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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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평등 시대. 참 오래 전부터 하던 말이고, 양성평등 교육, 학교에서도 강조하고 있고, 성평등은 이제 두 말 할 필요없는 당연한 일이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이론에서는.

 

그런데 현실을 따져보면 과연 그럴까? 미투 운동으로 대변되는 성추행 폭로들을 보면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들에게 차별을 받고 있다. 

 

성추행뿐만이 아니라 승진에서도 여전히 유리벽이 존재한다고 하는데... 이런 현실에 동성애자 여성은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겠다.

 

여성이라는 존재에 성소수자라는 존재가 덧붙여지니 이들이 서로를 보듬고 더 나은 조건으로 나아가게 하지 못하고, 서로가 엉켜 더욱 낮은 곳으로 끌어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러면 안 되는데...

 

여전히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심하고, 초등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했다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항의를 받은 교사가 있고, 교육방송에서는 이런 성소수자들이 참여하던 프로그램이 종료하는 일도 있었으니...

 

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우리 사회에서 정상 범주 -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일이 이미 비정상인데, 다수를 벗어난 사람들을 비정상이라고 칭하는 현실에서 그냥 이 용어를 쓰면 - 에 속한다고 여기는 사람보다 험난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을 보라. 동성애자 딸이 나온다. 그런데 주인공은 동성애자 딸이 아니다. 동성애자 딸을 바라보는 엄마가 주인공이다. 엄마가 서술자로 나와 자신과 딸, 그리고 '젠(이제희)'이라는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우선 엄마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졌었지만 딸을 키우기 위해 직장을 포기한다.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수는 없다. 딸이 큰 다음 살아가기 위해 직장을 얻는데, 마지막에 얻은 직장이 요양보호사다.

 

아픈 사람, 이젠 죽음을 앞둔 사람을 돌보는 사람. 엄마의 역할은 이렇게 줄곧 누군가를 돌보는 일로 점철된다. 이것이 인정받아야 하지만 자본의 논리 앞에서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 수치로 - 연봉 또는 월급이라는 - 표현되는 경제 논리, 자본 논리 앞에서 돌봄은 돈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요양소들이 모두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겠지만 돈을 목표로 하는 요양소들이 보호사들에게 요구하는 일은 결국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인간적인 돌봄은 없다. 엄마가 일하는 직장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돌봄을 우선 가치로 두는 사람, 그 직장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엄마 역시 해고 통보를 받는다. 왜냐하면 상품으로  대해야 할 사람을, 사람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이런 엄마는 '젠'이라는 과거에는 남을 돕고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지금은 누구도 돌보는 사람이 없고 치매까지 걸린 사람을 결국 제 집으로 데리고 오는 일은 여전히 여성과 돌봄이 관계가 있다는, 여성이 돌봄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읽힌다.

 

자신보다 윗세대를 돌봄으로 대하는 엄마는 자기 딸이 이런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따르기를 바라지 않는다. 엄마는 동성애자인 딸에게 나중에 너도 이렇게 될 수 있다고 몸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엄마는 여전히 '보통-정상'이라는 범주를 포기하지 않는다. 딸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이해까지 도달하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내가 너희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까. 때로 기적은 끔찍한 모습으로 오기도 하니까.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오긴 오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잖니. 나한테 그만큼의 시간이 남았는지 모르겠다.' (194-195쪽)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딸애와 함께 사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이 말에서도 어떤 희망이 읽히는데... 소설의 맨 끝은 이렇게 끝난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아득한 내일이 아니다. 마주 서 있는 지금이다. 나는 오늘 주어진 일들을 생각하고 오직 그 모든 일들을 무사히 마무리하겠다는 생각만 한다. 그런 식으로 길고 긴 내일들을 지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볼 뿐이다.' (197쪽)

 

'젠'의 장례식장에서 엄마가 속으로 하고 있는 다짐이다. 이 다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딸이 늙었을 때, 자신이 생각하는 보통 가족을 이루지 못했을 때 겪게 될, 혹 '젠'과 같은 최후를 맺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신을 질책한다고 할 수 있다.

 

내일은 내일이다. 지금은 지금이다. 딸이 지금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오늘을 오늘답게 살아가면 그것으로 삶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결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이 살아온 삶에 비추어 딸이 살아갈 날들을 생각하는 태도를 완전히 버리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노력할 것이다. 언젠가는... 그런...

 

여기에 여성과 성소수자라는 이중억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냥 자신들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너무도 당연한 다름이 차별이 되면 안 되는, 그런 사회...

 

소설을 읽으며 엄마의 고민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소설에서 엄마는 끝까지 딸의 파트너를 '그 애'라고 한다. 자기 딸을 '그린'이라고 부르는 파트너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말이다.

 

엄마가 딸을 이해하는 순간, '그 애'는 자기 이름을 찾을 수 있을텐데... 소설에 아주 잠깐, 지나가듯이 그 애의 이름이 나온다. '레인' 

 

'이제 매일 아침 나는 주방에서 그 애와 마주쳐야 한다. 레인. 그러나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발음한 적은 없다.' (46쪽)

 

엄마가 그 애를 '레인'이라고 부르는 순간, 그 애는 엄마에게 이해받게 된다. 엄마는 그 애를 이해하게 된다.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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