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문학관에서 발간하는 작은 소식지인 "문학관 73호"를 보게 되었다.

 

  저번 호에 이어서 우리나라 시에 나타난 은유에 대한 글과 소설가 '정연희'에 대한 글, 그리고 박인환 문학관 소개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여기에 '봄, 시로 꽃피다'라는 문학관에서 실시했던 행사에 대한 글들이 실려 있고.

 

  이 중에 하나의 글이 마음에 와서 나가질 않고 있다. 마음이 찡하다. 울림이 크다. 그것은 바로 구의역 사고로 숨진 젊은이에 관한 기사들이 언론에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사들과 아주 오래 전 작품인 방정환의 '만년샤쓰'가 연결이 될 줄이야.

 

방정환의 '만년샤쓰'의 주인공 창남이에게서 슬픈 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슬픔 울음만을 울게 만든 그런 사고들이, 그런 현실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음을 생각하게 해준 글.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는 '창남이들'이 많음을.

 

구의역 사고  한 해가 지나감에도 과연 젊은이들의 처우는 나아졌는가. 젊은이뿐만이 아니라 비정규직들의 처우는 나아졌는가. 아니, 더 어린 학생들의 처지는 나아졌는가. 이런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하고 싶지만 아직은 아니다.

 

조금씩 나아지겠지만, 우리가 눈 감고 있으면 나아지지 않음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 글이었다. 바로 방정환이 쓴 동화 "만년샤쓰"의 주인공 창남에게 쓴 아동문학가 염희경의 글.

 

일제시대에 쓰여진 그 글이 시효성이 지났다고, 요즘 아이들에게는 너무도 오래전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에도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우리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 '창남이들'을 너무도 많이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 글쓴이는 이렇게 말한다. 조금 길지만, 인용한다.

 

'솔직히 너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너무 먼 시대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만년샤쓰]를 오늘의 어린이들이 읽는 것은 방정환의 유명세 때문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도 했어. 지금으로부터 90여 년 전의 창남이 이야기를 요즘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 걱정스러웠거든.

  그런데 5월을 맞이하면서 너를 다시 불러낸 그것은 '지금 여기'를 힘겹게 살아가는 많은 창남이들을 내가 애써 외면했거나 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야. 2016년 어느 봄날, 한 신문 기사를 통해 비싼 생리대 가격을 감당할 수 없어 신발 깔창을 대용해야만 하는 저소득층 여학생들이 있다는 믿기 힘든 일이 보도 되었지. 같은 해 그 봄날, 열아홉 살의 꽃다운 청년노동자는 열악한 노동현실로 인한 사고로 사망했지. 잘 알려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말이야. 그의 가방에서 발견된 컵라면은 우리를 얼마나 깊은 슬픔과 분노에 떨게 했던지. 창남이의 후예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사회 도처에 존재하고 있는 거였어, 가난하다는 이유로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폭력에 시달리며 생존마저도 위협 받는 지경으로 내몰리는 이 사회의 어린이와 청소년을 우리가 보려 하지 않았을 뿐이지.

 

......

 

창남이 너에게는 미안하지만 더 이상 너를 기억하고 불러내지 않아도 될 밝은 미래가 우리 아이들 앞에 펼쳐진다면 좋겠구나.' (28쪽)

 

그래, 그렇게 문학은 현실에서 발을 뗄 수 없음을, 문학은 우리를 현실로 한 발짝 더 다가가게 함을,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화창한 봄날이 지나 이제는 여름을 향해 가는 지금. 계절의 아름다움에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바라보게 하는 그런 소식지. 문학은 바로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힘이 있음을 생각하게 하는 그런 소식지.

 

문학관 73호. 읽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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