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헌책방 나들이를 하다. 한 때 누군가가 애지중지 여기며, 그의 지식 열망을 채우던 책들이 이제는 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곳.

 

책이 나무의 목숨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 곳은 나무의 목숨을 조금 더 연장시켜 주는 고마운 곳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품절이나 판절이 된 책을 구할 수도 있는 곳이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책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는 곳이기도 하다.

 

헌책방에 들르면 주로 시집이 꽂혀 있는 곳에 간다. 조금 오래된 시집은 요즘 서점에서는 쉽게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터넷 서점에서는 시인과 제목을 알지 않고서는 더욱 더 시집을 찾기 힘들고.

 

시집이란 본래 그 자리에서 펼쳐 읽으면서 가슴에 와닿는 시가 있으면 그 때서야 내 품에 안기는 것 아니겠는가.

 

하여 헌책방에 갈 기회가 있으면 제일 먼저 시집이 있는 곳을 찾는데... 가끔은 눈에 번쩍 띠는 시집들이 있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구할 수가 없는. 아주 오래 된 시집. 1988년에 나오고, 그 뒤에 더 나왔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 제목도 자극적인. 이런 제목이니, 이런 내용이니, 1988년 이전에는 국내에서 출판이 될 수 없었던 시집.

 

국내에서 김남주의 시들이 이러했으리라. 그래서 김남주는 감옥에서 시를 써서 밖으로 내보냈고, 그것이 음성적으로 읽혔는데, 이철범의 이 시들은 외국에서 먼저 발표가 되었다고 하니, 엄혹한 시대였음에는 확실하다.

 

이철범. 외제 도끼에 찍힌 땅. 종로서적. 1988년. 초판.

 

900여 회가 넘는 외국의 침략이 있었다고 국사 시간에 배웠었지. 그리고 그런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고.

 

"외제 도끼에 찍힌 땅"

 

그냥 생각해 보아도 고려시대에는 몽고의 도끼에 찍혔지. 왕의 이름에 충성 충(忠)자가 들어가고 말았으니. 고려의 개혁군주라고 하는 공민왕조차도 자기의 부인은 몽고 사람이었지. 이 때 찍힌 외제의 도끼가 일제에게 이어지고, 일제에 이어 소련, 미국으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이 시집에서는 일제, 미국, 소련을 신랄하게 비꼬고 있다. 이들은 우리의 우방이 아니라 외제 도끼일 뿐이라고...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그런데 요즘은 외제 도끼가 바뀌었나 보다. 소련이야 해체되어 러시아란 이름뿐인 강대국으로 전락했고, 이제는 다시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역사 문제에서도 영토 문제에서도, 특히 최근에는 '방공구역 설정' 문제에서도.

 

하지만 이를 극복해야 하지 않나. 이런 외제 도끼들을 국내 문제들을 감추는데 사용하지 않고, 정말로 국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서 외제 도끼를 버릴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하여 그는 말한다.

 

이 시대...시인은...절대 권력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고통스러운 삶이 강요되고 있는 세계의 민중 속에, 그 역사적 현실 속에 현존해서 그들의 삶에 동참하고, 매일매일 그들의 삶을 이끌어가고 있는 화장기 없이 생생한 그들의 언어를 시인의 언어로 해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온몸을 바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책 89쪽)고.

 

시들의 내용이 참 과격하다. 그만큼 시인은 절박했으리라. 하지만, 이 시에 나온 내용이 진행형이라면?

 

이 시집이 나온 지 25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외제 도끼에 찍힌 땅으로 남아 있다면?

 

이것만큼 비참한 일이 어디 있으랴. 이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으랴.

 

이 시집의 유용성은 이 시집의 시들이 과거를 형상화한, 그 땐 그랬지라고 말할 수 있는데 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

 

제목이 된 그의 시 '외제 도끼에 찍힌 땅'을 여기에 인용한다. 이제는 여기서 벗어나야만 하기에.

 

                 외제 도끼에 찍힌 땅

 

외제 도끼에 찍힌 땅이여 / 이름을 잊어버린 땅이여 / 주인을 잊어버린 땅이여

끊어진 길은 어디서나 / 집을 찾지 못하고 / 밭은 곡식을 / 과수원은 열매를 거부하네

 

총을 든 손으로 / 서로 안을 수가 없고 / 피투성이얼굴로는 / 알아볼 수가 없다

어느 비극의 땅에서 / 젖줄은 끊기고 / 지뢰 묻혀 있는 / 평야는 잠들지 못한다

겨울에 눈이 오고 / 봄에 단비가 내려도 / 국토는 잉태하지 못한다

사내들은 / 모두 싸움터에서 늙었고 / 헐벗은 아이들만 남아

어머니의 땅에서 우는 울음 / 가득히 쌓여 / 사나운 바다를

이 어두운 비극의 땅을 / 차마 용서할 수 없다

 

이철범, 외제 도끼에 찍힌 땅, 종로서적. 1988년. 초판.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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