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책방에 가다.

 

많은 책들은 또다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그 중에 눈에 잘 띄지 않는 책들, 시집...

 

우연히 눈에 띠면 기분이 좋다.

 

이번엔 김광규 시집이다.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이다.

 

이 시집에서 가장 친숙한 시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다.

 

이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는 지금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지는 않는지.

 

과거는 과거일 뿐이고, 지금은 먹고 살기 바쁜 일상에 젖어 더이상의 꿈을 꾸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 시에서는 4.19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면, 지금 우리는 87년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것 아닌가.

 

단지, 과거로... 그 때는 열정이 넘치던 때로, 그러나 지금은 다 지나간 그냥 과거일 뿐인...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는데... 과거는 바로 현재를 이끌어 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니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우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낵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 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1982 3쇄. 58-60쪽

 

슬프다. 지금 내 처지가 이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세상이 변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변하는 모습이. 에고.

 

그래서 이 시집에 실려 있는 이 '소'라는 시,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내가 지니고 있는 뿔. 나도 뿔을 가지고 있음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하는데...

 

 

산비탈에 비를 맞으며

소가 한 마리 서 있다

누군가 끌어가기를 기다리며

멍청하게 그냥 서 있다

 

소는 부지런히 많은 논밭을 갈았고

소는 젖으로 많은 아이를 길렀고

소는 고기로 많은 사람을 살찌게 했다

 

도살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

소들이 가득 실려 있다

죽으러 가는지를 알면서도

유순하게 그냥 실려 있다

 

소들은 왜 끌려만 다니는가

소들은 왜 죽으러 가는가

소들은 왜 뿔을 가지고 있는가

 

김광규,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 문학과 지성사, 1982 3쇄.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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