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는 싸움 ㅣ 애지시선 48
박일환 지음 / 애지 / 2013년 6월
평점 :
싸움은 이기기 위해서 한다.
이기지 않고 지기 위해서 싸움을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가끔은 지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있다. 질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렇게 하면 절대로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싸움을 한다.
지기 위해 하는 싸움이라?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지기 위해 하는 싸움이 아니다. 이기기 위한 싸움이다. 이기기 위해서 지는 싸움을 한다. 싸움은 지지만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
이기기 위해서 지는 싸움을 하는 역설이 여기서 성립한다.
그렇다면 지는 싸움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시인은 여기서 약한 존재의 편에 서라고 한다.
약한 존재의 편에 서서 약한 존재를 위해서 함께 싸우는 일, 그것이 바로 지는 싸움이다. 이 싸움은 때로는 처절하고 때로는 비극적이기도 하겠지만, 때로는 즐거운 싸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지는 싸움
꽃을 던져라
저들은 곤봉과 방패로 중무장했다
꽃을 던져라
저들은 돈으로 시장과 정보를 독점했다
그러니 꽃을 던져라
화염병과 사제폭탄 대신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되도록이면 우아한 격렬함으로
밤이 새도록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백번 싸워 백번 지는 싸움
그러니 싸워 이기려 하지 마라
다만 항복하지도 마라
꽃을 던지며 춤을 춰라
지치지 말고 무릎 꿇지 말고
박일환, 지는 싸움, 애지. 2013년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 그러한 자본의 힘이 정보까지도 독점하고 있는 시대. 개개인의 정보는 물론이고, 공개가 되어서는 안되는 일까지도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공개를 하는 시대, 정보를 힘있는 자들이 언제든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대.
이런 시대 힘없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 시에서와 같이 지는 싸움을 하는 일. 꽃을 던지는 일. 절망하지 않고 즐겁게 싸우는 일. 똑같은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우리들의 공동체로, 약한 존재끼리 서로서로 보듬고 함께 어울리는 일.
그것이 바로 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이 지는 싸움이 바로 이기는 싸움이 된다. '지치지 말고 무릎 꿇지 말고'라고 했으니...
하여 시인은 강한 존재보다는 약한 존재에 더 시선을 준다. 그들이 바로 이 사회를 이끌어온 기둥이었음을 노래하고 있다. 약한 존재에 대한 무한한 애정. 그리고 그런 존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기대.
그런 세상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시인의 눈. 그 눈은 바로 '볼록한 눈'이다.
볼록한 눈
차로 산길을 돌아가다
꺾어지는 곳에서 만난 볼록거울
위험은 항상 사각(死角)에 숨어 있으나
살다보면 돌아 나올 수 없는 길이 있다
굽잇길 저 너머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몰라도
잠시 속도를 늦추고 사주 경계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그럴 때 저 볼록거울
툭 튀어나온 눈처럼 반가운 것들이 있어
또 한 굽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이여, 볼록눈을 한 초병이여
외롭고 쓸쓸하더라도 행여
눈꺼풀을 내리지는 말아라
박일환, 지는 싸움, 애지. 2013년
약한 존재들이 위험에 처했어도 그들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들은 그야말로 지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다. 그 때 그들이 그나마 '무릎 꿇지' 않도록 도와주는 존재. 그 존재가 바로 시인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시인은 이 사회의 위험에 대해서 약한 존재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시인은 '눈꺼풀을 내려서는' 안된다. 늘 깨어 있는 의식을 지니고 약한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환기시켜주어야 한다.
이 시집에서는 그런 시인의 역할이 충분히 잘 드러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있는 약한 존재들. 그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의 시선.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모습이 이 시집에는 오롯이 나타나고 있다.
남일당, 두리반, 영도 조선소 크레인, 희망버스, 강정, 새만금, 파업 노동자 등등.
결코 어렵지 않은 언어로, 누구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언어로 이 땅의 그림자(이 시집의 해설에서 해설자가 평한 용어)들을 노래하고 있다.
그림자가 없다면 빛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기에... 이 땅의 그림자들이 행복해지는 세상, 그런 세상을 위해 시인은 눈을 똑바로 뜨고, 또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이 시집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 의식이 일상적인 언어로 시를 쓰게 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