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스승 - 지적 해방에 대한 다섯 가지 교훈
자크 랑시에르 지음, 양창렬 옮김 / 궁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모르는 교사가 가르칠 수 있다? 참 충격이다. 그런데 이를 실천한 교사가 있다고 한다. 교사라고 하기 그렇다면 사람이라고 해도 좋다. 그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를 모르는 프랑스 사람이 교육을 했다. 그리고 학생들은 거의 완벽하게 프랑스어를 할 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무지한 스승의 첫 출발이다.

 

도대체 어떻게 모르는 사람이 알게 가르칠 수 있을까? 의문은 여기서 생긴다. 그런데 꼭 알아야 가르칠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는 말은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 함께 성장한다는 말 아니던가.

 

그렇다면 이 말은 어쩌면 우리가 잊고 있었던 교육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없으나 모든 것을 배우지 못할 사람도 없으니... 이 말이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사가 꼭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교사가 알고 군림하기 시작하면 여기서부터 불평등이 생긴다는 말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교사와 학생의 거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학생은 점점 바보가 되고, 이 바보는 영원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사와 학생의 거리를 없애는 것. 여기서 교육이 출발해야 하는데, 교사는 학생의 의지를 자극하여 실천에 나서도록 해야 하며, 지능의 면에서는 교사나 학생이나 거리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즉 학생은 교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책을 통해서 배워야 하고, 책을 통해서 배울 때 교사의 설명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점차 다른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암기와 반복을 이야기한다. 암기와 반복, 이는 태어나서 아이들이 처음 배울 때 자연스레 지니는 태도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쓰라고 이해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직 반복을 통해서 자연스레 외워지게 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가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깨우쳐갈 수 있는 의지를 자극해주기만 하면 교사의 역할은 끝이다. 교사의 설명은 필요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나라 예전 교육에서 말하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장면이다.

 

읽고 읽고 또 읽어라. 이 때 교사는 학생이 제대로 읽었는지만 확인해주면 된다. 학생은 스스로 깨닫는다. 어떤가? 이것이 바로 요즘 말하는 배움의 공동체 아니던가.

 

여기에 어떤 교수법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최고의 교사라고 하여 엄청난 기술을 자랑하는 교수법이 이런 데서 어떤 소용이 있단 말인가?

 

교수법을 자랑하는 교사들은 무지한 스승이 아니라, 유식한 스승이다. 그들은 그들의 유식함으로 학생들을 점점 더 무지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적어도 이 책의 논리를 따라가면 그렇다. 이 책의 논리가 아니더라도 곰곰 생각해보면 스승이 유식할수록 제자들은 더욱 무식해진다. 스승과 제자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그래서 불교에서 참선 중에 화두 하나만 주는 방법이 있다. 그 화두를 잡고 제자가 스스로 깨우쳐야 한다. 깨우친 다음에는 스승과 제자의 거리는 없다. 함께 온전한 인간이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모든 사람은 평등한 지능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단지 의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못 배울 사람, 덜 배울 사람은 없다. 누구나 배울 수 있다. 이 배울 수 있음을 깨닫게 하고, 배울 의지를 실현시키는 존재가 바로 교사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런 교육에서 지금의 공교육은 바보 만들기 교육이다. 바보 만들기... 지금 우리나라 공교육을 보면 정확한 지적이기도 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학력 수준은 높다고 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에 필요한 지식은 지니고 있지 않은... 자기 스스로 깨우친 지식이 아니라 주어진 지식을 받아먹게만 이루어진 그런 교육.

 

공교육에 대한 비판은 통렬하다. 보자. 

 

  식자들이 무지한 자들을 지도하고, 헌신하는 인간들이 이기주의적인 물질적 고민에 처박힌 인간들을 지도하고, 공적인 이성과 역량을 갖춘 보편자가 특수주의에 갇힌 개인들을 지도할 것, 이것이 공교육이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인민 주권 개념을 대표하는 자들이 계획한 경험적 인민에 대한 지도이다.

  공교육은 이렇게 진보의 세속적 권력이자, 불평등을 차츰차츰 평등하게 만드는 수단, 다시 말해 평등을 무한정 불평등하게 만드는 수단이다. 모든 것은 늘 하나의 유일한 원리인 지능의 불평등 위에서 작동한다. 이 원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아무리 좋은 논리에서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단 한가지밖에 없다. 똑똑한 카스트가 어리석은 다중을 지도해야 한다는 것. (247쪽-248족)

 

정말... 인정하지 않고 싶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무시무시한 지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회의 변화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바보 만들기 교육이 고착되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모두가 바보인 세상에서 바보가 아닌 사람은 그가 바보 취급을 받는다. 지금이 그렇지 않은가. 여기서 조금이라고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대안교육이었고, 탈학교 운동이었는데... 여전히 공교육은 강대하다. 아니 이미 무너져버렸어야 하는데, 간신히 외양을 지탱하고 있다.

 

무지한 스승... 이 책을 읽으면 우리나라 공교육 뿐만이 아니라 교육 전반에 대한 회의가 인다. 그렇다고 회의에만 빠져있어서는 안된다. 이 책의 내용을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교육도 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으니... 이제 공교육에서도 배움의 공동체다 자기주도학습이다하여 교육의 주체가 교사에서 학생으로 많이 변하고 있다.

 

또한 주어진 정답을 찾는 교육에서 자신이 정답을 만들어가는 교육으로 바뀌려고도 하고 있다. 정답 찾기는 지식의 위계를 전제한다. 그러나 정답 만들기는 지식의 평등을 전제하고 있다. 이런 지식, 아니 지능의 평등에서 우리는 배우려는 의지를 작동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의지를 자극하는 교사, 그런 교사들이 공교육에서도 많이 나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이 책 "무지한 스승"을 제대로 계승한 것이리라. '조제프 자코토'라는 사람 이야기로, 그가 한 교육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그를 중심으로 저자가 교육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본다. 그가 한 말도 자코토의 교육을 번역한 것이라면, 이 책을 읽은 우리는 다시 이 책을 우리 나름대로 번역을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맞게 적용을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자유고,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의지를 작동시켜야 해방이 된 인간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가지로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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