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 세상에 온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을 한다.

세상에 온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하다 보면 도대체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로 질문이 옮겨간다.

 

이왕에 이 세상에 나왔으니, 그 일을 무를 수 없다면 이 세상에서 내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존재 이유가 그래도 긍정적이어야 하겠단 생각을 하는데, 긍정적이라는 말은 세상에 이로운 일이 되는 일 하나는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도대체 세상에 이로운 일이 무엇인가? 세상에 이로운 일이 내게도 이로운가? 또는 내가 이롭다고 생각하는 일이 정말로 남에게, 세상에 이로운가?

 

이렇게 질문이 나아가다 보면 자신이 없어진다. 무슨 도인도 아니고, 도통한 것도 아니고, 세상은 그렇게 고민하면서 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나온 한 세상 아닌가. 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것들을 내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상희의 "잘 가라 내 청춘"이라는 시집을 읽다가, 그 시집에 나온 불안에 나 역시 불안해지다가 시 두 편을 발견하고, 굳이 불안해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시인은 이를 '간통'과 '드라큘라'로 표현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시인은 절대로(? 이런 말, 절대로 옳지는 않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간통은 이미 있는 존재, 또는 남에 속해 있는 존재를 몰래 나한테 끌어오는 일이고, 드라큘라 역시 남의 몸에 있는 피를 내 속으로 끌어오는 존재니...

 

이 둘은 모두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자신의 것으로 끌어오는 일에 해당하고, 그것이 바로 우리네 삶이 아닐까 하는 생각.

 

우선 시를 보자.

 

봉함엽서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 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가난한 눈물로 물 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 가게 해 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로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 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 다오.

 

이상희, 잘 가라 내 청춘,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65쪽.

 

 드라큘라

 

내 눈 속의 공포를

좀 크게 그려 주세요

송곳니를 번쩍이며

저는 지금 가야 해요

빈혈이거든요

몹시 어지럽거든요

바람이 이런 식으로 불 때

참을 수 없거든요

누군가의 피가

부르거든요

어느새 이빨이

미녀의 목에 꽂혀 있거든요

혼혈의 뜨거운 방전

입술이 불붙거든요

운명이 재처럼

식은 연기를 피우거든요

그때

공포를 아는 척해야 하거든요.

 

이상희, 잘 가라 내 청춘, 민음사, 2007년 개정판 1쇄. 17쪽.

 

 

그렇다. 세상에 나온 것 자체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 돌이킬 수 없다면 이 세상에 적응하며 살 것.

 

어떻게? 이미 있는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어내면서 살 것. 그렇다면 이것은 드라큘라가 남의 몸 속에 있는 피를 빨아들이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드라큘라가 남의 피를 빠는 일 자체가 공포겠지만, 드라큘라 자신도 공포에 빠져 있을 뿐.

 

그 공포를 가리기 위해 남의 피를 빨아들일 뿐. 이 역시 간통이다. 자신을 위해서 남의 것을 가져오는 일. 그것으로 세상에 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

 

우리는 이 두 말을 그다지 좋지 않은 말로 사용하지만, 우리네 삶은 어쩌면 이렇게 '간통'과 '드라큘라'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애써 숨기지 말 것. 어차피 인생은 간통이고, 드라큘라의 행동일테니... 이를 양성화할 것.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존재임을 인정할 것.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줄 것. 공포는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주는 사이에 사라질 수 있음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약한 존재끼리 함께 살아감을, 서로 도와야 함을,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와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시집.

 

좀 억측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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