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시니어존 - 우리의 미래를 미워하게 된 우리
구정우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 키즈 존'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인데...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니,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 세대 갈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때 '키즈'에 해당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호받고 통제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지니고 대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러한 '노 키즈 존'이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그러한 공간을 설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다.


'노 키즈 존'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간이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어떤 존재를 배제하는 공간이 '노 키즈 존'만 있는가? 아니다. 찾아보면 우리 사회에 이러한 배제의 공간이 많이 있다.


그런 배제의 공간을 인식하고 그것을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문제제기에 동감하고 정책으로, 제도로, 또 환경 개선으로 배제의 공간을 융합의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배제가 아닌 융합. 함께함. 이러한 공간이 우리가 지향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 책은 '노 키즈 존'을 비틀어 '노 시니어 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읽을 때 발음은 같지만 표기가 다르다.


'노 시니어 존 No Senior Zone'이 아니다. '老노 see:near zone'다. 노인을 가까이서 보는 공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제목이다. 가까이서 보다. 이 말을 가장 잘 살린 시가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는 시.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은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함께 지내다 보면 자세히 볼 수밖에 없고, 오래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고, 배제가 아니라 수용으로, 융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노인들을 배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시간, 공간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노인들은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다. 또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이기도 하고... 누구나 나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노인이 안 될 방법이 없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되기에,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노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고민해야 한다.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회는, 노인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사회, 오히려 약자에게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사자가 생쥐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우화처럼, 사회는 약자는 늘 도움을 받고, 강자는 늘 도움을 주는 관계로 유지되지 않는다. 약자도 도움을 주고, 강자도 도움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다.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떤 존재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배제되는 사회가 아닌 누군가도 함께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노인'을 중심으로 배제가 아닌 융합의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주장하고 있는글들이 실려 있다. 책의 표지에 있는 문장이 '우리의 미래를 미워하게 된 우리'인데... 이 문장이 '우리의 미래와 함께하는 우리'가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양이 요람 (리커버 에디션) 커트 보니것 리커버 컬렉션
커트 보니것 지음,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커트 보니것의 소설을 읽을 때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면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무슨 소리야? 하게 된다.


그의 문장 속에 숨어 있는 풍자, 비판을 찾아내야 작품을 즐길 수가 있다. 적어도 작품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게 된다.


'고양이 요람' 세상에, 이게 무슨 뜻이야? 했는데... 옮긴이의 말을 보니, 실뜨기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실을 가지고 노는 장난.


실뜨기를 하면서 여러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낸 모양은 가상이다. 현실이 아니다. 즉 진실이 아닌데, 그것을 진실인 양 믿고 놀이를 진행하는 것이다. 아이 때 그런 놀이는 가능하다. 아이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즉 실뜨기로 만들어낸 것이 진짜가 아니라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냥 놀이로 즐기면 되니까.


하지만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것에 의존하는 순간, 현실에 눈 감게 된다. 현실에 눈 감은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렇게 현실에 눈 감은 사람들이 도달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15쪽)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조나'라는 이름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를 '요나'로 바꾸면 연상되는 인물이 있으리라. 고래 뱃속에 들어갔던 사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상한 세계에 도달한 사람.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어김없이 나를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데려다놓았기 때문이다.'(15쪽)고 하기 때문에 자신을 '조나'라고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한 나라가 파괴되기까지의 현장에 있게 되고, 그것을 글로 남기에 된다.


따라서 '조나'로 시작한 소설이 한 나라의 파괴로 끝난다. 그가 도착해서 살아가려고 한 나라가 어떤 물질 때문에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까지 죽어가게 되는 현실.


액체를 또는 진흙을 단단하게 만드는 물질, '아이스-나인'이 등장한다. 이것을 만든 과학자는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물질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있었고, 자신도 흥미를 느꼈으며,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있었으니, 만들었으리라. 만든 다음 그 결과에 자신이 놀랐을지라도.


무언가가 연상되는 전개 아닌가. 인류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물질, 아니 무기. 그런 무기가 개발되고, 핵무기로 인해 핵전쟁 위기까지 가는 상황을 목격한 작가는 침묵할 수 없었으리라.


게다가 이 작가는 2차 대전 때 포로가 되고, 무고한 시민들이 폭격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던가. 반전을 외치는 작가가 핵전쟁의 위협을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러한 핵전쟁의 위험, 핵무기의 위험을 어떤 식으로 알려야 할까? 정공법으로 기록하는 것도 있겠다. 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보고서,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 그러면 내용은 건조해지겠고,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지 않겠지. 


최근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정공법으로 핵개발의 위험성이나 전쟁의 참상을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커트 보니것은 이런 방법이 아니라 우회적인 방법으로 핵무기의 위험이나 전쟁의 참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로 풍자다. 신랄하게 비꼬는, 또는 가볍게 농담하는 것처럼 툭툭 던지는 어투로 내용을 전개함으로써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데, 웃으며 읽는데,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뒤통수가 켕긴다.


마음에 무언가가 들어차서 그것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가벼운 문장들이라고 생각하고 읽어가는데 읽어갈수록 문장들이 묵직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대체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적은 양의 '아이스-나인'으로도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하는데, 이것이 바로 핵폭탄 아니겠는가. 그런 핵폭탄을 사용하는데 여러 제한 장치를 두고 있지만, 어느 순간 실수로 인해 핵폭탄이 사용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펼쳐질 것이다.


소설이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러한 핵무기의 위험성을 연상하게 전개되는데, 그 전에 그러한 물질(무기)를 개발한 과학자의 모습,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나누어주는 자식들의 모습에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여러 나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우연히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엿보게 된다. 이것이 커트 보니것 소설의 장점이다.


앞부분에서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질 때 정작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가 한 짓이 바로 '고양이 요람'을 만든 것이었다는데... 이 고양이 요람이 지닌 의미를 옮긴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양이 요람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거짓을 상징한다.'(346쪽)


태평양 건너 편에 있는 나라에 폭탄이 떨어져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그 후손들까지 대대로 고통을 받게 되는데, 정작 그러한 무기를 개발한 사람은 자신의 방 안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면?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 아비규환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방에서 평온하고 한가하게 실뜨기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과학-기술이 이렇게 잘못 쓰일 수도 있는데, 과연 과학-기술자들은 그 쓰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커트 보니것은 과학-기술의 책임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기술자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보여주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는 과학-기술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음을, 그러한 것이 어쩌면 실뜨기(고양이 요람)처럼 실재하지 않는데,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를 잘못 이끌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커트 보니것이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르난두 페소아. 이름을 많이 들었다. 읽은 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한번은 읽고 싶었던 책들. 제목이 [페소아와 페소아들]란 책도, [불안의 책] 또는 [불안의 서]라고 번역된 책도 제목에 끌리게 되었다.


  무언가 분열된 자아를 지닌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제목들. 페소아와 페소아들이라면 이는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 그런 분열된 자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다중우주에 살고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페소아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에 존재하면서 어느 때 문득 지구에 살고 있는 페소아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그냥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 인간의 뇌 역시 우주라고 하니, 뇌라는 우주에는 너무도 다양한 '나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까. 때로는 이런 '나'가, 때로는 저런 '나'가 내 의식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다양한 우주에 함께 존재한다면... 그런 '나'가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그들은 각자가 과연 '나'인가? 아니면 그런 '나들'이 모두 합쳐져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정의하기도 힘든데... 페소아의 '시가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책의 제목이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다.


많은 영혼... 그렇다. 바로 다중우주 아닐까.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나들' 그런 나를 어찌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페소아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시가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로 노래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포르투칼어를 모르니, 이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하지만 느낌이 그러니.. 이 시가집에 실린 시 중에 '이것'이란 시가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보다 상상을 통해 느낀 것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바로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이것


사람들은 나의 흉내며, 거짓말이라고 한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느낄 뿐이다.

상상을 통해.

마음은 쓰지 않는다.


내가 꿈꾸거나 겪는 것 모두,

내게서 실패하거나 끝나는 것,

그것은 다른 무언가 위의

옥상 같은 것. 바로 그

무언가가 아름다운 것.


그래서 나는 가까이 있지 

않은 것 가운데서 쓴다

내 얽힘으로부터 자유로이,

아닌 것에 대해 진지하게.

느낌? 읽는 사람이 느끼라지!

                  - 1934년 4월 출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2쇄. 101쪽.


이 시를 읽고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 페소아란 존재 역시 다양한 페소아들이 모여 페소아가 됐다는 것, 우리 역시 많은 '나들'이 모여 '나'가 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느끼는 '나'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페소아의 이 시가집을 읽었다. 복잡한 나를, 어느 하나의 나를 배제하지 않고, 그런 나도 나임을 생각, 아니 느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매 순간 변해왔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낯설다.

나를 본 적도 찾은 적도 없다.

그렇게 많이 존재해서, 가진 건 영혼뿐.

영혼이 있는 자에겐 평온이 없다.

보는 자는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느끼는 자는 그 자신이 아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보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된다. 

나의 꿈 또는 욕망 각각은,

태어나는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풍경,

나의 지나감을 지켜본다.

다양하고, 움직이고, 혼자인.

내가 있는 이곳에선 나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래서 낯설게, 나는 읽어나간다,

마치 페이지처럼, 나 자신을.

다가올 것을 예상치 못하면서,

지나가버린 건 잊어가면서.

읽은 것을 귀퉁이에 적으면서

느꼈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읽어보고는 말한다. "이게 나였어?"

신은 안다, 그가 썼으니. 

                                 1930.8.24.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2쇄. 78-7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아 생태설화 - 기후위기 시대, 옛이야기에서 발견한 공생의 삶
권혁래 지음 / 책과함께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화라는 한자어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으면,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여기에 옛이야기라고 하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또 이야기를 하면서 지내왔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하면서 살아가니까.


이야기는 우리들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고,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알게모르게 무언가를 배우게 된다. 자연스레 배우게 되는 것들 중에 환경에 대한 것이 있다. 물론 이 책은 환경이라는 말보다는 생태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생태라는 말에는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한 존재가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들이 공생하는 관계, 그런 관계를 생태라는 말은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 생태설화라는 말은 다른 존재들과 인간이 공존하는 이야기라 할 수 있고, 이 공존이 실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설화는 '한 나라의 기층문화, 정서, 가치관, 생활사, 민속 등을 보여주는 문화자료'(53쪽)라고 하니, 설화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자연스레 자신들의 문화, 가치관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설화를 아시아라는 우리가 속한 대륙으로 확장해서 비슷한 설화들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단지 설화를 비교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러한 설화들을 통해서 '자연과 생태적 삶, 공생의 정신, 화해와 소통, 평화의 정신에 대해 상상하며 지구공동체 구성원들의 연대 방안을 상상하게 될 것'(17쪽)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설화를 살피고 있는데, 비슷한 설화들이 많다. 그러한 비슷한 설화들을 통해서 예전 아시아에서 지니고 있던 생태적 관점을 살필 수 있고,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역시 다른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라면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들이 이 책에 많이 나온다. 물론 아시아의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이야기. 우리 옛이야기에 자연과 또 다른 동물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꽤 있기 때문인데...


동물을 구해줘서 보은을 받거나 동물을 학대에서 벌을 받는 내용은 지금 우리가 자연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하고...


여기에 인간의 이기심과 욕심이 어떻게 자연을 파괴하고, 그것이 자연만이 아니라 결국 인간의 삶도 파괴하게 되는지를 옛이야기들을 통해서 알 수 있으니...


저자의 바람대로 이러한 옛이야기는 자주 들려줘야 한다. 자주 이야기해야 한다. 이야기가 가진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레 생태적 관점을 지니게 되고, 다른 존재들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는 마음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인데... 


이 책은 아시아의 생태설화를 모아놓은 책이 아니라 그러한 설화들을 비교, 분석하고 있는 책이라, 옛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어서 옛이야기를 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사람에게는 실망을 줄 수도 있다.


이 책엔 두 편 정도 외국의 옛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그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볼 수는 있지만, 더 많은 이야기가 실렸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럼에도 왜 옛이야기가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는 점,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인간과 인간만이 아니라 인간과 다른 비인간 존재들과 어떻게 관계맺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으니, 그 점에 관해서는 의미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인 노예 남편 아내 - 2024 한국인 최초 퓰리처상 수상작
우일연 지음, 강동혁 옮김 / 드롬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사 넷이 나열되어 있는 제목. 주인, 노예, 남편, 아내. 이렇게 네 개의 낱말이 있으면 짝을 짓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어떻게? 간단하다. 순서대로 짝을 지으면 된다. 주인과 노예. 남편과 아내. 짝이 지어질 수 있는 낱말들이고 관계다.


우선 주인-노예의 짝. 주인이 있으면 노예가 있고, 노예가 있으면 주인이 있다. 종속적인 관계. 상-하 관계다. 또한 자유가 있고 없음의 차이를 지닌 짝이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귀속된 관계. 이것이 주인-노예의 짝이다. 불평등, 부자유... 지금은 통용되지 않는 노예라는 말. 그러니 이 낱말의 짝은 지금은 폐기되어야 한다.


이 책이 미국에서 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 쉽게 주인-노예의 짝을 찾을 수 있다. 아, 백인 주인과 흑인 노예구나. 흑인이 노예로 해방되지 않았던 시절의 이야기겠구나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게다가 백인 주인이라고 하면 여기 성별은 주로 남성을 연상한다.


그런데 다음 짝이 걸린다. 남편-아내라니... 남편과 아내를 상-하 관계로 놓을 수는 없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놓을 수도 없다. 하지만 이 짝에서 가부장 시대를 읽는 사람은 주인-노예의 짝과 같은 의미로 읽을 수도 있겠다.


같은 노예 생활을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오면 흑인-남성은 흑인-여성 위에 군림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레짐작하고, 이 책도 그러한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구나 할 수 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주인-노예와 남편-아내의 짝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분명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이라는 수식어구, 이 말을 당당하게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아직도 주인-노예와 짝을 이루는 남편-아내가 있을 수도 있다.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으로 이야기했지만,,, 현실에서는 어떤지? 지금 시대에 이 가정이 가정으로만 끝났으면 좋겠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150년도 더 전에, 노예제가 있던 미국에서 주인-노예와 남편-아내의 짝은 분명 연결이 되었으리라. 상하, 지배-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이런 짐작으로 책의 첫장을 넘기면 어? 아니네... 하게 된다. 당연히 주인-남편, 노예-아내 짝을 연상했던 사람에게는 낯선 짝이 등장한다. 주인-아내, 노예-남편의 짝이 이 책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노예제가 극성을 부리던 곳에서 살던 윌리엄과 엘렌. 이들은 부부로 살아가지만 남부에서 부부로 인정받지 못한다. 함께 살지도 못하고 가끔 만나볼 뿐이다. 게다가 엘렌은 피부가 하얗다. 아버지가 백인이고 피부 역시 하얗지만, '한 방울의 법칙'에 의해 엘렌은 노예가 된다. 나중에 탈출해서 강단에 설 때도 이런 엘렌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백인 노예'라는 표현으로 엘렌을 지칭하기도 한다.


탈출하기 위해서, 체포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위장이다. 피부가 하얀 엘렌이 백인 청년으로 분장하고, 윌리엄은 그의 노예로 시종을 들면서 떠나는 모습으로 위장한 것. 물론 그들의 주인에게는 비밀로 하고 새벽에 몰래 각자 빠져나온다. 기차역까지.


기차에서 그들은 주인과 노예로 행세하면서 배를 갈아타고 다시 기차를 타고 배를 타는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보스턴에 도착한다. 북부. 자유롭게 살 수 있다고 여긴 곳. 하지만 아니다. 노예 사냥꾼들이 들이닥쳐 언제 어디서 그들을 잡아갈지 모른다.


도망노예법에는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 주에 살더라도 기존의 노예 주인들이(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그들을 이렇게 지칭하자. 사람이 사람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은 이 당시에는 통하지 않았으니..) 그들을 잡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법을 실행하는 것이 연방 해체를 막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정치인들이 다수였고.


하여 크래프트 부부는 캐나다로 다시 떠난다. 자유인으로 살 수 있는 곳. 하지만 캐나다 역시 미국 남부에서 배로 한 번에 올 수 있는 곳.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갈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곳이다. 생활이 보장되지도 않고. 하여 안전한 곳. 노예를 인정하지 않는 곳인 영국으로 떠나가는 그들 부부. 


결국 남부 메이컨에서 북부 보스턴을 거쳐, 캐나다에서 다시 영국으로 가는 여정, 다시 영국에서 미국으로 와 자유인으로 살아가게 되는 이 여정이 바로 이 부부가 자유를 찾아 떠난 길이다. 많은 위험도 있었고, 더 많은 도움도 있었고, 자신들의 상황을 공개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했던 부부.


위험 상황에서도 이들 부부가 타협하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했기 때문이기도 한데... 자신들이 겪은 자유를 찾는 여정을 강연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또 아직 떠나지 못한 사람들에게 떠날 수 있음을 알리기도 하는 부부의 모습.


이런 이들이 있었기에 미국은 노예 해방이라는 길로 점점 나아가게 된다. 연방이 해체되면 안 된다는, 그래서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 사람들과 타협하던 정치인들도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게, 연방 해체의 위험, 전쟁까지도 불사하게 만든 거대한 흐름. 이 흐름은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크래프트 부부를 비롯해 먼저 탈출한 사람들, 노예제 폐지에 앞장섰던 사람들, 또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들, 그리고 지속적으로 자유를 찾아 떠나는 사람들과 자유를 외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노예 해방이라는 큰 물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크래프트 부부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탈출해 자유를 얻고, 그 자유를 자신들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누려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


이 여정은 남부에서 북부로 왔을 때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여정은 북부에서, 그리고 영국에서도 계속된다. 노예 해방 선언이 있고, 남북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그 이후까지.


이렇게 이 책은 크래프트 부부의 일생을 담고 있다. 소설이 아니다.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다. 하여 작가는 확실하지 않는 점은 가정으로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으로. 즉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전달하지 않고, 사실 전달을 원칙으로 하지만 짐작할 수 있는 부분, 논란이 되는 부분에서는 저자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그 점이 이 책에 신빙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용어부터. 저자는 노예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노예-소유자라는 말도 쓰지 않고. 그 점이 좋았다. 노예라는 말 대신 '예속 피해자'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 남에게 예속당하는 피해를 입은 사람이다. 이 용어는 명확하게 자신의 의지가 아닌 남의 힘에 의해 자유를 잃었다는 점을 명시한다.


노예 소유자라는 말도 그렇다. 왠지 합법적인 느낌을 주는데, '예속 가해자'라고 하면 남의 자유를 힘으로 빼앗았다는 느낌을 확실히 준다. 가해자라는 말 때문에... 소유자라는 말이 가치중립적이라면 가해자라는 말은 가치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 용어에서부터 노예제란 바로 가해-피해의 관계임을 말해주고 있으니... 다음으로 '남편-아내'의 관계다. 저자는 이들 부부가 떨어져 지낸 기간이 꽤 됨을 알려준다. 이들이 영국에 머물 때 각자의 일로 몇 년씩 떨어져 있기도 한다. 


남편은 아프리카에서 일을 하고, 아내는 영국에서 자신의 일을 하는 관계. 지금에 보면 대등한 부부 관계다. 서로의 일을 하면서 함께하는 부부. 이를 '따로 또 같이, 같이 또 따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당시에 부부가 이렇게 긴 기간을 떨어져 있는 것은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나 보다. 특히 엘렌에게 더 많은 책임을 지우려는 모습도 나타났다고 하고, 말년에 이들이 재판에 임하기도 하는데, 이런 부부 관계가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했다고.


당시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주인-노예 관계의 잘못을 인정하고, 없애려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지만 가정에서는 '주인-노예' 관계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음을... 크래프트 부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통해 전해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크래프트 부부가 자유를 위한 여정에서 아내 엘렌이 주인으로 분장한 것은 이후에도 엘렌이 독립적으로 살아가게 됨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저자 역시 이런 부부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니, 비록 그들 부부의 내밀한 사생활을 알 수는 없지만 저자는 이렇게 '같이 또 따로,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크래프트 부부의 모습을 '주인-노예' 관계를 청산한 평등한 부부의 모습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자, 이렇게 이 책은 크래프트 부부가 자유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을 통해 '주인-노예'의 관계가 '남편-아내'의 관계에서 작동하지 않음을, 두 쌍의 낱말은 서로 짝을 이루지 못함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권력이 작동하는 관계고, 하나는 권력이 작동해서는 안 되는 관계니까.


역사 책에서 쉽게 만나지 못하는 크래프트 부부의 여정. 이 여정을 따라가면 미국에서 노예 해방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인식하게 된다. 여기에 평등이란 인종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도... 다른 많은 관계에서도 바로 이 평등이 작동해야 함을...


빛바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태도를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꼭 읽어야 할 책이란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