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의 건축 - 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
정기용 지음 / 현실문화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드물다.

 

우리나라 전라도 무주에서 일어났던, 그것도 10년에 걸쳐서 한 건축가가 한 마을을 건축하는 그런 과정을 건축가의 글로 직접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도대체 건축은 어떠해야 하는가, 건축은 그 마을과 그 마을 사람들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가, 그리고 도대체 공공건축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게 하기 때문이다.

 

건축가라면 모름지기 자신만의 건축을 하고 싶어할 것이고, 그러한 자신의 건축을 실현시킬 기회를 얻는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정기용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에 있다. 사실 공공건축은 공개입찰을 한다. 이 책에 보면 당시인지 아니면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3000만 원 이하면 수의계약이 가능하고, 3000만 원이 넘어서면 공개입찰을 해야 한다.

 

요즘말로 하면 주민자치센터, 또는 지역구청 건물을 설계하는데 건축가에게 3000만 원 이하로 받으라고 할 수 있을까? 건축가에게는 어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한데 그것은 건축이 실현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일 것이다.

 

공개입찰은 담합을 막을 수도 있지만(사실 4대강 사업에서 공개입찰을 했지만 담합을 했다는 증거나 나와 문제가 되기도 했으니,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로 공개입찰은 담합을 막고 투명한 선정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건축가가 한 마을을 건축하게 할 수는 없다. 한 건물을 건축하게 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군수와 건축가의 뜻이 맞아 무주 마을 건축이 이루어졌다. 정기용은 이를 무주와 자신이 감응을 하고, 군수와 자신이 감응을 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땅과 하늘과 감응하는 건축, 그리고 이런 건축이 사람과 감응하는 건축, 그가 바라는 건축이었다.

 

면사무소에 목욕탕을 설치한 것은 그가 처음이리라. 그 후 그를 모방한 건축들이 나왔다고 하는데, 그가 면사무소 건물에 목욕탕을 설치한 것은 바로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건축가가 마을사람들과 감응하려고 노력하고, 그 감응을 무주라는 마을로 넓혀 갔으며, 무주라는 마을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감응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무주 마을 만들기에 참여한 많은 건축들이 있지만 이렇게 무주의 어른들을 위한 목욕탕이 있는 공공건축, 시골이라 할 수 있는 무주의 아이들이 뛰어놀고 공부할 수 있는 공간, 밤하늘이 아름다운 동네에 천문대를 세워 별을 볼 수 있게 만든 건축, 마을 행사 때 내빈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그늘에 있지 않고 모두가 그늘에서 함께 할 수 있도록 한 공설운동장, 구청 건물을 건축할 때 마을 사람들이 언제든지 와서 머물 수있는 공간으로 만든 건축들 등등

 

이 책을 읽으면서 무주에 한 번 꼭 가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떻게 건축했기에 자연과 사람과 감응하는 건축이라는 것인지 사진이 아닌 실물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책의 끄트머리로 가면서 아니 무주는 가 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책의 후반부에 보면 정기용 건축은 이미 개발에 묻혀버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건축이 물론 원형 그대로 있어서는 안된다. 그도 말했듯이 시간을 받아들이는 건축이 좋은 건축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과 사람과 감응하는 그 정신은 살아있게 만들어야 하는데, 많은 부분에서 그 점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개발 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 정말, 금수강산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름다운 산과 물을 자랑하는 우리나라, 그런 자연을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은 더 많이 사라졌겠지. 이 책을 쓸 당시가 벌써 8년이 넘은 과거이니...

 

그러나 이 책은 앞으로 마을 만들기를 하는 사람, 진짜 사람을 위한 건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좋은 참조가 될 것이다.

 

무엇이 공공건축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마을 만들기를 해야 하는지, 정말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지... 건축가와 공무원이 함께 어떤 지점에서 고민을 해야 하는지를 무주에서의 10년 기록을 통해 잘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너무 즐겁게, 좋게, 감동을 받으면서 읽었다. 이런 건축 시도가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래도 무주에 한 번 가봐야겠다. 어떤 식으로 정기용 건축이 시간을 받아들여 거기에 함께 녹아있는지 보기 위해서.

 

이 책에 나와 있는 말 가운데 기억할 만한 말들...

40. 우리나라 공무원들이 무서워하는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감사원이거나 여러 법의 저촉 여부인 것이다. 이 일이 국민을 위한 것인지 아닌지는 그 다음 문제다.

79. 건축에서는 외관의 형식을 정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건축에서는 사람들이 원하고 사회가 원하는 삶의 형식을 실현시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먼저이고, 그 결과가 형태나 모양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건축의 기능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면밀한 관찰을 통해 사람들의 삶을 보살펴 보는 배려에 대한 문제다.

96. 어떻게 보면 건축가는 영화인일 수도 있다. 어떤 호흡과 속도로 특별한 장면을 생성할 것이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를 상상한다는 점에서 건축가도 영화인인 셈이다.

152. 세월이 지나면서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시간이다.

216-217. 건축가가 하는 일은 건물을 설계하기 이전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횡단하며 여러 가지를 사유해야 하고, 또 나아가서는 땅과 시대와 세상과 관습과 싸우기도 해야 하며, 모든 기술적․경제적 요인을 결합하는 능력도 발휘해야 하는 총체적 작업이다.

240. 소위 선진국이란 건물을 신축하는 데 드는 비용만큼 건물의 유지 관리 보수에 예산을 아낌없이 쓰는 나라들이다.

243. 건축가란 근사하게 집을 그리는 사람이기 이전에 우리들의 삶을 섬세하게 조직하며 여러 가지 설계행위를 통해 건축을 미리 살아보는 사람을 의미한다.

262. 진보란 소위 좌파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필요한 것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마음과 손길 속에 있는 것이다.

283.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는 장소, 이것이 납골당의 존재 이유다. ... 이 세상의 모든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은 사실 산 자를 위한 것이다.

307. 우리에게는 위대한 건축가보다 우선 사회적인 필요성에 화답하는 보편적 해답을 보다 다수를 위해 생산해 낼 수 있는 ‘사회적 조절자’로서의 보통 건축가가 필요하다.

368. 건축가의 관찰력은, 우리의 농촌과 도시에서, 반복되는 문제들이 무엇인지, 또한 그럼에도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를 것인지, 그리고 우리 땅의 문제점은 외국의 것과 어떤 차이를 갖는지를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일 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