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
정지아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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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정지아 소설, 무거운 내용인데도 가볍게 읽었다. 무거움을 웃음으로 덜어주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자본주의의 적], [나의 아름다운 날들], [빨치산의 딸]들.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사실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을 하기엔 다루는 내용들이 무겁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소설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엄혹한 시절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실린 작품들이었는데...


그럼에도 그 엄혹함 속에서도 웃음이, 낙관, 긍정이 나타나서 좋았다고나 할까.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고꾸라지지 않고 기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 이야기. 그런 사람을 소설에서 만나는 것은 우리 삶에 도움이 된다.


이 소설집도 마찬가지다. 분명 소설의 주요 인물들은 한 세상을 살아내고 이제는 스러질 일만 남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정지아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에 따스한 눈길을 보낸다. 그들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다가오지만, 흑백사진은 그 자체로 아련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안쓰러움, 그러나 그토록 오랜 세월을 거쳐왔던 신산한 삶들이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치매에 걸린 노인, 한 평생 자신의 마을을 떠나보지 못한 사람 등을 보여주면서도 그들에 대한 애정을 놓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살아온 사람들, 지금은 늙고 병들어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자신들의 삶을 살아왔음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봄빛... 그렇다. 봄빛은 겨울을 나고 이제 새로운 시작을 할 때 이미 지나온 것들을 따스하게 비춰준다. 그러한 봄빛 속에서, 봄볕 속에서 고단했던 삶을 위로받을 수 있다. 이 소설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고단한 삶을 잠시나마 위로해주는 봄빛(봄볕)일 것이다.


11편의 소설이 실려 있는데 어느 소설도 순탄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주인공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살아간다. 운명을 받아들이든 맞서 싸우든 자신의 삶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고,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살아서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길보다는 과거를 돌아보는 길이 훨씬 길어진 사람들. 그 길을 되짚어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길은 끝나지 않는다.


끝까지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는다. 하여 많이 걸어온 길, 잠시 쉬어가는 사람들, 그 쉼에 함께하는 빛, 봄빛, 봄볕. 과거의 신산함을 녹여주고 쉬게 해준다. 완전히 녹이지는 못하겠지만, 또한 봄볕에 피부가 타듯이 또다른 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우리가 가고 있는 길에서 잠시 쉴 때, 그 쉼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사람들, 장소들이 있음을...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 삶이라는 길을 함께해주는 봄빛과 같은 역할을 한다. 언뜻 쇠락한 삶들이 풍경으로 제시되는 것 같지만, 멈춤이 아니라 나아감을, 우리가 지나온 길과 가야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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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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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自手成家)라는 말이 있다. 긍정으로 쓰는 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와 같은 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개천'이라는 말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좋지 않은 환경이라고. '용'은 그러한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한 존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자수성가 역시 마찬가지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사람을 말한다. 과거와는 단절된 현재의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때 과거는 극복해야 할 무엇이지 자신을 이루고 있는 한 요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좋지 않은 것, 떨쳐버려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이 지나온 과거다. 


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고, 한심한 사람이라고 무시를 한다. 개천을 빠져나온 용이 다시는 개천으로 돌아가지 않듯이, 자수성가한 사람 역시 자신이 자란 환경에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그곳은 지워버려야 할 곳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삶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에게는 이곳의 사람들, 그리고 미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과연 그런가? 자수성가란 말과 개천에서 용난다라는 말에는 이상하게도 '능력주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그러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자신이 그곳을 벗어난 것이 순전히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 때문일까? 노력이나 능력도 있었겠지만 우연이나 또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환경이 작동했을 수도 있다. 그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자신은 그곳을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즉, 온전히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그곳을 벗어났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환상을 지니고 있으면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 자신과는 다른 무능력한 사람들,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경멸받아 마땅한 사람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노력을 한다. 능력을 발휘하려 한다. 한데 어떠한 조건이 그것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다. 우연히 그들은 자신들의 조건 속에 갇혀 그것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그곳을 벗어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개인에게만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디디에 에리봉이 쓴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이 점을 생각하게 해준다. 노동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 그곳을 벗어난 그는 랭스에 살고 있는 부모님을 무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구시대에 갇혀 지낸 존재라고, 교류도 하지 않는다. 형제들과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잘났으니까. 노력을 해서 벗어났으니까. 


그러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어머니와 함께 본 사진들을 통해 다른 것을 깨닫는다. 자신이 그렇게 무시했던 그들의 삶이 무시당할 삶은 아니었음을. 그들 역시 그런 조건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그것이 랭스로 되돌아간 그가 깨달은 것이다.


자수성가한 사람은 뒤돌아보는 경우가 드문데, 그는 뒤돌아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무엇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을까? 성소수자이자 노동계급 출신인 그는 성소수자에 대한 글을 쓰고, 성소수자에 차별에 맞선다. 성소수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해한다. 그들이 편견과 모욕에 갇혀 살고 있음을,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제약을 받고 있음을 이해한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는 되는데 노동계급에 대해서는? 그것도 가장 가까운 노동계급인 가족들에 대해서는? 그는 여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하나가 아님을. 노동계급 출신의 사람들이 계속 어렵게 살아가고, 좁은 시야에 갇혀 있는 것도, 그들이 어쩌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하는 것도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극우세력에 투표를 한다고 비판만 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그는 단지 개인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야 함을 자신의 삶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랭스를 되돌아보면서 그는 자신의 삶에는 커다란 조건이 두 개 있었음을, 하나는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것과 또다른 하나는 성소수자라는 것을.


성소수자로서의 삶,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은 이해하면서 노동계급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지니지 않았음을 깨달으면서, 이제 그는 과거와는 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수성가한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 그렇게 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살피는 관점을 지니게 되는 것, 개천에서 난 용이 하늘에만 머물지 않고 다시 개천에 가서 개천을 살피는 일을 하게 되는 것, 이것이 [랭스로 되돌아가다]가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능력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성공한 디디에 에리봉을 통해서. 몇몇 성공한 사람들을 예로 들면서 다수의 사람들을 비판하는 관점을 버려야 함을. 그들을 틀 지우고 있는 환경을 파악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해야 함을 저자는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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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스 비크의 마지막 하루 - 2023 브라게문학상 수상작
프로데 그뤼텐 지음, 손화수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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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한 남자. 집을 나와 평생을 함께했던 자신의 배에 오른다. 배로 사람들을 실어날랐던 사람. 노르웨이, 피오르. 이곳에서 저곳으로 사람들을 이동시켜주었던 그. 이번엔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하고 배에 오른다. 이젠 자신을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가게 하러.


그가 집을 나와 배(페리)를 몰고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펼쳐진다. 어떤 사람들은 주마등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죽기 전에 자신의 일생이 주욱 펼쳐진다고.


이 소설 역시 그렇다. 닐스 비크라는 사람이 죽음으로 가는 길에 배에서 만났던 사람, 자신의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 사람들과의 관계. 그가 페리로 이곳과 저곳으로 이어주었듯이, 죽음에 임박해서는 이제 그런 사람들을 자신의 삶과 죽음 사이에 놓는다. 마치 징검다리처럼.


잔잔하게 펼쳐진다. 잔잔하다? 과연 그럴까? 멀리서 보는 바다와 산은 보기에 좋다. 어떤 위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 보면 아니다. 바다는 천변만화하고 온갖 위험이 어떻게 다가올지 알 수 없다. 산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 인생을 바다와 산에 빗대는 경우가 많은데, 인생 역시 그렇게 굴곡이 많다. 멀리서 보면 평평하고 단조로워 보이겠지만, 직접 경험해 보면 너무도 복잡하고 울퉁불퉁하다.


피오르 해안의 아름다움을 '자연'으로 뭉뚱그리고, '이곳의 자연이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다며 찬사를 늘어놓(196쪽)'는 사람 앞에서 ,


'닐스는 이곳 사람들은 '자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 가리킬 수 있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어우러져 살 수 있는 것은 숲과 바위와 산과 강과 피오르지, '자연'이 아니라고 했다.'(196-197쪽)


이것이 인생이다. 마냥 좋아보이는 것만이 인생은 아닌 것이다. 닐스 비크의 삶이 평탄하고 행복했을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없다. 죽음을 앞둔 닐스의 회상은 아름답다. 평화롭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평화가 뒷부분에 가면 그의 인생에 평화만이 있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동생의 죽음, 딸들의 행복하지 않은 결혼 생활 등등. 여기에 뇌졸중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의 모습. 이것은 결코 평탄한 삶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의 삶이 결코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지 않는다.


아내와는 평생 사랑하고, 아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나중에 만날 것을 기약하는 모습. 자식들의 삶 또한 자신들의 삶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는 모습. 


어쩌면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삶에는 그 나름의 특별함이 있다. 우리 모두가 특별한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닐스 비크의 평범한 삶을 통해서 특별함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삶은 모두에게 특별함을, 특히 자신의 삶을 충실히 산 사람의 삶은 더더욱 특별함을, 그래서 그러한 삶이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가 페리를 운전하면서 만난 사람들, 죽어가면서 그 사람들과의 만남을 떠올리고, 또 이미 죽은 사람들을 배에 태우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해가는 닐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삶의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은 바람과 바다와 땅, 미움과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았던 데 감사하고 작별을 고하는 것이다. 삶은 끝없는 초안과 스케치이며,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자 과거와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일단 시작된 이야기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으며, 좋든 싫든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따라가야 한다.'(268쪽)


이런 통찰. 평범한 삶 속의 특별함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특별함이란 꼭 겉으로 드러내어 남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감동을 주는 소설이다.


그리고 닐스가 아내 마르타를 사랑하는 모습. 둘이 사귀게 되는 장면과 다시 죽음에 이른 닐스가 기다리고 있던 마르타를 만나는 장면. 


피오르는 어떻게 건너왔나요? 그가 물었다.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82쪽)


어떻게 피오르를 건너왔나요? 그가 물었다.

물론 자전거를 타고 왔죠. 그녀가 대답했다. (270쪽)


이 대화가 살짝 변주되면서 둘이 만나 함께 살게 되는 장면과 다시 죽음 이후에 함께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아름다운 사랑.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좋지만 이렇게 마르타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이별은 오래 전에 봤던 영화 [노트북]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만큼 격정적인 사랑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솔직담백한 사랑. 그리고 마지막까지 같이 하는 모습이 이 소설의 닐스와 마르타를 영화 [노트북]의 두 사람과 연결짓게 하고 있어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2004년에 우리나라에 처음 개봉이 되었을 때 보았는데, 재개봉한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어 찾아보니, 2016년, 2020년, 2024년에 재개봉이 계속 되었다고 한다. 


영화 속 부부의 사랑 못지않게 닐스가 마르타를 사랑하는 모습이 잔잔하게 펼쳐지고 있어서 영화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랑에서도 굴곡이 있음을, 그 굴곡을 넘어 함께했을 때 더 큰 사랑과 감동이 있음을 영화와 소설이 모두 느끼게 해주고 있다.


이 작가의 다른 작품도 찾아 읽어봐야겠단 생각을 하게 만든 감동적인 소설이다. 물론 이 소설에는 이런 사랑 말고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불의에 저항하는 닐스 비크의 모습이라든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사람의 이야기라든지, 닐스 비크에 연대해 결국 정의가 이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페리 동료들의 모습이라든지, 여러 사회문제도 닐스 비크의 삶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것들을 평범하게 살아가는 닐스 비크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바로 특별함임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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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오드리 로드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상당히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았다.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낸 시를 쓰기도 했다고 했는데, 마침 시집이 번역이 되었으니 읽어봐야지.


  흑인으로서, 여성으로서, 성소수자로서 겪은 일들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물론 번역이 된 시라서 영어로 어떤 표현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오드리 로드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는 어렴풋이 느낄 수가 있다.


  유니콘 하면 뿔 달린 말이다. 주로 하얀 식의 말을 떠올린다. 왜일까? 그만큼 백인 신화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세상을 주무르던 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유니콘 하면 하얀 색의 말을 떠올리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진 백인들은 처음에 흑인이나 인디오들이 인간인지 아닌지 가지고도 자기들끼리 논쟁을 했다고 하니, 그것도 모자라 자연사박물관에 그런 사람들을 전시까지 했다고 하니, 그들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 신화들이 지금도 사람들 무의식에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고정관념에 틈을 낸 사람이 오드리 로드다. 유니콘을 검은색으로 표현했다. 그렇다. 왜 상상 속 동물인 유니콘이 꼭 하얀색이어야 할까? 유니콘 역시 다양한 색깔을 지닌 말로 상상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가 아니라 다양하게 상상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이 인정받는 세상, 이것이 바로 오드리 로드가 꿈꾸었던 세상 아닌가 한다. 


'초상'(90쪽)이란 시에서 오드리 로드는 이렇게 말한다.


'강인한 여성들은 / 자신의 증오가 / 어떤 맛인지 안다 / 나는 언제까지나 / 바람 부는 곳에 / 둥지를 지어야 하겠지' ('초상' 중에서)


피해가지 않는다. 정면으로 맞서려 한다. 그것도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그렇게 나아가려는 오드리 로드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여성이 말한다'(24-25쪽)에서는 '나는 여성이었다 / 아주 오래전부터 / 내 미소를 조심하라 / 나는 오래된 마법과 / 정오의 새로운 분노 / 당신에게 약속된 / 드넓은 미래를 품은 위험한 존재 / 나는 / 여성이고 / 백인이 아니다.'('여성이 말한다/ 중에서)라고 하면서 자신이 여성임을 백인이 아님을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다. 


그러한 존재가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더라도 그것이 오드리 로드가 나아갈 길이다. 그래서 이 시집의 1부에서는 흑인 신화에서 언급되는 여신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백인의 세계에,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갇혀 있지 않고, 아프리카에서 전승되어온 신화들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 신화를 신화로만 삼지 않고 바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로 나오게 하고 있다.


당당하게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가려는 존재, 그러한 존재의 모습을 이 시집에서 만날 수 있다.


덧글


한 가지 바로잡을 것이 있다. 93쪽에 실린 시 '앨빈 형제'(93쪽)에서 '우린 함께 브라우니에서 나올 수 있었어'라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번역자 주에 브라우니(Brownies) : 초콜릿 케이크, 7-10세 또는 11세까지의 어린 아이들로 구성된 스카우트단 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전적 의미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드리 로드의 자서전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자미]를 읽어보면, 52-56쪽 정도에 앨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이 시에서 말하는 브라우니는 학급에서 우수 모둠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속한 모둠을 말하는 것이다.


오드리 로드는 앨빈이 숫자를 읽을 수 있는 덕분에, 자신이 글을 읽는다는 능력과 합심하여 둘이 브라우니 모둠에서 페어리 모둠으로 옮겨가게 된 이야기를 이 부분에서 하고 있다. 그러니 스카우트 단이 아니라 학생들을 수준별로 구성했던 모둠, 그것도 보통 또는 열등하다고 인정한 아이들이 속한 모둠이 '브라우니'다. 이렇게 주를 달아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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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동물의 탄생 - 동물 통제와 낙인의 정치학
베서니 브룩셔 지음, 김명남 옮김 / 북트리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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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로 시작하자. 이 중에서 유해동물이라고 낙인 찍히지 않은 동물은?

(쥐, 뱀, 생쥐, 비둘기, 코끼리, 고양이, 코요테, 참새, 사슴, 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쥐와 뱀은 망설이지 않고 유해동물로 꼽을 것이다. 그런데 사슴은? 우리나라에서 가끔 고라니가 출몰해서 밭작물을 먹어치우는 일들이 있으니, 고라니와 비슷한 사슴도 유해동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도시에서 엄청난 배설물을 낙하시키는 비둘기도? 생쥐는 쥐와 구분하지 않을 테니, 유해동물이고...참새? 예전에 곡물을 먹어치운다고 박멸해야 할 새로 규정한 적도 있으니 당연히 유해동물? 고양이? 길고양이, 들고양이를 유해동물로 볼 수 있나? 누구는 유해동물로 보고, 누구는 먹이를 주어야 하는 귀여운 동물로 보고 있으니,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고... 코끼리는?


다양한 질문을 할 수 있다. 유해동물에 대한 기준이 뭐지? 하는 질문도 있을 수 있고.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동물을 유해동물로 본다면, 이 정의에서 벗어나는 동물이 있을까?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는 말에는 시간과 장소가 개입한다.


즉 인간이 살고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 있는 동물들은 절대로 유해동물이 될 수 없다. 그냥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인간은 생태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러한 동물들 역시 지구 생태계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긴다. 단, 시간과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


이러한 동물들이 인간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오면 그때부터는 사정이 달라진다. 어떤 동물은 유해동물이 된다. 아니, 대부분의 동물이 유해동물이 된다. 인간의 삶에 어떤 식으로든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편안하게 여겨지는 끼어듦이 아니라 인간을 불편하게 만드는 끼어듦. 


이러한 불편한 끼어듦을 느끼게 하는 동물은 유해동물이 된다. 지리산 자락에서 사는 반달곰은 절대로 유해동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캠핑장에 들어와 인간을 위협하는 곰은 유해동물이 될 수도 있다.


산에서 사는 고라니는 우리에게 자연을 즐기게 해준다. 하지만 밭작물을 해치는 고라니는 유해동물이 된다. 어떤 사람은 뱀을 반려동물로 삼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뱀을 보기만 하면 피하거나 죽이려 들기도 한다.


결국 유해동물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다. '거리'의 문제다. 이런 '거리'는 사람들끼리의 관계에도 적용이 된다. 지나치게 가까워도 우리는 피곤함을 느낀다. 피곤함이 불편함이 되면 상대에게 불만을 품고, 상대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같은 사람들끼리도 그런데 동물들이야... 앞에 언급한 열 종류의 동물은 이 책에서 유해동물로 취급받았던 적이 있었던 동물들이다. 그런 동물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피고 있는데...


인위적으로 환경을 바꾼 인간에게 책임을 묻기는 쉽지만, 진화론을 생각하면 동물들은 언제든 어떻게든 우리의 예측과는 다르게 진화할 수가 있다. 그들의 서식지도 한 군데로 국한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 점을 인정한다면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당연히 '공존'이다.


이 '공존'이 마냥 평화롭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온갖 동물들이 평화롭게 함께 지내는 모습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한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누군가의 삶이 유지된다. 그것이 자연이다. 그러니 '공존'에서 삶과 죽음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공존'이 최소한의 피해가 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우리가 다른 존재들에 대한 지식을 쌓아야만 하고, 지구가 오롯이 인간만의 것이 아님을 자각해야 한다. 다른 존재들과 적당한 거리를 두는 인간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공존'이다.


때로 인간의 것을 그러한 '자연'에 돌려줄 줄도 알아야 하고... 인간이 아무 것도 '자연'에 돌려주지 않고 자기 것만을 지니고 살 수는 없으니까. 그것은 '공존'이 아니니까.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레 그러한 관점을 지니게 된다. 다양한 동물들의 사례를 통해, 또 저자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동물과 인간이 '공존'해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으니까. 무엇보다도 나 이외의 존재를 쉽게 판단하는 일을 삼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동물들에게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참고로 이 책에서는 앞에 언급한 동물들을 모두 유해동물로 여기는 지역,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존'에는 적당한 '거리'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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