처럼 여기는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10세 수준이 아니라 더 낮은 연령 대로 낮추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그냥 입력만 하면 출력이 되니까. 너무도 편하게 결과물을 얻을 수 있으니 굳이 힘들게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과제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된다. 그러면 빠른 시간 안에 과제를 해결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


이때 자신이 원하는 일이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일들이었으면 좋겠지만, 원하는 일 또한 생각을 하지 않는, 힘들지 않고 쉽고 빠르게 할 수 있는 일들이 태반이니 더욱 생각할 틈이 없다.


이러니 점점 생각을 하지 않게 되고, 어려운 글을 읽으려 하지 않으니 언어력이 떨어질 수밖에. 저자는 언어력을 단순한 어휘 구사와 이해 능력으로 국한시키지 않는다. 언어력에는 수학, 과학, 철학 등이 포함된다.


즉 언어력은 글자를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세상을 이해하는 능력인 것이다. 이 언어력은 그래서 소통력, 협업력으로 나아가게 된다. 우리가 흔히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말 그대로 언어력과 소통력, 협업력은 우리가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그러한 요소를 인공지능에게만 맡길 수 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인공지능에게 맡기면 언어력이나 소통력, 협업력이 길러질까? 아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인간의 언어력, 소통력, 협업력은 점점 줄어들고, 인공지능의 능력은 나날이 발전해 갈 테니, 그 결과는 우리가 우려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인공지능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의해 우리의 능력을 보강해주는 존재로 인공지능을 활용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


이 능력 키움이 그냥 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렵고 지겹고 괴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식을 암기하기도 해야 한다. 무언가 자신이 알고 있어야 검증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신이 모르면서 인공지능에게 의존하다 보면 어느새 인공지능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 성인들의 읽기 능력이 떨어진 것도 딱히 인공지능 탓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인공지능 전에 나온 온갖 스마트 기기들이 원인을 제공했을 수는 있다.


그래서 스마트 기기를 어린 시절에는 규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단지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전적으로 스마트 기기 또는 인공지능에 의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결국 우리 인간이 생각의 근육을 키워야 하는데, 그런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것이 인공지능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읽기, 쓰기, 말하기, 듣기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 저자는 언어력을 기르는 법으로 세 단계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독해력, 소통력, 협업력'을 키우는 단계다. 읽고 이해하고 상대와 소통을 하면서 함께 무언가를 이루어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사회 생활이고, 이것을 이루는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언어이니, 언어력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사회에 잘 적응해서 살아가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공지능에만 의존하지 말고... 인공지능이 지니고 있지 못한(적어도 현재까지는) 것이 바로 '취향'이라고 한다. 즉 취향은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중요한 것을 고르는 내적 일관성 coherence'(212쪽)이라고 한다. 이러한 취향은 '노이즈 속에서 특별한 신호를 식별해내는 능력'(212쪽)이니, 인간이 이러한 '취향 지능'을 지니게 된다면 인공지능 시대에 길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자, 이 책을 읽어보자. 앞으로 인공지능 시대가 될 것이니 힘들게 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사람, 생각을 바꾸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 공부를 해야 한다.


내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인공지능은 내 능력을 더 강화시켜 줄 것이지만 내가 알지 못하고 있으면 나는 인공지능에게 의존하는 종속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점을 저자는 책을 통해 강조하고 있으니...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우리 생각의 근육을 키우자. 기본적인 지식은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도록 머리 속에 집어넣자. 적어도 기본적인 지식은 내면화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인공지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내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저자의 주장이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언어력(소통력, 협업력)을 키워야 한다. 이런 언어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이 책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으니,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언어력이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필수적이라는 사실, 이 점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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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
패티 스미스 지음, 정혜윤 옮김 / 아트북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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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가수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없으니 기껏 아는 가수라고 해야 '마이클 잭슨, 밥 딜런' 정도였다고 할까. 이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사람을 알고 있지만 거기서 거기다. 그들 음악 중에 밥 딜런의 음악 말고는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는 노래가 없으니...


그런데 어떤 책이 좋을까 검색을 하다가 순간 이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드레스를 입고 있는 사람의 모습. 책 제목이 '패티'다. 그렇담 이 사람이 패티겠군. 패티하면 우리나라 가수 '패티 김'이 떠오르는데,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표지 사진이 독특해서, 이 사람의 세계 역시 단순하지 않겠구나, 한번 읽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첫장을 넘기니 노래 부르는 사진과 그 옆 장에 '장애물이 우리의 날개다'라는 니콜라이 고골의 문장이 나온다. 


장애물, 그렇다.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장애물을 넘어 나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대부분 장애물을 넘어서 나아간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름을 남긴다. 그냥 평탄한 삶을 산 사람이 아니라.


책의 시작이 이러니, 패티란 가수, 분명히 많은 고난을 겪었으리라.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음악활동을 했는지 이 책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


시작하자마자 순식간에 읽게 된다. 중간에 끊기 싫어진다. 와, 이 사람, 이런 과정을 거쳐서 자신의 자리를 잡았구나, 단순히 노래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쪽으로 바꾸려고 노력했구나.


그런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 또 자신의 음악을 지키기 위해서 포기해야 했던 것들. 또한 삶을 위해 노래를 포기해야 했던 순간, 다시 노래로 돌아오는 과정이 이 책에서 펼쳐진다.


패티 스미스라는 가수의 일생이 책에 담겨 있다고 보면 된다. 출생에서 최근의 모습까지. 한 사건 사건이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진술되기보다는, 전 생애를 담고 있기에 스치듯 지나가는, 회고조의 내용인데도 읽기에 몰입이 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통해서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 그리고 자신을 끝까지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동생들과의 관계. 남편과의 만남과 사별. 다른 음악가들과의 만남과 활동들... 이들 중에 내가 아는 이름도 꽤 나온다. 특히 밥 딜런과의 인연... 패티 스미스는 밥 딜런과의 만남을 이렇게 쓰고 있다.


'밥 딜런은 여전히 내 마음속 롤모델이었고, 내가 그보다 더 동질감을 느낀 사람은 없었다'(127쪽)고. 나중에 밥 딜런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고 하니... 내가 모르고 있었지 음악을 좀 안다고 하는 사람에게 패티 스미스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냥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구나. 이런 가수가 있었구나. 자신의 음악 세계를,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꾸준히 일해왔던 사람이 바로 패티 스미스구나 하는 생각. 이런 활동들로 인해 패티 스미스는 2007년 로큰롤 명예의전당에 헌액되었다고 하니 음악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다.


게다가 글과 한시도 멀어지지 않았던 사람, 자신의 고민이 있었을 때 또 삶 내내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남긴 사람. 그러니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책으로도 펴낼 수 있었으리라.


젊은시절, 한참 반항의 혹이 왕성할 때 패티는 자신의 방에 이런 글귀를 적어놓았다고 한다. 


'우리는 예술/쥐들이다. 불결한 개새끼들이고, 우리가 탕진하는 말들이다'(124쪽)


이런 자세로 누구에게 끌려가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간 사람. 이런 패티에게 장애물은 자신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40이 넘어서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는 비극, 자신들이 아무리 외쳐도 전쟁이 끝나지 않는 상황에서 좌절도 한다. 그럼에도 해야할 일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이 책의 처음에 나온 '장애물이 우리의 날개다'라는 말을 평생 실천하면서 살아왔던 패티 스미스를 대변하는 말이다.


자신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패티는 '반항의 혹 반항의 혹 반항의 혹'이란 말을 쓴다. 이 반항이라는 말, 결국 장애물에 굴하지 않고 나아간다는 말이다. 그렇게 자신의 삶은 반항의 혹을 잃지 않고 나아가는 삶. 그런 삶을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나처럼 패티 스미스를 잘 몰라도 이 책을 읽으면서 그를 알아가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검색하면 패티 스미스의 노래도 들을 수 있으니, 한두 번 들어도 좋겠다. 들으면서 그의 삶을, 또 그가 바라던 세상을... 이제 누가? 바로 우리가 이어서 만들어가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우리에게도 많은 장애물들이 있겠지. 그 장애물은 우리에게 현실에 안존하라고, 그냥 그 자리에 머물라고 한다. 그때 패티 스미스가 쓴 이 문장 '반항의 혹'을 생각하면 된다.


반항, 저항, 그것이 장애물을 극복하는 길이고, 또 세상을 바꾸는 힘이지 않겠는가. 패티 스미스가 세계 전역을 돌며 평화를 노래했다고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세계를 순회하면 평화의 메시지를 보내는 음악인들이 있으니...


패티 스미스의 삶은 본인에게만 또 그가 살았던 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이렇게 세계 곳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패티 스미스가 쓴 또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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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
고경옥 지음 / 현실문화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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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서 1990년대까지 페미니즘을 미술 전시를 통해 실현했던 과정을 살펴본 책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주로 여성 작가들의 전시를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페미니즘 전시가 여성 작가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남성 작가들도 참여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페미니즘이란 특정 성만이 주장하는 이론이나 실천이 아니라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성의 구분을 떠나서 사람들이 사람으로서의 권리를 보장하고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자 실천이다. 그러니 페미니즘을 특정 성으로 가두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이야 페미니즘에도 다양한 이론이 있고, 다양한 실천이 있으며, 이들이 같지 않음을 인정하고 있지만 한때 페미니즘을 단일한 운동으로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단일한 운동으로 생각하면 페미니즘이 지닌 다양성을 보지 못하게 된다. 페미니즘 자체가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운동이고, 나만큼이나 다른 존재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운동이니, 어느 범주로 국한시켜 다른 범주들을 배제하는 것은 페미니즘과 맞지 않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전시들을 보면 그 점을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여러 전시를 통해서 페미니즘 미술을 보여줬다고 하지만, 그들이 전시한 작품들을 보면 표현기법에서부터 주제까지 너무도 다양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함,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하는 모습.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 미술이고, 또 페미니스트들이 지녀야 할 자세 아니던가.


하여 이들 전시에는 페미니즘을 강조했다고 비판을 받는다든지, 페미니즘적 요소가 부족하다고 비판을 받기도 하고, 또 서로 다른 작품들이 한 공간에서 전시되는 바람에 전시의 일관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다.


하지만 그런 전시가 바로 페미니즘의 실천 아니겠는가. 어느 하나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게 열려 있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전시들.


많은 전시들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고, 그런 전시들이 어떻게 페미니즘과 연결되는지, 주요 작가들은 누구인지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다.


여기에 서울에서의 전시만이 아니라 부산에서 활동한 작가들에게도 한 장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으니, 이런 책의 구성 역시 페미니즘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을 표방한 미술 활동이 서울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닐 테니 말이다. 오히려 다른 지역에서도 활발한 활동들이 이루어졌을 텐데, 그에 대한 연구들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부산 지역의 전시를 살펴봄으로써 지역을 확대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를 확장해서 부산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진 전시들에 대한 연구, 그것들이 지닌 의미를 찾는 연구들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점은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작품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아쉬운 점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작품이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자로만 남은 그림이나 또는 설명을 통해서 이런 그림이겠지 하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그림들이 있는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이름이라도 남은 작품은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당대에 전시되었음에도 역사에서 사라져버린 작품들이 얼마나 많을까. 지금은 전시회에 도록들이 잘 되어 있어 작품들이 사진으로도 남겨지지만 당시에는 사진으로도 남지 않은 작품들이 꽤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들은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고, 자신들의 주장을 살린 전시회를 오랫동안 개최해왔다는 사실. 그러한 활동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 우리 미술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 나온 80-90년대 페미니즘 전시를 했던 모임들... <시월 모임>, <터>, <30캐럿> <그리뮤패 둥지>, <만화패 미얄> 그리고 '여성미술연구회' 여기에 부산에서 활동했던 미술가들과 그들이 협업해서 했다는 전시 <99여성미술제:팥쥐들의 행진>


이런 여러 전시에 대한 설명을 만나볼 수 있는 책. 더불어 각 전시회에 참여했던 작가들과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책. 우리가 지나온 과거에 페미니즘이 미술작품의 전시를 통해 어떻게 실천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그림 하나를 보자. <시월 모임>의 두 번째 전시, [반에서 하나로]에 나온 작품이라고 한다. 제목이 현모양처인데... 과연 여성을 동등한 대상으로 대하고 있었는지, 과거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 지금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고경옥, 전시로 보는 페미니즘 미술. 현실문화연구(....A). 2026년.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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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 지음, 배수아 옮김 / 봄날의책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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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 작품 읽기.


어렵다. [불안의 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데, 왜 불안일까? 인간이 실존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낀다는 말일까? 아니면 삶 자체가 불안일까? 죽음을 향해 가기 때문에 삶은 불안할 수밖에 없는가. 


읽어보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느끼는 불안은 아니다. 불안은 행동하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온다.


행동하는 인간은 이것저것 재지 않는다. 고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한다. 행동을 통해서 삶을 살아간다. 아니, 살아간다는 의식을 하지 않고 그냥 살아간다. 그러니 행동하는 인간에게는 불안이 스며들 틈이 없다.


즉 여유가 없다. 하지만 사색하는 인간은 이것저것 많은 고민을 한다. 행동하기 이전에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세상을 본다고 하기보다는 세상을 만든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있는 세상에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없는 세상을 있게 만들어내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해야 할까.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게 될까. 이러한 생각과 고민들이 결국 삶을 불안하게 한다.


불안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인데, 사색하는 인간은 행동보다 생각이 앞서고, 그것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기 때문에 불안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은 페소아가 만난 사람에게서 받은 글이라고 하면서 시작을 하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페소아의 또 다른 페소아라고 할 수 있다. 즉 페소아들 중 한 명인 소아레스가 이 글을 쓴 주인공인데... 자신이 몇 년 동안 일기처럼 쓴 글이 바로 이 책, [불안의 서]다.


회계보조원으로 일할 때 그는 행동을 하기 때문에 불안에 싸이지 않는다. 그냥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잠시 틈이 나면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그는 불안을 느낀다. 수많은 자아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글로 남긴다.


글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세상을 만든다고 할 수 있는데, 길고도 긴 여정을 짧은 글들로, 그러니까 일기라고 할 수 있는 글들로 이 책을 이끌어가고 있다.


글에 년도가 나오는 장면도 있는데, 1910년대로 먼 과거로 돌아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이 책에 실린 글들은 1930년대에 쓰인 글이다. 페소아가 1935년에 세상을 떴다고 하고, 이 책에서는 1934년이 마지막 해로 나온다.


그러니 이 [불안의 서]는 소아레스라는 또 다른 페소아가 쓴 자신의 내면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겹치는 내용도 나오는데, 일기를 몇 년에 걸쳐 쓰다 보면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 것이 비슷해질 때가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경구들, 적어놓고 때때로 들여다보고 싶은 구절들이 많은데, 우리가 행동하는 인간이라도 늘 행동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행동 사이 사이에 그 틈을 생각이 파고든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른 세상에 들어가게 된다.


낯선 세상. 의식하지 않았던 세상을 의식하게 되고, 그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그러니 행동하는 인간이라도 이 책에 나오는 구절들을 들여다볼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페소아(소아레스)가 창조한 세상이 어떠한지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때문인데... 그렇게 이 책은 '불안'에 떠는 영혼의 이야기라 할 수도 있지만, 사색하는 인간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고 하는 편이 좋겠다.


창조자로서의 불안. 당연한 것 아닌가. 자신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어찌 불안이 없겠는가. 이런 불안을 달래기 위해서, 어쩌면 그 불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소아레스가 글을 써서 남기고 이를 페소아가 출간하게 되었으니... 이 책에 나오는 구절, 소아레스든 페소아든 그들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글은 내 영혼의 구원이다.' (30쪽)


많은 구절들이 마음에 와닿는데, 그 중 이해가 잘 안되는 구절들이 있으면 또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기도 했다. 포르투갈 어를 모르니, 할 수 있는 일이 다른 번역본과 비교하는 것인데... 의미는 통하는데 문장이 다른 경우가 꽤 있다.



한 예로 '권태는 할 일이 없어서 병적인 분노가 치솟는 것과는 또 다른 상황이다. 그보다 훨씬 더 질환적인 상태, 뭔가를 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으리라는 감정이다. 이것은 곧, 할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권태도 따라서 지독해진다는 의미다.'(735쪽)는 문장이 있는데, 머리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여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니 '할 일이 없어서 지겨운 건 권태가 아니다. 권태는 무슨 일이든 할 가치를 못 느끼는 상태인 더 심각한 병이다. 이런 상태일 때는 할 일이 많을수록 더 심한 권태를 느끼게 된다.'(불안의 책. 문학동네. 오진영 옮김. 2015년. 546쪽.)고 되어 있다.


앞의 문장보다 뒤의 문장이 그래도 이해하기가 더 쉬운데... 하여 포르투갈 어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은 어쩔 수 없다. 이해 안 되면 다른 번역본을 찾아보기. 그래도 안 되면 내 상상으로 그 공백을 메우기.


이렇게 읽기 역시 쓰기와 마찬가지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것이 이 책을 읽은 소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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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극우가 온다
정민철 지음 / 페이지2(page2)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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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극우를 누가 불러왔나?

 

기득권이다. 보수든, 진보든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이 1020을 극우로 만들고 있다.

 

물론 모든 1020이 극우가 되지는 않는다. 연령이 같다고 해도 생각은 다양하고, 지역이 같다고 해도 생각이 또 다르고, 경제적 능력이 비슷하다고 해도 생각은 다르고 학력이 같다고 해도 생각과 행동이 다른 것이 인간이니까. 하지만 흐름으로 이야기하면 1020이 보수화, 극우화되었다고 할 수 있으니... 저자가 제목에 쓴 말을 그대로 쓴다.

 

보수는 그들을 이용하고, 진보는 그들을 가르치려 들지만, 본질적으로 그들을 극우로 만든 것은 보수냐 진보냐를 가를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도 이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우선 그들에게 막대한 상실감을 안겼다는 것. 더 이상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으니까.

 

'헬조선'(hell조선)이라는 말,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고, 부모 세대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스펙도 더 많이 쌓았지만 정작 부모 세대보다 잘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처음 세대라고, 즉 부모보다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첫세대.

  

물러설 곳이 없다. 이육사 시 '절정'을 생각한다.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 .../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 상황 아닌가. 이런 이들에게 너희가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먹히지도 않는다.

 

시인은 생각해 본다고 했지만, 1020들은 행동을 한다. 생각이 아니다. 행동이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겠다.

 

이렇게 만든 자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보수 쪽이 아니다. 이들이 쉽게 만나고, 또 그들의 도파민을 팍팍 뿜어내게 한, 다 좌파들 탓이라고 하는 극우 유튜브들을 만난 그들은, 진보 쪽을 향해서 너희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어. 너희들 때문이야! 외치고 있다.

 

그런데, 진보는? 애들이 뭘 몰라서 그래. 사실을 몰라서 그래. 사실만 알면 생각을 바꿀 거야. 한단다. 참 낙관적인 진보다.

 

낙관적인 진보가 아니라 세상물정을 모르는 진보다. 이러고서야 어디 진보라고 할 수 있나? 진보는 현재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보고 현재를 미래로 끌어가는 사람들 아닌가. 그런데 이들은 현재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이대로 가면 10, 20년 뒤에는 극우가 우리나라 권력을 장악한다. 파시즘의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유럽을 보라.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는 유럽에서도 극우가 세력을 얻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현실을 제대로 보라. 지금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이대로 가면 극우가 우리 사회를 점령한다. 이미 점령되어 가고 있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학교를 보면 안다. 학교에서 과연 민주주의 가치가 교육되는가? 민주시민 교육을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웃기는 소리다. 그런 수업에서 학생들은 잔다. 아니면 딴짓을 한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낸다. 귀로 들어온 소리가 마음에 담기지 않는다.

 

교사가 옳은 소리를 하면 꼰대소리라고 한다. 선생님이 뭘 모르고 하는 소리란다. 또 남을 혐오하는 말을 하면서도, 혐오 동영상을 보면서도 그냥 재미로 한단다. 재미? 끝이다.

 

이런 학교의 모습만 봐도 이미 우리 사회는 극우가 (이때 극우는 혐오를 기반으로 하는 집단이다. 남을 몰아내는 것을 자신의 존립 기반으로 삼는 집단) 자리를 잡고 있다.

 

학교만 그런 줄 알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엔. 하여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하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더 심각한 집단이 있단. 바로 군대다. 20대 초반의 남성들로 구성된 집단. 여기서도 핸드폰을 허용한다.

 

군대에서 핸드폰 허용. 다름을 거의 허용하지 않는 군대에서 핸드폰을 사용했을 때,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또는 틱톡 등등을 통해 목소리 큰 사람의 (주로 선임병이겠지만) 관점을 담은 영상들이 공유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따분하고 단조롭고 또 왠지 자신이 피해보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군대에서 어떤 영상들이 돌까? 그들의 시선을 잡고 그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영상, 주로 극우 논리를 주입하는 영상이 그들에게 공유된다고 한다.

  

다른 영상을 보기도, 다른 생각을 말하기도 힘든 군대에서 18개월, 훈련소 생활을 뺀다고 해도 16개월 이상을 그와 비슷한 극우 영상들을 보게 되면 자연스레 극우 논리가 주입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전역해서는 학교나 자신이 있던 곳으로 가서 그러한 논리를 주장하게 된다고.

 

이미 학교, 군대를 통해 습득한 극우 논리를 하루 아침에 바꾸기는 힘들다. 여기에 엄청난 알고리즘의 위력. 비슷한 영상만 계속 추천하고, 심지어 그 영상들이 자극적이어서 재미까지 있다면...

 

이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1020이 뭘 몰라서, 사실을 몰라서 그런다고... 아니, 그들에겐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힘들어하는 자신들에게 사이다 같은 통쾌함을 주는 영상, 도파민을 팍팍 분비시키는 영상이 더 좋다.

 

이 점을 놓치면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다. '3'라고 하지. 3초 안에 그들의 시선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 자칭 진보라는 사람들, 정말 설명이 길다. 길어서 도저히 끝까지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또 왜 이리 평이하고 도덕적인가. 더 보고 싶지 않다. 재빨리 다른 영상으로 넘어간다.

 

현실이 이렇다. 이런 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 바로 이런 현실을 알고 이를 활용하는 사람이 이 책의 저자 정민철이다.

 

이들의 언어로, 이들의 감수성에 맞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지금 외롭다고, 고립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많이 활동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 지원을 '진보' 쪽에서 해주어야 한다고 요청한다.

 

절박한 요청이다. 그러면서 그는 가족들이 밥상에서 대화할 것을 추천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1차 집단에서 서로가 소 닭 보듯 살아온 모습이 1020을 극우로 내몰기도 했다는 것. 훈계가 아니라 대화를, 주입이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를 하라고...

 

서로의 마음을 전달하라고. 그러면 조금씩 달라질 것이라고. 온라인을 통한 대항 활동도 중요하지만 대면을 통한 이해와 공감의 장을 넓혀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읽으면서 등골이 서늘했다. 큰일이군. 하지만 늦지 않았다고, 이런 문제제기를 하는 청년이 있으니. 이런 청년이 고립되지 않고 더 많은 청년들과 연대할 수 있다면, 지금 우려하는 상황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정치권이 정신차려야 한다고... 저자가 제기한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받아들여야 늦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런 목소리 들을 수 있는 정치권이 진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는, 그러한 정치인들을 '진보'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한 가지 명심할 점은 1020이 극우화 된다고 해서, 모든 1020이 극우 쪽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 중에서도 다양한 정치적 성향이 나타나고, 극우로 가는 1020 못지 않게 진보로 가는 1020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대면을 통한 이해와 공감의 장을 넓혀가려는 노력이 필요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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