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다스리는 민주주의 - 정치 없는 치유, 치유 없는 정치를 넘어서
김찬호 지음 / 김영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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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사회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정치란 자신이 관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다. 내가 관여하지 않는 것도 정치다. 그러니 정치는 바로 삶이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정치가 잘 이루어질 때 우리는 정치를 의식하지 않는다. 숨을 쉴 때 공기를 의식하지 않듯이 정치가 잘 되고 있다면 정치를 의식할 이유가 없는 것. 하지만 정치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정치를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자신에게 닥친 정치... 정치적 위험. 그때서야 정치가 중요함을 깨닫고 어떻게 할까를 고민한다. 어떤 이들은 광장으로 나가고,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침잠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정치 조직에 몸을 담기도 한다.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행위를 한다. 그것을 자신은 정치적 행위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정치가 피부에 다가온 것은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사태다. 세상에 비상계엄이라니... 정치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한 날... 그 날 이후, 사람들은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정치에 관심을 가졌는데, 각자의 관점에 따라 정치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것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리고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비방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치란 대화와 타협을 기본으로 하는 것,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의 격차를 좁혀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하는 행위가 정치라고 한다면, 서로 적대적인 말과 행동을 일삼는 것은 정치라고 할 수 없다.


정치로 포장된 적대행위일 뿐이다.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이 책은 비상계엄 이후 우리나라 정치 상황을 바라보면서 문제가 무엇인지, 또 그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가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재난, 극우, 광장, 정치인, 교육, 대화, 회복, 성장'이라는 여덟 개 주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장이 연결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각자 독립적이어서 따로따로 읽어도 된다.


그렇지만 이 여덟 주제를 관통하는 것은 '민주주의'이고, 이 민주주의를 지키고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는 관점이다.


결국 정치의 복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상호적대적인 갈등을 넘어서 우리 사회의 행복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상계엄 이후 '광장'에서 이루어졌던 것들이 바로 '민주주의'의 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배제가 아니라 화합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정치는 고통을 보살펴야 한다. ... 정치는 관계의 예술이다. 최고의 정치는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여 공동의 에너지를 고양시키고 사회의  탁월한 잠재력을 이끌어낸다.'(17쪽)고.


바로 이러한 공론장의 형성,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고, 이러한 민주주의가 실현된다면, 고통받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도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즉 '공공선으로 모아진 마음이 민주주의를 치유한다. 그러니까 민주주의가 마음을 치유하고, 건강한 마음이 민주주의를 치유한다. 민주주의와 마음은 서로를 돌보는 관계에 있다'(19쪽)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가 해야 할 일인데... 지금 우리의 정치는 어떠한가? 저자의 '정치는 인간의 고통을 가장 많이 발생시키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38쪽)이 현실 아닌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들. 이 전쟁들이 바로 정치가 일으킨 전쟁 아니던가. 


정치로 인해 발생한 재난이 한 나라에 그치지 않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재난을 일으키는 것도 정치지만, 재난을 극복하게 하는 것도 정치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고통을 줄이거나 제거하는 수단이지만, 거기에 주체로 참여하는 것 자체로 치유의 경험이 될 수 있다'(224쪽)는 저자의 말...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 광장에서 치유를 받은 경험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정치가 최고의 공동선을 함께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때, 그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하나는 사회를 구성하는 동시대인들을 온전히 아우르는 공동선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를 배려하는 공동선이다'(253쪽)라는 저자의 말 명심해야 한다.


동시대인들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반드시 고려하는 정치가 바로 고통을 치유하는 정치가 될 것이다.


최근에 읽은 [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에서 저자인 키머러는 자신의 어머니의 말을 들려주고 있다. "올 때보다 갈 때 더 좋은 곳이 되게 하렴."('자연은 계산하지 않는다' 136쪽)


이런 자세가 바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자세다. 동시대인들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도 함께하는 정치인 것이다.


하여 우리는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똑바로 보았을 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러한 고민을 하는 과정이 바로 희망이다.


책의 끝부분에 실린 파커 파머와의 대담에서 파머는 희망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희망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정치, 그것은 바로 치유의 정치이고, 이러한 치유의 정치가 바로 우리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그 점을 이 책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희망이란 지금, 이 현실과 더 나은 가능성 사이의 차이를 분명하게 자각하면서, 현실과 가능성 사이에 서서,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날마다 무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행동입니다. 희망은 동사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갖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가는‘ 존재입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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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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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는 그 나라의 미래다. 그렇게 어린이는 중요한 존재다. 단지 미래를 살아갈 존재라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소중한 존재다. 그래서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 어린이를 사회의 미래로 인식하고 교육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학교에서는 전통을 비롯해 미래의 전망까지 교육한다. 그 사회가 원하는 존재를 양성하는 곳, 바로 학교다.


이 학교에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일까? 요즘이야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하여 그에 대비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어떤 교육을 강조했을까?


그러한 교육이 과연 아이들에게 잘 다가갔을까? 이런 의문을 지니면서 이 책을 읽었다. 제목이 '제국의 어린이들' 아닌가.


일제강점기를 살아갔던 어린이들의 삶을 그들이 쓴 글을 통해서 엿보게 해준다는 제목. 작은 제목으로 '조선 반도의 어린이들'이라고 했으니, 조선에 들어와 살고 있던 일본인 어린이들도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선 어린이들과 일본 어린이들의 삶을 그들이 쓴 글을 통해서 비교-대조한다고 할 수 있는데, 어느 정도 비교는 가능해도 대조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저자가 주로 분석하고 있는 글들이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에서 입상한 글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기 때문이다.


조선총독상이라는 이름에서 이미 일본의 시책에 동조하는 글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정책과 다른 내용의 글이라면 뽑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고, 뽑히기 이전에 이미 그런 글을 쓰는 어린이는 이러한 대회에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조선 어린이들이 글짓기 경연대회에 참가하려면 지도교사가 있어야 했다고 하는데, 지도교사가 총독부의 관점과 다른 글을 쓰도록 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일본 어린이는 조선 어린이와 달리 지도교사가 없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았을 테고, 또한 일본어도 자유롭게 구사했을 테니 굳이 지도교사가 필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참조한 글들은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의 생활을 모두 보여줄 수는 없다.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어린이들의 삶은 다른 글들, 또는 다른 자료를 통해서 찾아야 할 것인데...


그럼에도 저자는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작품들을 통해서 어느 정도 당시 조선에 살았던 어린이들의 생활을 파악할 수 있고, 일본과 조선의 어린이들이 처한 상황을 비교할 수 있다고 한다.


큰 차이점은 일본 어린이들은 무상으로 교육을 받는 반면, 조선 어린이들은 수업료를 내고 교육을 받아야 했다는 사실, 그러니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하던 조선인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비율이 적을 수밖에 없다는 점, 또 일본이 일으킨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라는 이름에서부터 예전에 70년대쯤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곤 했던 반공웅변대회가 생각났다.


반공웅변대회, 여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의 글을 보면서 당시 학생들의 삶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겠는가. 그 대회에 나가는 글들은 어느 정도 방향이 정해져 있었다고 보면 되는데...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 말기에 총독부 주최로 실시했던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역시 자신들의 방향에 맞는 글들을 요구했을 것이고, 그러한 글들을 통해 다른 아이들에게 영향을 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니, 저자가 분석한 글들만으로 당시 조선 반도의 어린이들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 모두 파악할 수는 없다. 오히려 방정환이 창간한 [어린이]라는 잡지라든가, 또 그와 비슷한 매체에 실린 글들을 자료로 삼아 분석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다른 잡지에 실린 글들도 참조하고 있지만, 대체로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 그것도 1,2회 작품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그 점이 좀 아쉽다.


또한 어린이 당사자들의 글이 아니더라도 당시에 어린이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다른 많은 글들이 있을 것인데, 특히 아동문학을 중심으로 분석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그럼에도 조선총독부에서 주관한 어린이 글짓기 작품을 대상으로 한 것은 일제강점 말기 당시의 사회 모습을 바라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까지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영광이라는 의식을 주입하려는 그들의 모습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으니...


또한 저자도 지적하지만 조선 어린이와 일본 어린이의 글을 보면 그들이 다루는 소재 자체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하는 일본 어린이들이 동물을 다루더라도 요즘 반려동물이라 하는 개, 고양이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면, 조선 어린이들은 그러한 반려동물이아니라 돼지나 소와 같은 집안 경제에 도움이 되는 동물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 하여 관변 글쓰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제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점을 알 수 있으니...


이렇게 드러난 글에서도 차이가 나는데, 드러나지 않은 현실을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니... 그 점에서 이 책이 일제강점기 어린이들의 생활을 살펴보는 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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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시니어존 - 우리의 미래를 미워하게 된 우리
구정우 외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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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키즈 존'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이라는 뜻인데... 아이들이 다른 사람들을 방해하니, 아이들과 함께하지 않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다.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 세대 갈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때 '키즈'에 해당하는 존재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들은 보호받고 통제받는 존재라는 인식을 지니고 대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러한 '노 키즈 존'이 인권침해에 해당한다고, 그러한 공간을 설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인식을 많은 사람들이 지니고 있다.


'노 키즈 존'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배제하는 공간이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어떤 존재를 배제하는 공간이 '노 키즈 존'만 있는가? 아니다. 찾아보면 우리 사회에 이러한 배제의 공간이 많이 있다.


그런 배제의 공간을 인식하고 그것을 없애려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의 문제제기에 동감하고 정책으로, 제도로, 또 환경 개선으로 배제의 공간을 융합의 공간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배제가 아닌 융합. 함께함. 이러한 공간이 우리가 지향하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이 책은 '노 키즈 존'을 비틀어 '노 시니어 존'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읽을 때 발음은 같지만 표기가 다르다.


'노 시니어 존 No Senior Zone'이 아니다. '老노 see:near zone'다. 노인을 가까이서 보는 공간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제목이다. 가까이서 보다. 이 말을 가장 잘 살린 시가 나태주 시인이 쓴 풀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는 시.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 가까이서 보아야 한다는 말은 함께 지내야 한다는 말이다. 함께 지내다 보면 자세히 볼 수밖에 없고, 오래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보지 못했던 부분을 보게 되고, 배제가 아니라 수용으로, 융합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노인들을 배제하는 사회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함께하는 시간, 공간들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노인들은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다. 또 우리가 맞이하게 될 미래이기도 하고... 누구나 나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우리가 노인이 안 될 방법이 없다. 우리 모두 노인이 되기에, 지금 우리 곁에 있는 노인들은 우리의 미래이기도 하고, 우리의 현재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고민해야 한다.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을 배제하지 않고 함께하는 사회는, 노인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도 배제하지 않는 사회일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 약자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사회, 오히려 약자에게서도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회. 사자가 생쥐의 도움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우화처럼, 사회는 약자는 늘 도움을 받고, 강자는 늘 도움을 주는 관계로 유지되지 않는다. 약자도 도움을 주고, 강자도 도움을 받을 때가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다. 그런 점을 인식하고 있다면 어떤 존재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사회가 되도록 노력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배제되는 사회가 아닌 누군가도 함께하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책은 그런 점에서 '노인'을 중심으로 배제가 아닌 융합의 사회가 좋은 사회임을 주장하고 있는글들이 실려 있다. 책의 표지에 있는 문장이 '우리의 미래를 미워하게 된 우리'인데... 이 문장이 '우리의 미래와 함께하는 우리'가 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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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리커버 에디션) 커트 보니것 리커버 컬렉션
커트 보니것 지음,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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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트 보니것의 소설을 읽을 때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아내면서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게 무슨 소리야? 하게 된다.


그의 문장 속에 숨어 있는 풍자, 비판을 찾아내야 작품을 즐길 수가 있다. 적어도 작품을 잘못 이해하지는 않게 된다.


'고양이 요람' 세상에, 이게 무슨 뜻이야? 했는데... 옮긴이의 말을 보니, 실뜨기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실을 가지고 노는 장난.


실뜨기를 하면서 여러 모양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낸 모양은 가상이다. 현실이 아니다. 즉 진실이 아닌데, 그것을 진실인 양 믿고 놀이를 진행하는 것이다. 아이 때 그런 놀이는 가능하다. 아이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즉 실뜨기로 만들어낸 것이 진짜가 아니라 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냥 놀이로 즐기면 되니까.


하지만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면 어떻게 될까?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여기고 그것에 의존하는 순간, 현실에 눈 감게 된다. 현실에 눈 감은 결과는 예측하기 힘들다. 그렇게 현실에 눈 감은 사람들이 도달한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나를 조나라고 부르라'(15쪽)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조나'라는 이름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는다면 이를 '요나'로 바꾸면 연상되는 인물이 있으리라. 고래 뱃속에 들어갔던 사람.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상한 세계에 도달한 사람.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어김없이 나를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데려다놓았기 때문이다.'(15쪽)고 하기 때문에 자신을 '조나'라고 하는데... 그는 그렇게 한 나라가 파괴되기까지의 현장에 있게 되고, 그것을 글로 남기에 된다.


따라서 '조나'로 시작한 소설이 한 나라의 파괴로 끝난다. 그가 도착해서 살아가려고 한 나라가 어떤 물질 때문에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까지 죽어가게 되는 현실.


액체를 또는 진흙을 단단하게 만드는 물질, '아이스-나인'이 등장한다. 이것을 만든 과학자는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런 물질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가 있었고, 자신도 흥미를 느꼈으며,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능력도 있었으니, 만들었으리라. 만든 다음 그 결과에 자신이 놀랐을지라도.


무언가가 연상되는 전개 아닌가. 인류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물질, 아니 무기. 그런 무기가 개발되고, 핵무기로 인해 핵전쟁 위기까지 가는 상황을 목격한 작가는 침묵할 수 없었으리라.


게다가 이 작가는 2차 대전 때 포로가 되고, 무고한 시민들이 폭격으로 죽어가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던가. 반전을 외치는 작가가 핵전쟁의 위협을 모른 체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으리라.


그렇다면 이러한 핵전쟁의 위험, 핵무기의 위험을 어떤 식으로 알려야 할까? 정공법으로 기록하는 것도 있겠다. 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보고서, 르포르타쥬라고 하는 편이 좋겠지. 그러면 내용은 건조해지겠고, 사람들에게 잘 다가가지 않겠지. 


최근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정공법으로 핵개발의 위험성이나 전쟁의 참상을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지만, 커트 보니것은 이런 방법이 아니라 우회적인 방법으로 핵무기의 위험이나 전쟁의 참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로 풍자다. 신랄하게 비꼬는, 또는 가볍게 농담하는 것처럼 툭툭 던지는 어투로 내용을 전개함으로써 쉽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쉽게 읽을 수 있는데, 웃으며 읽는데, 읽어가면 읽어갈수록 뒤통수가 켕긴다.


마음에 무언가가 들어차서 그것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가벼운 문장들이라고 생각하고 읽어가는데 읽어갈수록 문장들이 묵직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도대체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정말 이렇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주 적은 양의 '아이스-나인'으로도 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위력을 발휘하는데, 이것이 바로 핵폭탄 아니겠는가. 그런 핵폭탄을 사용하는데 여러 제한 장치를 두고 있지만, 어느 순간 실수로 인해 핵폭탄이 사용된다면... 그때는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펼쳐질 것이다.


소설이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러한 핵무기의 위험성을 연상하게 전개되는데, 그 전에 그러한 물질(무기)를 개발한 과학자의 모습,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나누어주는 자식들의 모습에서,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여러 나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면서 우연히 핵무기가 사용된다면, 그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설 것이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서 엿보게 된다. 이것이 커트 보니것 소설의 장점이다.


앞부분에서 일본에 핵폭탄이 떨어질 때 정작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가 한 짓이 바로 '고양이 요람'을 만든 것이었다는데... 이 고양이 요람이 지닌 의미를 옮긴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고양이 요람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행복과 위안을 주기 위해 만들어낸 모든 종류의 거짓을 상징한다.'(346쪽)


태평양 건너 편에 있는 나라에 폭탄이 떨어져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그 후손들까지 대대로 고통을 받게 되는데, 정작 그러한 무기를 개발한 사람은 자신의 방 안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면? 폭탄이 떨어지는 장면, 아비규환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자신의 방에서 평온하고 한가하게 실뜨기를 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과학-기술이 이렇게 잘못 쓰일 수도 있는데, 과연 과학-기술자들은 그 쓰임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커트 보니것은 과학-기술의 책임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과학자-기술자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보여주면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다는 과학-기술이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도 있음을, 그러한 것이 어쩌면 실뜨기(고양이 요람)처럼 실재하지 않는데, 실재하는 것처럼 우리를 잘못 이끌고 있지 않은지를 생각하게 한다.


과연 커트 보니것이군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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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난두 페소아. 이름을 많이 들었다. 읽은 책은 하나도 없었지만, 한번은 읽고 싶었던 책들. 제목이 [페소아와 페소아들]란 책도, [불안의 책] 또는 [불안의 서]라고 번역된 책도 제목에 끌리게 되었다.


  무언가 분열된 자아를 지닌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제목들. 페소아와 페소아들이라면 이는 하나로 정리될 수 없는 자신을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 그런 분열된 자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면 그는 어쩌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다중우주에 살고 있지 않았을까. 수많은 페소아들은 지구가 아닌 다른 우주에 존재하면서 어느 때 문득 지구에 살고 있는 페소아를 찾아오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  


다중우주라는 개념을 그냥 상상 속에만 존재한다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 인간의 뇌 역시 우주라고 하니, 뇌라는 우주에는 너무도 다양한 '나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을까. 때로는 이런 '나'가, 때로는 저런 '나'가 내 의식 속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다양한 우주에 함께 존재한다면... 그런 '나'가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면, 그들은 각자가 과연 '나'인가? 아니면 그런 '나들'이 모두 합쳐져 '나'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정의하기도 힘든데... 페소아의 '시가집'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 책의 제목이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다.


많은 영혼... 그렇다. 바로 다중우주 아닐까. 어느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수많은 '나들' 그런 나를 어찌 하나로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페소아 역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시가집이라고 이름 붙인 이유로 노래로 불릴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포르투칼어를 모르니, 이에 대해서는 넘어가고.


하지만 느낌이 그러니.. 이 시가집에 실린 시 중에 '이것'이란 시가 있는데, 이 시를 보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보다 상상을 통해 느낀 것이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느낌이 바로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이것


사람들은 나의 흉내며, 거짓말이라고 한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느낄 뿐이다.

상상을 통해.

마음은 쓰지 않는다.


내가 꿈꾸거나 겪는 것 모두,

내게서 실패하거나 끝나는 것,

그것은 다른 무언가 위의

옥상 같은 것. 바로 그

무언가가 아름다운 것.


그래서 나는 가까이 있지 

않은 것 가운데서 쓴다

내 얽힘으로부터 자유로이,

아닌 것에 대해 진지하게.

느낌? 읽는 사람이 느끼라지!

                  - 1934년 4월 출판.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2쇄. 101쪽.


이 시를 읽고 제목이 된 시를 읽으면 페소아란 존재 역시 다양한 페소아들이 모여 페소아가 됐다는 것, 우리 역시 많은 '나들'이 모여 '나'가 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느끼는 '나'가 중요하니까. 그렇게 페소아의 이 시가집을 읽었다. 복잡한 나를, 어느 하나의 나를 배제하지 않고, 그런 나도 나임을 생각, 아니 느끼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매 순간 변해왔다..

끊임없이 나 자신이 낯설다.

나를 본 적도 찾은 적도 없다.

그렇게 많이 존재해서, 가진 건 영혼뿐.

영혼이 있는 자에겐 평온이 없다.

보는 자는 보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느끼는 자는 그 자신이 아니다.


내가 누군지, 내가 뭘 보는지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 된다. 

나의 꿈 또는 욕망 각각은,

태어나는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풍경,

나의 지나감을 지켜본다.

다양하고, 움직이고, 혼자인.

내가 있는 이곳에선 나를 느끼지 못하겠다.


그래서 낯설게, 나는 읽어나간다,

마치 페이지처럼, 나 자신을.

다가올 것을 예상치 못하면서,

지나가버린 건 잊어가면서.

읽은 것을 귀퉁이에 적으면서

느꼈다고 생각한 것을

다시 읽어보고는 말한다. "이게 나였어?"

신은 안다, 그가 썼으니. 

                                 1930.8.24.


페소아. 내가 얼마나 많은 영혼을 가졌는지, 문학과지성사. 2018년 1판 2쇄. 78-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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