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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엄기호 지음 / 창비 / 2016년 11월
평점 :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제목을 보면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 "이게 나랴냐?"라는 탄식이 절로 나오는 지금 우리 사회는 근본적인 변화에 직면해 있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아마도 긴 세월을 또다시 한탄 속에서 보내야 하리라.
그러니 '리셋"이란 말이 절실하게 다가왔는데... 그런데 이 책에서 말하는 리셋은 현실부정에 불과하다. 무언가 새로움을 추구한다기보다는 현실이 너무도 암울하니, 차라리 이런 현실을 싹 엎어버리고 싶다는 말이 바로 "리셋"이다.
그러므로 "리셋"은 "혁명"과는 다른 개념으로 쓰인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리셋"은 부정적인 의미로 "혁명"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리셋과 혁명은 다르다. 순전히 이념형적인 측면에서 볼 때, 혁명가들이 민중 혹은 민족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면 리셋은 철저한 파괴를 주장한다. 혁명이 '천년왕국'적이라면 리셋은 '허무주의적 종말론'에 가깝다. ... 혁명이 하나의 '역사성'으로서의 계급투쟁을 꿈꾼다면 리셋은 역사 그 자체의 종식을 원한다. 181-182쪽.
이 말에 의하면 지금 우리나라에서 "리셋"을 꿈꾸는 사람들은 너무도 현실이 힘들기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살기 힘드니 나만이 아니라 모두 함께 망하자고, 같이 망하면 덜 억울할 것이라는 생각에 리셋을 주장하게 된다.
결국 이런 리셋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겐 희망이란 없는 것이다. 희망이 없다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엄을 잃은 곳에서는 더이상 희망은 없다. 상호 연대성도 없다.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 노력에 의해 '가까스로' 지켜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것은 존엄과 안전이다. 167쪽
이렇게 지금까지 이루어왔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노력들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한 투쟁을 통해서 확보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조금만 부주의하거나 무관심해지면 인간의 존엄과 안전은 쉽게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국가로부터 안전한가? 라고 질문을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을 할 수밖에 없다.
경주 지진으로 대표되듯이 자연재해로부터도 국가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하고 있으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도 잘 지켜주지 못하고 있으며 경제적인 면에서는 아예 벼랑으로 우리를 내몰고 있다.
이렇게 벼랑으로 내몰린 우리들은 결국 각자도생의 길로 가는데, 각자도생의 길은 공동체적 해결을 부정하게 된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개인적인 노력과 사적인 노력, 공동체적인 노력과 공적인 노력이 있다고 하는데... 우리 사회는 지금 공동체적인 노력이나 공적인 노력은 사라지고, 오로지 개인적인, 또는 사적인 노력만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인데, 개인적인 노력에는 결국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다는, 사회적 인간이라는 인간의 기본적 존재의미를 부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사적인 노력은 어떤 일을 사적으로 해결하는 모습, 그 사적인 것에는 자신의 현재 조건이 바탕이 되므로, 이는 차이와 차별로 나타나고, 이런 사적인 노력을 중시하다보면 공적인 노력은 아예 부정하게 되는 현실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리셋'을 이야기하는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사적인 노력만을 이야기하는 사회인 것이다. 전혀 평등하지 않은데, 평등을 가장하여 책임을 개인의 노력 여하로 전가하는 것, 결코 출발점이나 조건이 같지 않음에도 철저하게 개인으로 해체하여 책임을 묻는 것.
그러니 약한 개인은 자꾸만 뒤쳐지고 밀려나고 쫓겨날 수밖에 없음에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도 안 된다는 무력감에 빠지게 되는데, 지배층에서 이런 무력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을 통치하는데 가장 유용한 방법이 무력한 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이러이러한 힘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에 빠지면 그 다음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진다. ... 한국의 지배계급은 말과 글의 힘을 박살내고 무기력을 통해 통치한다. 175쪽.
이런 무력감으로 인해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행위보다는, 함께 망하자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것이 바로 '리셋'을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셋'은 부정에만 머문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우리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혁명처럼 한 번에 모든 것이 확 바뀔 것이라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만은 할 수 없다.
이 책에서는 그런 방법은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이종영의 논의를 빌려와 혁명을 두 과정으로 나누고 있다. 확 변하는 혁명I과 그 혁명을 이루어가는 과정인 혁명II로 이야기한다. 이 혁명들이 순차적으로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데 이 책의 장점이 있다.
혁명은 어떤 순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음을, 그래서 혁명의 과정에 혁명이 내재해 있음을, 그런 혁명의 과정이 들어있지 않은 혁명은 '리셋'과 다름 없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왜 이 과정이 중요할까? 그것은 이 구절에서 알 수가 있다.
미리 경험해 본 자만이 '이후'를 준비할 수도 있고, 맞이할 수도 있고, 살아갈 수 있도 있다는 점이다. 살아보지 않은 자는 살아갈 수 없다. 살아봄의 경험이 선순환을 만들 수도 있고, 살아보지 못함의 경험이 완전히 폐쇄적인 악순환의 고리로 빠지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전환'의 가능성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이후'를 미리 살아볼 수 있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188쪽.
이 말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여기에서 혁명을 살아야 한다. 혁명을 내 삶에서 경험하지 않으면 혁명이란 없다. 즉, 내가 춤출 곳을 영원히 찾아 헤매는 곳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 내가 춤추고 있어야 한다.
춤출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춤추는 곳을 점점 확대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혁명이다. 그런 혁명은 어떤 순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 우리는 아무리 힘든 순간이더라도 웃음을 영원히 잃지는 않기 때문이다.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인간의 존엄을 유지한다는 것이고,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아가면, 나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 연대할 수 있는 때가 오게 된다. 그런 때를 만드는 것,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변하고, 다가가야 한다.
이는 내가 남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이 말로 기능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존재는 나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함께 망하자고 하지 않는다. 함께 살자고 한다. 함께 가자고 한다. 내 말과 네 말이 만나 새로운 말을 만들게 한다.
우리는 말들을 통하여 관계를 형성해가기 때문이다. 이 때 말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하여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되어 가는 말이다. 이 말들을 매개로 우리는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사회를 다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똑똑한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상대의 말을 새로운 제안으로 돌려줄 아는 '협력의 기술자'다. 그리고 이런 활동이 활성화되고 보호받고 안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시대와 사회에 대해 다시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안전을 위해 활동을 중지하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바로 활동이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것에 우리 존재의 사활이 걸린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9쪽.
이렇게 서로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 그 관계에서는 경쟁보다는 협력이, 증오보다는 사랑이, 절망보다는 희망이 싹튼다. 이 상태에서는 '리셋'을 꿈꾸기보다는 '혁명'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된다.
나만이 아니라 함께... 지금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리셋'이 아닌 '혁명'을 할 수 있는, 그런 관계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 우리는 '혁명'의 순간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바꿀 수 있다. 내 곁에 있는 존재들과 함께... 그런 존재들을 우린 시민이라고 한다. 동료 시민, 시민 동료.
우리 모두는 모든 곳에서 동료 시민이다. 우리가 동료로서 평등하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가 서 있는 법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 212쪽,
두 번째로 동료 시만이 된다는 것은 그들을 나와 같은 행위의 주체, 특히 말의 주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213쪽.
이런 동료 시민들... 나는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역시 하나의 점이다. 하나의 점과 점이 광장에서 평등하게 만난다. 이 평등한 만남 속에서 점은 선이 된다. 선들이 모여 면을 이룬다. 거대한 면들이 함께 입체가 된다. 하나의 세상이 만들어진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그 세상은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고 절규하는 모습에서 이 책의 뒷표지에 있는 말처럼 '멈춘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고 외치는 사람이 있는 세상이다. 하나의 점에서 선으로, 선에서 면으로, 면에서 입체로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그런 세상을 만들어갈 때다. 그러므로 이 책은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나왔다. 세상을 바꿀 가장 좋은 때에 왜 지금 우리가 이렇게 됐는지 분석하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부분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지만, 문제가 밝혀지면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으니... '리셋'이란 말로 '혁명'이라는 답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혁명'이라는 말이 너무 거창하다면, 너무 과격하다고 느낀다면 '개혁'이라고 하자. '변화'라고 하자. 아니면 '진보'라고 하자.
우리는 지금 바로 이런 순간에 서 있으니까.
덧글
출판사의 서평단 모집에 응모하여 책을 받고 쓴 서평이다. 지금 상황과 관련지어 제목을 보면서 꼭 책을 읽고 싶었다. 비록 읽지 않고 생각했던 '리셋'의 개념이 내 생각과는 달랐지만, 제목에서 '리셋'이라고 한 것을 '혁명이나 변화, 진보'로 바꾸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다 망하자가 아니라, 함께 살자고 외칠 때이니까... 또 우리는 지금 광장에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이 책 흥미롭게 잘 읽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은 책이다. 생각거리. 말할 거리. 말들과 말들이 만날 수 있게... 허공에 흩어지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 가슴에서 싹을 틔워 행위로 나아가게 하는 말들, 그런 말들의 만남. 바로 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