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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 사주명리학과 안티 오이디푸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사주팔자는 타고 났다는 말을 한다. 당연한 말이다. 자기가 태어난 년월일시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긴 요즘은 의학기술이 발달해서 태어나는 날을 조정하기는 하지만, 이미 태어났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데 타고 났다는 말은 바꿀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다. 사람들이 이 두 말을 같은 말로 쓰고 있는데, 타고 났다는 말은 이미 그랬다는 과거형을 뿐이라면 바꿀 수 있다/없다는 말은 지금이라는, 얼마든지 유동적인 현재형이다.
과거형으로 현재를 규정지으려는 것이 바로 운명론이고, 이러한 운명론을 사람들을 우매하게 만들어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고 만다. 자기의 운명이 정해졌다는데 무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운명론을 통렬하게 풍자한 작품이 아마도 이문열의 "황제를 위하여"가 아닐까 싶은데, 자신의 사주를 믿고 평생을 그대로만 살려고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과연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으로 살았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운명이란 이미 타고 났지만, 그 타고 남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쪽으로 사주를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이 '사주명리학'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사주명리학을 활용한다면 사주명리학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점집에 가서 점치는, 그 점대로 하고, 또 부적을 받아서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자세를 지닐 필요가 없이,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이 나아갈 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이 바로 이 책의 핵심이다.
그러므로 사주명리학은 운명론이나 미신이 아니라 철학이고 인문학이다. 우리가 살아갈 길을 안내해 주는 이정표이다. 이정표대로 따라가든 아니든 그것은 사람들이 할 일이다. 즉, 운명에 대한 삶은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것일 뿐이다.
운명이 그러니 내가 이럴 수밖에 없어라는 말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포기했음을 나타내주는 말일 뿐이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천지의 기운을 자신의 몸에 받은 것은 당연한 일. 그것이 기질을 형성하는 것도 당연한 일. 그러나 사람은 단지 주어진 것을 따라만 가는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주를 행위를 통해서 또다른 관계로 만들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 책은 강조하고 있다.
존재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관계론이라는 얘기다. 우리의 운명은 주어진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가는 관계 속에서 구현되는 것이라는 얘기.
하여 자신의 사주를 명확히 알 필요는 있다. 사주를 명확히 알고 자신이 추구해야 할 관계를 파악한 다음에 행위로 나아간다면 자신의 운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이 된다.
이 책의 부록에 사주가 단지 8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밝혀놓고 있다. 사주의 경우의 수를 20,736가지, 천간까지 합쳐 계산해 보면 팔자가 만들어지는 경우는 12,960,000가지(280쪽)라고 한다.
천이백만분의 일. 이것이 내가 지닌 팔자다. 여기에 내가 스스로 관계를 통하여 만들어가는 팔자까지 생각해 보면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팔자는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팔자는 타고 났지만 결코 정해지지 않는다. 팔자는 유동적이다. 팔자는 관계지향적이다. 관계를 통해서 팔자는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 때문에 팔자는 만들어진다. 팔자는 곧 내 행위를 통한 삶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아는 것. 모든 것은 앎에서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 이것을 바탕으로 실천으로 나아가 관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 된다.
하여 운명은 길이다. 우리가 다양한 경험들을 할 수 있는 길. 이 길에서 어떤 관계를 만들어가느냐에 따라 우리가 가는 운명의 길이 달라진다.
이렇듯 미신이라고 도외시하고 있었던 사주명리학이 단순한 미신이 아닌 삶에 대한 철학, 인문학이었음을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