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은 이 시집의 '후기'에서 김기창 화백의 미수전(米壽展)에서 본 그림을 보고, 환한 웃음을,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그러한 웃음이 초월로서의 웃음이 아니라, '헤게모니 -권력(들)에 대한 검색과  전복으로서의 웃음'(95쪽)이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웃음은 불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읏음으로서 권력을 넘어서는 경우. 하지만 대부분은 그러한 웃음을 웃지 못한다.


  권력은 웃음조차도 탄압하기 때문이고,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시집에서 말하는 '다친 무릎'이 되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해 '다친 무릎'들도 있지만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몰아가는 '다친 무릎'들도 있다. 


이 시집에는 외부의 힘으로부터 다친 존재들과 스스로 외부의 힘에 동화되어 다친 무릎들이 나오는데...


우선 외부의 힘에 스스로 동화되는 다친 무릎들은 시집의 앞부분에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식탁이 밥을 차린다'와 '제국주의가 간다'는 자본주의 논리에 편승해 자신을 거기에 맞추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신이 그것들을 소비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반대로 그것들이 사람을 소비한다. 사람은 그것들이 '나를 소비해'라는 말을 요청으로, 부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그것들을 거부했을 때 자신이 사회에서 낙오된다는 느낌, 뒤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더 적극적으로 그것들의 요청을 명령으로 받아들인다.


당연히 따라야 할 것으로, 따르지 않으면 자신에게 좋지 않다고 여기면서... 그러니 내가 신용카드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신용 카드가 나를 소비하고 / 신용 카드가 나를 분실 신고한다'('식탁이 밥을 차린다' 중에서. 9쪽)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니나리치가 너를 부른다 / 향기로운 너를 만들어 주겠다고 / 크리스찬 디오르가 너를 부른다 / 불란서 멋쟁이로 꾸며주겠다고'('제국주의가 간다' 중에서. 12쪽)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상황. 이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여기에 자신의 몸을 어떻게 하는가. 성형천국이라는 말을 듣는 나라 아니던가. 몸 어디 한 군데쯤은 손을 대야 사회에서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는 풍조.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성형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사람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이, 남의 이목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 


이 시집이 2000년에 나왔는데, 이러한 소비풍조, 또는 사람이 상품에 끌려다니고, 또 스스로 상품이 되어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줄지는 않았다. 그러니 앞에서 인용한 시들이 말하는 것을 그냥 웃으면서 넘길 수는 없다. 


오히려 광고를 통해 사람을 이렇게 상품에게 종속되게 하거나 스스로 상품이 되고자 하는 모습을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하는데, 시인이 바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웃음일 텐데... 상품으로, 또는 상품이 되어 만족스러워 하며 내는 웃음이 아니라.


다음에 시집에 실린 외부의 힘에 의해 '다친 무릎'들이 나온다. 이는 어쩔 수 없는 힘에 의해 다칠 수밖에 없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시인은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과의 연대를 꿈꾸면서.


외부의 힘에 의해 '다친 무릎'들은 누구인가? 아예 '다친 무릎'이라는 구절이 제목에 들어간 시도 있는데,('<다친 무릎>에서 시작된 인생'. 60-61쪽) 이 시를 읽고 다른 시들을 찾아보면 쉽게 '다친 무릎'이 어떤 존재들인지 알게 된다.


시집에 나오는 존재들을 살펴보면 '일본 대사관 앞 수요 집회에 할머니들'('여왕의 날씨'에서. 44쪽)과 '스페인 기병대에 학살당하고 능욕된 ... 홍인의 어머니와 딸들'('신촌 맥도날드 점'에서. 47쪽)이고, '1980년 5월 19일 광주 / 좌유방부 자창 우측흉부 관통상 / 열아홉 살 처녀 손옥례'('신촌 맥도날드 점'에서. 48쪽) '들'이다. 


이런 존재들이 권력에 주눅들지 않고 권력에 대해 정면으로 웃을 때 그때 웃음은 전복적인 힘을 발휘한다. 너희들이 아무리 우리를 밟아도 우리는 일어선다. 결코 밟힌 채로만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 이것은 사회의 소수자들이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로 '이반, 퀴어'라는 말을 써서 그 의미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과 통한다.


이 시집에서 '일반'이라는 말을 비틀어 '이반'이라고, 'ㄹ'을 탈락시킨 말로 자신들을 지칭하는 그러한 모습과 비슷한 시가 나오는데, 그 시 제목이 '<일상>에서 ㄹ을 뺄 수만 있다면'(68-70쪽)이다.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이 된다. 보통, 보편이라는 일상에서 'ㄹ'을 빼면 '이상'이 된다. 보통과 다른이라는 의미의 이상하다의 이상일 수도 있겠고, 우리가 바라는 희망의 '이상'일 수도 있다. 즉 일상에 매몰되어 이상을 보지 못하면, 다른 말로 '다친 무릎'들을 보지 못하면 결코 '이상'에 도달할 수가 없다. 


시인은 이 시에서 'ㄹ'을 무릎으로 보고 있는데,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을 'ㄹ'에 빗대고 있어서 우리가 일상에서 반드시 'ㄹ'을 빼야 함을, 누군가의 다친 무릎을 괴고 생활해서는 안 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가 실현되는 때로 시인은 상상의 시간을 만들어낸다. 비록 현실에는 없는 시간이지만, 그 시간은 올 수 있고, 또 와야만 한다. 우리가 만들어내야만 하는 시간. 바로 13월의 13일. 13이라는 서양에서 불길하다고 여기는 숫자를 시인은 이 시집에서 권력관계를 뒤집는 시간으로 설정한다.


이것 역시 웃음의 힘이다. 불길한 시간, 금기의 시간은 권력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 그런 시간을 '다친 무릎'들이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권력의 시간을 뒤집어버리는 것. 너희가 그렇게 떨고 있는 시간을 우리는 웃으며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 긍정성, 낙관.


시인은 '13월 13일의 사랑'(77-78쪽)과 '13월 13일, 마지막 축제'(79-80쪽)에서 그러한 뒤집음, 환한 웃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친 무릎'들이 서로를 부등켜안으며 함께 웃으며 살아가는 세상. 그러한 세상을 꿈꾸며, 더이상 '다친 무릎'들을 만들어내지 않는 사회를 꿈꾸는 시인. 그러한 시들.


시집을 읽다가 몇몇 기사가 떠올랐다. 우리 사회는 '다친 무릎'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에 말도 안 되는 광고를 한 (차마 그들의 광고 문구를 쓸 수가 없다. 쓴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독이다.) 모 기업(굳이 안 밝혀도 다 아니까), 평화의 소녀상 앞에서 말도 안 되는 막말을 하며서 시위를 하는 몇몇 단체 사람들... 그리고 장애인 시위에 대한 이번 판결. 


지하철역 시위를 하면서 스티커를 붙이고 글을 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사람들에게 대법원에서 벌금형을 확정했다는 기사. (‘지하철역 시위’ 전장연 대표, 공동재물손괴 벌금형 확정)


이 기사를 보면서 이 시집에 나온 '다친 무릎'이라는 말이 떠올랐고, 우리가 그들의 다친 무릎을 보듬고 고쳐주려고 하지는 못할망정, 다친 무릎을 더 세게 내려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했다. 이는 시인이 시에서 말했던 'ㄹ'을 빼는 행위와는 정반대의 판결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 시위 방법의 정당성을 묻기 전에 먼저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다했는지를 물어야 하지 않을까. 요즘 헌법, 헌법하는데, 헌법 10조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고, 34조에는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와 2항 '국가는 사회보장, 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분명 '모든' 국민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들이 이동할 권리는 행복추구권에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도 포함이 된다. 그러니 장애인들이 이동할 수 있도록 제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가 실행되지 않아서 의무를 시행하라고 시위를 하는데, 시위의 방법을 가지고 유, 무죄를 따지는 것은 '다친 무릎'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법원은 국가에게 시위의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하지 않나? 국가가 너무 포괄적이라면 지방자치단체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조항을 실천할 의무가 있기 때문인데...


그러니 시위의 적절성으로 판결하기 전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부작위로 인한 장애인들의 불편'을 먼저 따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러한 생각은 더 짙어졌는데, 왜냐하면 장애인들은 우리 사회의 '다친 무릎'들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여러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시인이 후기에서 한 말처럼 '나의 시가 그런 유쾌한 검은 폭소의 실존적 울림을 가졌으면 좋겠다'(95쪽)고 했는데, 정말 그러한 웃음을 웃고 싶다. 그러한 웃음을 터뜨리게 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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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 ㅣ 포션 4
최의택 지음 / 읻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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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비인간' 


인간이 아니다. '저 사람은 인간도 아니야.'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하는 말들에서 인간답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인간이 아닌, 즉 비인간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런 말들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는 무언가 옳지 않음, 또는 인간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아닌 존재는 열등한 존재나 배제되어야 할, 아니면 고쳐야 할 존재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말이란 생각.


하지만 세상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더 많다. 그러한 존재들과 함께 살아온 것이 바로 인류의 역사다. 인간만이 살 수 있는 세상은 없다. 인간이 아닌 존재가 모두 없어진다면 인간 또한 살아갈 수가 없다.


최의택이 쓴 이 소설집 제목이 '비인간'이다. 그런데 제목이 된 소설은 없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에 나오는 인물(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소설에 등장하는 존재들이다. 물론 인간을 포함해서)들 중 대부분이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다.


SF소설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인간이 아닌 존재들, 특히 지금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인간과 유사한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데, 이러한 휴머노이드가 상용화된 세상이 소설에 나온다.


그런 세상에서 홀로그램 보육교사가 등장하고('보육교사 죽이기'), 로봇이 등장하여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노인과 노봇'이라는 소설에서 보면 인간과 로봇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 서로 의지하면서 살아왔는지를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세상은 디스토피아가 아닐 터. 기술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당면해야 하는 세상이 로봇과 인간의 갈등이 아니라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일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마음을 따스하게 해주는 소설들이 많은데... 그러다가 '경계선, 인격, 장애'란 소설을 읽으면서 마음이 섬뜩해졌는데...


인간을 배려하는 로봇과 마음이라는 것이 없는 인간이 등장하여 도대체 어떤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있다.


인간이 아닌 존재를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막 대하는 인물에 비해 인간의 마음을 고려하는 로봇이라니...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비인간'이라는 말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생물학적인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인 인간에 대하여, 사회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생물학적으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와는 범위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생물학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을 돌보고,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비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여러 존재 중 하나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하여 '비인간'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결국 이 소설들은 생물학적인 인간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인간이라 할 수 있는 존재들의 이야기, 그런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저의 아내는 좀비입니다'는 소설이 좀비로 변한 아내, 남편과 함께사는 사람들을 보여주는데, 증상 완화제로 어느 정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이는 좀비를 '비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보고 있다는 말이 되는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 [좀비 딸]을 떠올렸으니...


이 영화에서 좀비가 된 딸이 등장하지만, 그 딸을 좀비가 아닌 인간으로 대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최의택의 이 소설집에서는 좀비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을 인간으로 대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다.


그렇게 이 소설 속 '비인간'들은 '사회적 인간'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 혹 외계존재가 있다면 그들도 '인간'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기도 하다.


그러니 생물학적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인권 선언에 있는 성별, 피부색, 종교, 성적 지향, 나라, 신체적 특성 등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들을 '비인간'처럼 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이 바탕으로 깔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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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 - 정치 없는 치유, 치유 없는 정치를 넘어서
김찬호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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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정치란 자신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관여하지 않는 것도 정치다. 그러니 정치는 바로 삶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정치가 잘 이루어질 때 우리는 정치를 의식하지 않는다. 숨을 쉴 때 공기를 의식하지 않듯이 정치가 잘 되고 있다면 정치를 의식할 이유가 없는 것. 하지만 정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정치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닥친 정치... 정치적 위험. 그때서야 정치가 중요함을 깨닫고 어떻게 할까를 고민한다. 어떤 이들은 광장으로 나가고,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침잠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정치 조직에 몸을 담기도 한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행위를 한다. 그것을 자신은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정치가 피부에 다가온 것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다. 세상에 비상계엄이라니... 정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 날... 그 날 이후,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졌는데, 각자의 관점에 따라 정치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비방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란 대화와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의 격차를 좁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행위가 정치라고 한다면, 서로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 것은 정치라고 할 수 없다.


정치로 포장된 적대행위일 뿐이다.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 책은 비상계엄 이후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바라보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또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재난, 극우, 광장, 정치인, 교육, 대화, 회복, 성장'이라는 여덟 개 주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이 연결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각자 독립적이어서 따로따로 읽어도 된다.


그렇지만 이 여덟 주제를 관통하는 것은 '민주주의'이고, 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관점이다.


결국 정치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호적대적인 갈등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상계엄 이후 '광장'에서 이루어졌던 것들이 바로 '민주주의'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배제가 아니라 화합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고통을 보살펴야 한다. ... 정치는 관계의 예술이다. 최고의 정치는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여 공동의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사회의  탁월한 잠재력을 이끌어낸다.'(17쪽)고.


바로 이러한 공론장의 형성,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고, 이러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면,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도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즉 '공공선으로 모아진 마음이 민주주의를 치유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마음을 치유하고, 건강한 마음이 민주주의를 치유한다. 민주주의와 마음은 서로를 돌보는 관계에 있다'(19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인데... 지금 우리의 정치는 어떠한가? 저자의 '정치는 인간의 고통을 가장 많이 발생시키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38쪽)이 현실 아닌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이 전쟁들이 바로 정치가 일으킨 전쟁 아니던가. 


정치로 인해 발생한 재난이 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재난을 일으키는 것도 정치지만, 재난을 극복하게 하는 것도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고통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수단이지만, 거기에 주체로 참여하는 것 자체로 치유의 경험이 될 수 있다'(224쪽)는 저자의 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 광장에서 치유를 받은 경험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정치가 최고의 공동선을 함께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하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동시대인들을 온전히 아우르는 공동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배려하는 공동선이다'(253쪽)라는 저자의 말 명심해야 한다.


동시대인들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반드시 고려하는 정치가 바로 고통을 치유하는 정치가 될 것이다.


최근에 읽은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에서 저자인 키머러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들려주고 있다. "올 때보다 갈 때 더 좋은 곳이 되게 하렴."('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 136쪽)


이런 자세가 바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자세다. 동시대인들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도 함께하는 정치인 것이다.


하여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똑바로 보았을 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러한 고민을 하는 과정이 바로 희망이다.


책의 끝부분에 실린 파커 파머와의 대담에서 파머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희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 그것은 바로 치유의 정치이고, 이러한 치유의 정치가 바로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그 점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란 지금, 이 현실과 더 나은 가능성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현실과 가능성 사이에 서서,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날마다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행동입니다. 희망은 동사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갖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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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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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그 나라의 미래다. 그렇게 어린이는 중요한 존재다. 단지 미래를 살아갈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어린이를 사회의 미래로 인식하고 교육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에서는 전통을 비롯해 미래의 전망까지 교육한다. 그 사회가 원하는 존재를 양성하는 곳, 바로 학교다.


이 학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일까? 요즘이야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그에 대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어떤 교육을 강조했을까?


그러한 교육이 과연 아이들에게 잘 다가갔을까? 이런 의문을 지니면서 이 책을 읽었다. 제목이 '제국의 어린이들' 아닌가.


일제강점기를 살아갔던 어린이들의 삶을 그들이 쓴 글을 통해서 엿보게 해준다는 제목. 작은 제목으로 '조선 반도의 어린이들'이라고 했으니, 조선에 들어와 살고 있던 일본인 어린이들도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선 어린이들과 일본 어린이들의 삶을 그들이 쓴 글을 통해서 비교-대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 비교는 가능해도 대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주로 분석하고 있는 글들이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상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일본의 시책에 동조하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정책과 다른 내용의 글이라면 뽑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고, 뽑히기 이전에 이미 그런 글을 쓰는 어린이는 이러한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선 어린이들이 글짓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려면 지도교사가 있어야 했다고 하는데, 지도교사가 총독부의 관점과 다른 글을 쓰도록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 어린이는 조선 어린이와 달리 지도교사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았을 테고, 또한 일본어도 자유롭게 구사했을 테니 굳이 지도교사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참조한 글들은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의 생활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다.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어린이들의 삶은 다른 글들, 또는 다른 자료를 통해서 찾아야 할 것인데...


그럼에도 저자는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작품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당시 조선에 살았던 어린이들의 생활을 파악할 수 있고, 일본과 조선의 어린이들이 처한 상황을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


큰 차이점은 일본 어린이들은 무상으로 교육을 받는 반면, 조선 어린이들은 수업료를 내고 교육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하던 조선인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비율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점, 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라는 이름에서부터 예전에 70년대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곤 했던 반공웅변대회가 생각났다.


반공웅변대회, 여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당시 학생들의 삶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 대회에 나가는 글들은 어느 정도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고 보면 되는데...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총독부 주최로 실시했던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역시 자신들의 방향에 맞는 글들을 요구했을 것이고, 그러한 글들을 통해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분석한 글들만으로 당시 조선 반도의 어린이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라는 잡지라든가, 또 그와 비슷한 매체에 실린 글들을 자료로 삼아 분석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다른 잡지에 실린 글들도 참조하고 있지만, 대체로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그것도 1,2회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그 점이 좀 아쉽다.


또한 어린이 당사자들의 글이 아니더라도 당시에 어린이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다른 많은 글들이 있을 것인데, 특히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그럼에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어린이 글짓기 작품을 대상으로 한 것은 일제강점 말기 당시의 사회 모습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까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의식을 주입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으니...


또한 저자도 지적하지만 조선 어린이와 일본 어린이의 글을 보면 그들이 다루는 소재 자체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하는 일본 어린이들이 동물을 다루더라도 요즘 반려동물이라 하는 개, 고양이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면, 조선 어린이들은 그러한 반려동물이아니라 돼지나 소와 같은 집안 경제에 도움이 되는 동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하여 관변 글쓰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제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점을 알 수 있으니...


이렇게 드러난 글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드러나지 않은 현실을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니... 그 점에서 이 책이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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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니어존 - 우리의 미래를 미워하게 된 우리
구정우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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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키즈 존'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인데...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니,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 세대 갈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때 '키즈'에 해당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호받고 통제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지니고 대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러한 '노 키즈 존'이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그러한 공간을 설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다.


'노 키즈 존'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간이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어떤 존재를 배제하는 공간이 '노 키즈 존'만 있는가? 아니다. 찾아보면 우리 사회에 이러한 배제의 공간이 많이 있다.


그런 배제의 공간을 인식하고 그것을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문제제기에 동감하고 정책으로, 제도로, 또 환경 개선으로 배제의 공간을 융합의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배제가 아닌 융합. 함께함. 이러한 공간이 우리가 지향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 책은 '노 키즈 존'을 비틀어 '노 시니어 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읽을 때 발음은 같지만 표기가 다르다.


'노 시니어 존 No Senior Zone'이 아니다. '老노 see:near zone'다. 노인을 가까이서 보는 공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제목이다. 가까이서 보다. 이 말을 가장 잘 살린 시가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는 시.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은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함께 지내다 보면 자세히 볼 수밖에 없고, 오래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고, 배제가 아니라 수용으로, 융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노인들을 배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시간, 공간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노인들은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다. 또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이기도 하고... 누구나 나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노인이 안 될 방법이 없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되기에,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노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고민해야 한다.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회는, 노인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사회, 오히려 약자에게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사자가 생쥐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우화처럼, 사회는 약자는 늘 도움을 받고, 강자는 늘 도움을 주는 관계로 유지되지 않는다. 약자도 도움을 주고, 강자도 도움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다.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떤 존재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배제되는 사회가 아닌 누군가도 함께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노인'을 중심으로 배제가 아닌 융합의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주장하고 있는글들이 실려 있다. 책의 표지에 있는 문장이 '우리의 미래를 미워하게 된 우리'인데... 이 문장이 '우리의 미래와 함께하는 우리'가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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