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 이 시집 제목을 읽었을 땐 즐거움이 넘치는 시들이 실려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시들다는 말이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니까, 시들지 않는다는 말이 들어 있으므로, 젊고 건강하게 발랄하게 지내는 생활이 표현되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시집을 읽으면서 발랄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어둡다. 쓸쓸하다. 외롭다. 처연하다는 말이 먼저 떠올랐다. 왜 그럴까?


  시 구절을 이해하기 힘든데, 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힘든데... 마치 우주가 까만 어둠에 싸여 있듯이, 시인의 말들은 그냥 어둠 속을 배회하는 낱말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 시가 있고, 그 시들이 우주의 어둠을 연상시키고 있었다. '드무개 마을'이라는 시에서 '드무개'? 하다가 찾아보니 남해에 드무개 마을이 있단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마을이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마을을 시로 표현하는데, 무언가 어둡다. 


'죽은 새끼 짐승, 어둠에 젖어, 늙은 여자의 빈 젖만 빨던, 목소리가 근심스러웠다 등등' 이런 시어들로 인해서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도 어두운 삶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여기에 '우체통'이라는 시도 그렇다. 우체통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역할, 마음을 나눠주는 역할, 그래서 설렘이 있는, 희망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데, 시인의 우체통이란 시를 읽으면 그렇지 않다. 쓸쓸하다. 그냥 홀로 외롭게 서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다 어둡지는 않다. 그냥 느낌이 그렇다는 것. 시인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요'라는 말. 그리고 날짜가 적혀 있는데 2020년 9월 10일이다. 잠깐 의문에 잠겼다. 시인은 불의의 사고로 2020년 7월 24일에 영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9월 10일이라니?


이 의문은 발문을 읽고 풀렸다. 시인의 49재 날이 바로 9월 10일. 올리브 동산은 시인이 쉬고 있는 곳, 우리는 그곳에 있는 시인을 시집을 통해서 만날 수밖에 없다. 이 구절이 어디에 있을까? 유고시집이니 시인이 시인의 말을 쓰지는 않았을 텐데...


읽다가 '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62-64쪽)이라는 시 첫구절이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것을 발견했다. 


다이달로스의 아들이 누구인가? 이카루스 아닌가. 이카루스의 날개라는 말은 많이 쓰는데, 그는 결국 추락하지 않았던가. 하늘로 날아오르기를 바랐으나 결국 땅으로 바다로 추락하고 만 이카루스. 


그렇다고 올리브 동산에서 만나자라는 말을 추락하자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된다. 이 말은 다른 세계를 상상할 수 잇어야 하고,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세계와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만들고, 그 장소에서 서로 어울리자는 말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곳으로 어떻게 가는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그때는 아이가 되지 않으니. 나이든다는 것, 그것은 어릴 적 순수함을 하나씩 잃어간다는 뜻. 즉 식물로 따지면 시들어간다는 뜻. 다르게는 익어간다고, 성숙해진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뜻을 잠시 놓아두자.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가다가는 올리브 동산에서 만날 수가 없다. 하늘로 비상해야 한다. 비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적어도... 우주를 가로질러, 다른 우주로 가려면 그냥 나아가서는 갈 수가 없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가더라도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럴 때 우주를 가로지르는 길로 가야 한다. 


시인은 말한다. '아이는 불가피한 귀결로 자란다. 웜홀 웜홀'('환상통을 앓는 행성과 자발적으로 태어나는 다이달로스의 아이들'에서. 64쪽)


웜홀로 가면 시들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 다른 세계로 간다. 이것이었구나, 시인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 것은. 이 시 구절은 '친애하는 언니'(66-67쪽)라는 시에 나온다.


그래, 웜홀을 통과해 가면 시들지 않지. 시들기 전에 다른 세계에 도달하지. 그렇게 만날 수 있지. 그러한 올리브 동산에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시인이 그렇게 웜홀을 통과했다고 믿으련다. 그는 그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기다리고 있겠지. 


그의 시 중에 '일랑일랑' 시를 읽으며 그가 이미 뿌리내리고 있는 올리브 동산을 나는 이 시집을 통해서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일랑일랑


  어린 묘목을 사왔다


  8월이 살찌고 햇살이 과수원으로 긴 숨을 불어넣던 날 줄무늬 수박이 계절의 한가운데를 가르면 눈물 많은 복숭아가 먼저 생겨 제 울음을 토해내던 날


  1,630마일을 건너 신부를 데려왔다


  늙은 삼촌은 새장가를 갔다 데려온 신부는 맨발이었다 뿌리 휑한 신부는 과수원에 자주 들락거렸다 발이 큰 삼촌이 무서웠는지 맨발인 자기 발이 부끄러웠는지 


  심장이 붉은 토마토가 온점을 찍는 날이 늘어갔다 낯선 곳에서 매미가 울었다 알 수 없는 곳으로 울음이 흘러가고 곳곳에 여름의 문장으로 환한 날이었다


  여물지 못한 안부가 이국의 단어로 속살거리는 저녁 어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스며든다 신부는 설익은 잠을 잤다


  곯은 자두는 단내가 심했다 복숭아가 낙과하고 으깨진 과육은 개미굴의 낙원이었다 신부는 알이 작은 참외를 곧잘 깎아 먹었다


  껍질을 풀어 생애를 더듬는 이국의 당신


  우거진 넝쿨에서 포도가 자랐다 한여름 소화되지 못한 응어리가 초록으로 폭발하듯 신부는 막 깨어난 알맹이를 삼켰다 두번째 뿌리를 내릴 곳에 맨발이 닿고 온 마을에 묘목이 옮겨졌다


  또다른 지구가 태어나고 있었다


김희준,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문학동네. 2021년 1판 6쇄. 104-105쪽


일랑일랑을 찾아보니 동남아시아에서 자라는 나무에서 피는 꽃 이름이라고 한다. 향기가 좋다고 하는데... 향수의 원료가 된다고 하니.


동남아시아에서 온 꽃나무와 동남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이 연결되는 시. 그리고 두번째 뿌리를 내린다는 말에서, 올리브 동산은 특정한 어느 지역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사는 곳을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이 올리브 동산으로 가자고 하고, 거기서 만나자고 한 것은 그곳을 시간이 지나서야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시간을 건너뛰어 또는 그럴 필요 없이 바로 여기를 올리브 동산으로 만들면 된다고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렇게 생각하니 시가 꼭 어둡지는 않다. 우주를 채우고 있는 암흑물질(암흑에너지)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해서 암흑이지만, 그 어둠이 우주를 지탱하고 있으니, 이 시집에서 느꼈던 어둠을 우주의 어둠으로 생각하고 싶어졌다. 그러면 광활한 우주를 우리는 여행하고 있게 되니까.


김희준이라는 시인의 시집을 통해 이렇게 우주를 여행하고, 웜홀로 다른 세계로 곧장 나아가기도 한다. 그의 시에서 '일랑일랑'의 향기를 맡는다고 하면 지나친 과장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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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망상의 시대 - 자기기만의 심리학
어맨다 몬텔 지음, 김다봄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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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하지만,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확증 편향'이다.


보통 과학적 문해력이 뛰어날수록 이성으로 감성을 제어해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어떤 연구에 의하면 '과학적 문해력과 수리력이 늘어날수록 문화 양극화는 완화되는 것이 아니라 심화된다. 일반 대중이 과학을 더 많이 배울수록 ... 이들은 더 능숙하게 자기 집단의 의견과 관련된 경험적 증거를 찾고 - 혹은 필요한 경우 꾸며 내고 - 의미를 부여한다'(263쪽)는 주장이 있다.


이것을 인정하기 힘든가? 과학자들은 합리적이고 냉철하게 이성적인 판단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창조과학론'을 생각해 보자. 진화론을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과학적 지식들을 창조론에 꿰어맞추려고 한다. 


이런 점만 봐도 인간은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꼭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은 이렇게 인간의 합리성에 반하는 사고 경향을 이야기하고 있다.


후광 효과라는 것도 그렇다. 사람이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한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은 다른 분야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엄청난 비난을 퍼붓는다. 그가 자신은 그런 존재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음에도.


특히 유명인들에게 이것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마치 그 사람은 완벽한 존재여야 한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또는 그가 그렇게 행동했다가 판단 기준이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러한 후광 효과는 인간의 이성과는 배치되지만 우리가 실생활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후광 효과말고도 비례 편향이라는 것이 있다. '거대한 사건(과 거대한 감정)에는 마찬가지로 거대한 원인이 있기를 바라는 심리적 갈망'(53쪽)이라고 하는데, 이는 음모론과 연결이 된다. 외계인의 음모라든지 뭐라든지 무언가 알지 못하는 원인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비례 편향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부정 선거라는 음모론이 특정 사람들을 휩쓴 적이 있다. 선거에서 패배한 이유를 자신들의 정책이 잘못되었거나 정치를 잘못했다는 쪽에서 찾지 않고 부정 선거라는 쪽으로 돌리는 것, 이것도 일종의 비례 편향이다. 


굳이 정치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이러한 비례 편향에 빠져 원인을 외부로 돌릴 때가 많다. 힘없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


앞에서 든 것들 외에도 참 많은 생각의 오류, 판단의 오류들이 나오는데 '매몰비용 오류, 제로섬 편향, 생존자 편향, 최신성 환상, 과신 편향, 환상 진실 효과, 쇠퇴론, 이케아 효과' 등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들이 우리들의 생활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여러 사례들을 들어 보여주고 있는데...


읽으면서 맞아, 나도 그런 적이 있어.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하는 책이다. 하지만 이런 사고들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가령 이케아 효과 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노력이 들어간 존재에 다른 것보다 더 애착을 느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 존재에 쏟아부은 자신의 노력은 양으로, 그리고 다른 사람의 판단으로 제한되지 않으니 말이다. 자기가 시간과 공력을 투여한 존재에 어찌 애정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전문가가 만든 훌륭한 작품보다도 더 나에게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높은 가치를 매길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높은 가치에는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 들어 있으니까. 


이러한 긍정적인 사고 경향도 있지만 우리를 부정적인 쪽으로 몰아가는 사고 경향도 많으니,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정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늘 합리적일 수는 없지만, 대체로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려 하지 않는가. 그것이 진화의 결과이기도 할 테니까.


그러니 이러한 사고 경향을 알아두는 것은 그런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그 상황에 맞는 사고 경향을 떠올릴 수 있고, 떠올리는 순간 그러한 사고 경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적어도 그러한 사고 경향을 떠올렸다는 것은 감정에 푹 빠져들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니까. 자신을 조금 떼어놓고 볼 수 있는 이성이 작동하는 시간을 확보했다는 뜻이니까.


하여 이 책에 나온 많은 사고 경향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많은 대담들을 통해 그러한 경향에 빠진 사람들과 또 자신의 경험을 적절히 조화시켜 이 책을 썼기에 이해하기가 쉽고, 그것들이 지닌 위험성을 파악하기도 쉽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경향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하면서 자신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보게 하고 있으니, 정보의 바다가 넘실대는 현대 사회에서 차근차근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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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소년이 파랗지는 않다
조지 M. 존슨 지음, 송예슬 옮김 / 모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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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이자 퀴어인 남자 이야기. 자신에게 주어지는 기대와 자신의 성향이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어떤 선택을 할까?


선택을 할 수 있다면 별 문제가 없다. 이 책의 저자인 존슨은 1985년 생이다. 그렇다면 지금 40이라는 말인데, 그가 살아온 시대라면 흑인도 퀴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아니다. 그는 흑인이자 퀴어라는 이유로 언제 어떻게 배제되고 목숨을 잃을지 몰라 두려워 한다. 


하지만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두려워 하는 세상이라면 그건 잘못된 세상이다. 마찬가지로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제되는 세상이라면 그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 이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성적 지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남들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히기를 두려워하던 존슨. 그렇다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줄넘기를 좋아하지만 미식 축구도 하고, 육상 선수로 나서기도 하는 등 소위 남성성이 강하다고 하는 운동에도 즐겨 참여한다.


성적 지향에 따라 좋아하는 운동과 잘하는 운동이 따로 있을 수가 없지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니... 그 역시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밝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자신을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가족이 있었음에도.


따스하게 감싸주는 가족들에게서 자란 존슨에게도 세상은 위험한 곳이었다. 경찰이었던 아빠는 그것을 더 잘 알았을 것이다. 흑인 경찰이지만, 흑인 경찰의 아들에게는 언제든 경찰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이 책에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흑인 남성들 이야기가 나온다. 병으로 죽는 경우도 있지만 폭력으로 죽는 경우도 있으니...


그렇지만 가족의 지지는 삶을 살아가는데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어려움을 건네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자존감을 잃지 않고 살아가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존슨은 그런 환경에서 자란 것을 축복이라고 한다.


게이 자식을 두느니 죽은 자식을 두는 것이 낫다고 주장하면서 자식을 살해한 사람 이야기도 있는데, 존슨에게는 자신을 자신으로 인정해주는 가족이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그냥 친구로- 친구가 되는데 성적 지향성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 현실이었으니 -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것은 그에게 축복이었다.


이런 축복을 그는 자신의 축복만에 그치게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쓴 이유가 그것이다. 여전히 성적 지향성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고, 그것을 밝히기를 꺼리는 청소년들도 많다는 것. 그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여정을 들려줌으로써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


그래, 세상이 하나로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답답할까? 다양성이 삶을 더욱 풍부하게 해준다고 하면서 유독 성적 지향성이나 피부색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경우는 무엇이란 말인가.


가족의 개념을 반려동물이나 인공지능 로봇까지로(사이보그) 확장하는 시대에 그래도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인 인간을 왜 구분하면서 내치려고 할까?


이런 시대에는 오히려 더욱 더 함께하려고 해야 하지 않나. 다르다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런 다름이 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고...


저자가 주장하듯이 성적 지향을 선택할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존중해주는 것이 더욱 바람직한 사회 아닌가.


여전히 차별금지법이 동성애 활성화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과연 이 책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저자의 이 말을 명심했으면 한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커뮤니티에 공평과 평등을 부여할 때, 피해를 보는 사람은 억압자뿐이다.' (126쪽)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돌려주고 싶다. 당신은 억압자이냐고? 왜 약자들에게 공평과 평등을 부여하면 안 되냐고?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 '흑인다움과 퀴어함, 그 밖에 정체성을 누르는 억압에 맞서 싸울 때 가장 든든한 도구는 바로 제대로 된 교육이다.' (93쪽)


흑인다움이나 퀴어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강자들은 그것들을 의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식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언급을 하지 않는 것. 백인이 강자인 사회에서 백인다움을,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에서 이성애자임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으니, 여기서 흑인다움과 퀴어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미 차별받는 소수자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함의 주장이다.


그만큼 '주류 사회는 순전히 다름을 억압하려고 '정상' 개념을 세운다'(13쪽)는 말이 여전히 통용되는 것이다.


흑인 남성이자 퀴어로서 살아온 존슨의 회고록, 여전히 소수자들이 다르다는 이유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음을, 이들이 이렇게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자신들의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 또 앞으로 살아갈 세대들이 이것을 의식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 점을 명심하자.


흑인여성이자 퀴어인 오드리 로드의 [자미], 백인여성이자 퀴어인 재닛 윈터슨의 [오렌지만이 과일은 아니다]도 같은 맥락의 책이다. 다들 소수자지만 그들 또한 다른 상황, 다른 삶을 살았으니 함께 읽으면 좋을 책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례를 보여준 책을 읽어도 좋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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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상대가 똥을 쌌다고 생각했나 보다. 똥 싼 상대를 감싸주지 않고 똥 쌌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다.


  그냥 놔두었으면 그가 똥을 쌌든 싸지 않았든 사람들은 관심이 없었을 텐데...


  오히려 말을 함으로써 똥을 사람들에게 퍼뜨렸다. 똥 냄새가 천지에 진동하게 했다. 그러면서 내가 똥 싼 것도 아닌데 왜 똥 싼 사람을 비난하지 않고 자신을 비난하냐고 한다.


  자신이 똥 싼 얘기를 하지 않았다면 똥에 관해 사람들은 생각도 하지 않고, 이야기도 하지 않고 똥 냄새로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텐데.


자신이 똥 냄새를 퍼뜨려놓고, 왜 그러냐고 하면 무어라 해야 할까? 똑같이 똥 냄새 퍼뜨리는 사람이 되기 싫어 입 다물고 있어야 하나?


이미 퍼진 똥 냄새를 막는 길은 그 냄새를 인식하게 한 사람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 그가 더 이상 그러한 말을 퍼날라 세상을 더럽히지 않도록 하는 것.


하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니, 네가 잘못했어, 당신이 잘못했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의 말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것. 그를 그냥 놓아두는 것.


그렇게 그가 속이 터질 것 같아 대나무숲에 들어가 떠들어대더라도 대나무숲에 들어가게 할지언정 우리들에게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할 것.


그런 생각을 했다. 모 정치인 때문에 더러워진 내 귀를 씻으면서. 그러다 이윤학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이 사람이 왜 그랬을까 퍼뜩 떠오른 생각. 아, 이 사람에겐 어른이 없구나. 이 사람은 어른을 만나지 못했구나, 어른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른을 알아보지 못해서 그렇게 귀가 닫혔구나, 입만 살았구나. 그 입으로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해서 사람들 마음을 어지럽혔구나.


이런 사람을 조용하게 하는 것. 그가 남들 앞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지 못하게 그를 홀로 놓아두는 것. 왜 그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나? 이미 다독거림은 지나갔는데... 그냥 놓아두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럼에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강제로라도 남 앞에 서지 못하게, 남들에게 말을 퍼뜨릴 수 없게 해야겠지.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야겠지.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모 정치인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시. 바로 이윤학의 '어머니 말씀'이다. 물론 그가 이 시를 들을 귀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를 비난(욕)하지는 않으련다. 똑같은 사람이 되기 싫어서. 다만,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련다. 그가 더 냄새를 퍼뜨리지 않게 그냥 조용히 있게 하고 싶어서.


이 시에서 말하는 어머니와 다른 태도겠지만,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아닐까 하고... 


   어머니 말씀


똥독도 항상 다독거려야 한다.

다독거리지 못하면

휘젓지나 마라.


못 박힌 

소나무 작대기로

휘젓지나 마라.


네게만 냄새 난다.


이윤학, 그림자를 마신다. 문학과지성사. 2005년. 105쪽.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설해목'이란 글이 있다. 그 글의 마지막에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 (법정, 무소유. 범우사.1996년. 2판 49쇄. 39쪽.)


자기 지식만을 자랑하며 남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부드럽게 남을 바라보고 대하는 자세를 지닌 정치인을 이제는 기대해도 될 때가 되지 않았나. 이 시에 나오는 어머니 말씀과 법정 스님의 설해목에 나오는 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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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면 우리는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1
정보라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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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기후 재앙이 일어나는 때다. 세계 각국은 기후 재앙을 과학기술로 풀려고 한다. 인공 태양을 만드는 것. 그러나 태양은 수소폭탄과도 같으니, 또다른 수소폭탄을 만든다고 오해하는 나라도 나온다. 이것을 제어하기 위해 로봇을 만든다. 로봇이 판단하게 한다. 무엇이 위험한지, 그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서.


하지만 로봇은 판단한다. 인간이 위험요인이다. 인간을 제거해야 위험이 사라진다. 그래서 로봇은 인간을 제거한다. '지구상 다른 모든 생물종을 위한 최선의 안전장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이었다.'(21쪽)


이 소설에는 세 부류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흡혈인. 본래 인간이었으나 흡혈인이 되어 로봇에 맞서 싸운다. 이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자신을 인간이라 믿는 로봇 빌리. 그리고 인간. 인간은 다시 로봇에 대항하는 인간과, 로봇을 추종하는 로봇의 노예 역할을 하는 인간으로 나뉜다.


여기에 지나가는 것처럼 흡혈인의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성폭력의 위협에 놓인 여성을 이야기한다. 여성 화장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해서 보는 남성들. 여성을 자신들의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는 남성들. 인간이 로봇에 의해 멸망해 가는 와중에도 여성의 화장실을 몰래 보려는 성적 욕구에 지배당하는 남성들. 그 남성들을 물어뜯는 화장실의 여자. 그 여자 이야기를 하면서 흡혈인의 유래를 이야기하는데, 이는 사실 소설에서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다만, 작가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폭력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 역시 디스토피아니, 그런 디스토피아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면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을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되는 것.


기후 재앙 역시 비인간적 폭력 아니던가. 자신이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인식하지 못하고 계속하는. 그래서 본질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기술로 상쇄하려는 모습. 지금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자세 아닌가.


여기에 맹목적으로 기계를 추종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합리성은 없다. 그들은 노예에 불과하다. 어쩌면 과학기술이 인류가 지닌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믿는 사람들을 보이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겠지만, 진실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념만을 밀어붙이는 특정 종교집단을 떠올리게도 한다.


이들에게 소수자들의 삶은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그것은 악에 물든 행위라고. 그런 사람들을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런 종교인들의 모습을 이 소설에서 기계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기계를 위해 사람들을 죽이려 하는 인간들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이런 인간들과 달리 로봇으로 만들어졌지만 인간이라 생각하는 빌리는 "인간의 기준이 뭐죠?"(65쪽)라고 묻는다. 그렇다. 빌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처럼 생각하고 인간처럼 감정을 지니고 있다고. 


이때 흡혈인인 나는 대답을 하지 않다가 나중에 '나는 빌리가 질문했던 인간의 조건을 생각했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체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인간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눈물, 땀, 피, 혹은 진물이나 오물.'(83쪽)이라고 생각한다.


인간 몸의 약 70%가 물로 이루어졌다면 적절한 때에 적절한 액체가 나오는 것이 당연해야 한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데...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인간성(이것에 대한 정의는 거의 무한하다)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여기에 그러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라면 인간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 인간에 대한 정의의 확장. 갑자기 해러웨이가 생각나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그래서 나는 빌리의 죽음에서 '기계로 태어나 인간으로 죽은 존재가 있었다'(124쪽)고 말한다. 빌리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을 생물학적인 존재로만 규정하지 않고 포괄적으로 범위를 넓히는 것, 그것이 현대인이 생각하는 인간일지 모른다.


그래서 이 소설에서 흡혈인인 나와 로봇인 빌리는 디스토피아에서 인간으로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로봇에 대항해서, 비인간성에 대항해서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살아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인간 아니겠는가.


기후 재앙의 위기에 있고, 각종 과학기술이 인간을 위협하기도 하는 이때,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찌해야 하는지, 무엇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인지 다시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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