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의식주'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순서가 바뀌었다고 '식의주'라고 해야 한다지만,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빼버리는 일은 없다.
그만큼 사람들의 생존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세상 살아가면서 이 세 가지는 만만하지 않게 다가온다.
그나마 가장 앞서 이야기하는 '의(衣)'가 제일 만만하다고나 할까. 물론 명품 운운하는 사람들에겐 이놈의 옷도 하늘의 별만큼이나 얻기 힘든 존재이긴 하지만.
먹을거리는 달걀파동에서 보듯이 심각하다. 어쩌면 우리는 먹을거리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농업을 얼마나 홀대하는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우리가 모르고 넘어가는 '유전자조작식품'까지 하면 먹을거리 역시 너무도 심각하다. 법정 스님의 글 제목처럼 '먹어서 죽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까지 가고 있는 중이다.
집 문제는 어떤가? 집이 없어서 고생하는 사람들, 집을 장만하기 위해서 평생을 바쳐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반면에 너무도 많은 집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집이 우리에게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집값에 대해서 생각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가 있다. 이런 집들, 대도시의 집들이다. 비싼 집... 그래서 살 수 없는 집.
그런데 사람들이 다 떠나 살지 않는 집들도 많다. 시골에 가면 빈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도무지 시골에서 살 수 없어 집을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 이들은 집을 남겨두었지만 또다른 집을 마련하지는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골에서 홀로 늙어가며 낡아가는 집... 그런 집에 관한 시. 전영관의 시집 중에서 '월림부락 대밭집'이란 시를 읽으며 생각했다.
월림부락 대밭집
빈집이 폐가가 되기까지
마당의 살구꽃 송아리는 몇 번이나 펼쳐졌는지 몰라
누렁이는 빈 여물통을 뒤집고
외양간 기둥을 들이박아 새벽을 재촉하던 집
삼남 삼녀 여섯 멍울들
딸들 수다에 댓돌 모서리도 둥글게 닳아버리고
아들들은 불퉁스레 소가지나 부리던 집
아들들 코밑 검어 대처로 가고
딸들도 허벅지 굵은 사내 따라 살림을 내고
누렁이는 발굽짐승이라고 떼거리로 생매장당한 집
두 노인네 점심거리 싸 들고 밭으로 가면
빈집인지 폐가인지 구분도 못 할 터인데
바람이 자발없이 바지랑대 빨래까지 떨어트려 놓던 집
몸은 낡아 돌쩌귀 뻐개진 정지문처럼 삐걱거리는데
마음은 더디 늙어서
읍내 갈 때 바르던 명자꽃 색깔 립스틱만큼이나 더디 늙어서
저만치 떠밀린 몸을 따라가느라 잠도 오지 않았을 텐데
바깥 노인네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 바깥으로 가버리고
안 노인네 혼자 남아 신을 사람 없는 고무신을 닦던 집
노인네 둘은 석관 옆에 낸 구멍으로 손을 내밀어
봄볕에 마실이나 다니는지 어쩌는지
이젠 거기가 동백 두 그루 새치름한 새집
푹 익은 감자달이 대숲에 찔려 오도 가도 못하는
월림마을 이계철 씨 댁
빈집은 잠시라도 말의 온기를 흘리지 않으려 입을 오므리게 되고
폐가라고 부르면 발음의 끝이 벌어져 죄다 흩어질 것만 같아
육남매 모두 우리 집 우리 집 하는 거기
빈집에서 폐가까지의 거리가
저녁마다 달그락거리던 숟가락 앞뒷면만 같아
기일이면 모여 앉아 우리 집 우리 집 하는
월송리 월림부락 308번지
전영관,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실천문학사. 2016년. 38-39쪽
마치 오래 전 일제시대 이용악의 시 '낡은집'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 시. 이 시에서 한 편의 서사가 느껴진다. 집의 역사, 아니 그 집 사람들의 역사가 눈에 들어온다. 북적북적 대던 사람 사는 소리가 시끌시끌 들리던 집에서, 아무 소리도 없는 집으로 가기까지의 과정.
그럼에서 시인은 "폐가와 빈집'이라는 말의 발음을 통해서 이 집을 잃지 않으려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곧 '빈집은 잠시라도 말의 온기를 흘리지 않으려 입을 오므리게 되고 / 폐가라고 부르면 발음의 끝이 벌어져 죄다 흩어질 것만 같아 / 육남매 모두 우리 집 우리 집 하는 거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이 집은 곧 우리 집인 빈집인 아니라 폐가가 되고 말 것이다. 자식들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지만, '빈집에서 폐가까지의 거리가 / 저녁마다 달그락거리던 숟가락 앞뒷면만 같아'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곧 폐가가 될 것이다.
그 자식들도 부모들의 뒤를 따르게 되면... 이것이 시골 집들의 모습 아니던가. 도시의 아파트들이 높이높이, 넓게넓게 올라갈수록 시골의 집들은 점점 낡아져서 밑으로밑으로 꺼져들어가, 바람에 자신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날려보내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우리들은 고향을 잃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시인은 이런 시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폐가와 빈집... 그렇다. 빈집이다. 빈집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언제라도 들어가 살 수 있게 단속을 하고 있는 그런 집.
빈집과 폐가의 거리가 숟가락 앞뒷면과 같다면 지금 폐가로 변해가고 있는 집들이 빈집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게 만드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한다.
대도시가 아닌, 시골에서도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그것도 젊은이들이 충분히 살 수 있는 그런 환경이 만들어진다면, 폐가들은 곧 빈집이 되고, 그 빈집은 사람들의 소리로 넘쳐나는 그런 집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다.
그런 날이 와야겠단 생각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