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간 2 Rediscovery 아고라 재발견총서 2
메리 셸리 지음, 김하나 옮김 / 아고라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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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이다.

 

1,2권을 합치면 총 분량이 800쪽이 넘는 대작이다. 1800년대에 이렇듯 장편소설을 썼다니... 그것도 인류의 미래를 상상해서, 200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 말이다.

 

1권이 개인사를 중심으로 작품이 전개되어 흥미가 떨어졌다면, 2권은 역병으로 인한 인간들의 갈등과 죽음이 묘사되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특히 전세계적인 재앙을 앞에 두고 인간들이 취하게 되는 모습들이 이 소설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어서 과거의 소설이 아니라 현재를 볼 수 있게 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종말을 앞둔 사람들이 취하게 되는 세 가지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우선 정착민과 이주민의 갈등이 이 소설에 나타난다. 자신들이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데, 그들이 그 곳에 가서 이미 정착해 있던 사람들과 함께 살면 좋겠지만, 공포와 두려움에 휩싸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된다.

 

서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집단들, 그것은 기존에 살고 있던 집단과 이주해 온 집단을 막론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지니는 태도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이들이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데, 평화로운 해결보다는 무력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이 소설에서 이 점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대륙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영국 사람들을 약탈하는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약탈만으로는 인류가 생존할 수 없다. 하여 에이드리언으로 하여금 이들이 평화적으로 서로 합의를 보게 만든다. 이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종말이 눈 앞에 닥쳐옴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장점들을 충분히 살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에이드리언이나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어서, 최근에 온갖 재난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돕는 오히려 유토피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는 사회학적 통찰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살던 터전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모습이다. 이미 폐허가 된 곳에서 살 수는 없는 일. 또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곳에서 사는 일 자체는 공포다. 그러기에 다른 곳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집단 이주를 한다.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듯이, 지금도 살기 힘든 사람들이 좀더 살기 좋은 나라를 찾아 떠나듯이 집단 이주를 하는 모습이 이 소설에 나오고 있다.

 

현실이 힘들다면 그곳을 떠나는 것, 이미 고쳐질 가능성이 없으면 떠나는 것, 당연한 일이다. 지구가 살기 힘들어지면 우주를 개척하여 그곳으로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그러나 문제는 자신이 살던 곳을 떠났다고 해도 이미 지구 전역에 재앙이 번졌을 때는 그 어디도 살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하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이 재앙에 직면하지 않게 미리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해주고 있다.

 

역병이라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자연 재앙이라도, 사실은 인간이 최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서 대비는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 소설에서도 이런 재앙의 징조는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1권에서), 당시 시대의 한계이겠지만, 의사들의, 과학자들의 노력이 묘사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이것이 소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기도 하겠다.

 

이런 것이 예언서의 역할 아니겠는가. 예언서에 있는 대로 된다가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라 하는...

 

세 번째는 사이비 종교가 기승을 부린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절망에 빠져있을 때 그들에게 감미로운 환상을 제공하는 사이비 종교가 창궐한다. 이런 사이비 종교가 창궐했을 때는 이성의 힘으로 이를 막을 수 없다.

 

소설에서 에이드리언이 합리적인 말로 이들을 설득하려 해도 이들은 한사코 그의 말을 부정하고, 사이비 종교 지도자의 말에 따른다. 그것이 그들을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지 못할지라도 그들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를 따른다. 그리고 종말을 맞는다.

 

이런 점은 근대나 현대를 막론하고 비일비재한 일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무언가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자신을 맡기려는 태도, 자신의 책임을 다른 존재에게 넘기고 그것에 안주하는 태도.

 

이런 태도는 어려울 때 더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도 한다. 과학기술이 최첨단을 달리는 지금 시대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으니...

 

그러니 이 소설은 종말을 맞게 되는 인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그 종말을 맞이하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종말이 닥쳤을 때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조금 무섭다. 인류가 종말이라는 재앙을 아직은 맞이하고 있지는 않지만, 소행성의 충돌로 지구 멸망의 위기가 닥친다는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도 많고, 인류 종말을 예언하는 예언서들도 있는데...

 

이 소설은 인류 멸망이 역병이라고 하고 있다. 전 세계를 휩쓴 역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대책은 없는...

 

그 공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러나 그런 재난 속에서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이 소설은 깨우쳐 주고 있다.

 

읽기가 지지부진했던 1권에 비해 2권에 들어서서는 읽기에 속도가 붙었다. 마치 1권이 마라톤을 하는 사람과 같은 속도였다면, 2권은 특급열차를 타고 달리는 속도와 같다고나 할까.

 

뒷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빨리 빨리 읽게 된다. 그만큼 흥미롭다. 여기에 재난 상황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으니... 더욱 흥미롭고... 생각할 거리도 많고.

 

최후의 인간. 이 소설의 맨 앞에서 예언서라고 했고, 실제로 소설의 제일 앞부분에서 어느 동굴에서 발견한 글들을 짜맞추었다고 했으니, 예언서 형식을 띤 소설... 현재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그 미래를 다시 현재에 끌어오는 그런 소설.

 

지금 우리는 메리 셸리가 말한 2000년대를 살고 있다. 비록 그가 말한 최후의 인간만이 살아남은 2100년은 되지 않았지만, 지금 세상엔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

 

설마? 이 소설처럼.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자본의 욕망에만 빠지지 않는다면. 이 소설에서처럼 인간은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 이 소설에서 귀족들이 위기 때 자신들의 권리를 양보한 것과 같이 자본도 인류를 위해서 충분히 양보를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이 소설에서처럼 최후의 인간만이 남지 않고, 인류가 다양한 인류가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된다는 것.

 

그런 생각도 하게 만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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