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당분간 읽었던 시집을 손에서 놓으련다.

긴 휴가기간이 끝나가고, 나 역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하기 때문이다.

 

좀 우습기는 하다. 시 역시 일상에서 언제든지 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는 시를 손에 잡기가 쉽지 않다. 아니 이건 핑계다. 더 많은 시를 읽을 수 있음에도,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생각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또는 삶과 관계 있는 글들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집을 잘 잡지 않는다.

 

그럼에도 새로 구입한 시집은 읽는다. 이게 무슨 일? 새로운 시집들은 읽어가면서, 기존에 읽었던 시집들은 잠시 뒤로 미뤄두고, 다시 내게 다가올 때를 기다린다고 하면 되나?

 

마치 오래된 된장이 맛있듯이, 김치 중에도 묵은지가 있듯이, 시집들은 내 책꽂이에서 잘 익어가고 있으리라. 그동안에 새로운 시집들이 또 익기를 기다리며 자기 자리를 차지하겠고.

 

긴 휴가의 끝. 대미를 장식할 시집은 선택하겠단 고민도 없이 눈에 들어왔다. 이선관의 시집.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환경생태시집이라고도 하고, 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기도 하고, 자유 민주에 대한, 평등에 대한 주제를 담고 있는 시집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더위로 고생한 이번 여름, 녹조가 심해져서 물 문제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고, 온갖 콘크리트 덩어리들로 인해 우리가 이래도 되나 하기도 했고, 에어컨이라는 문명의 이기를 통해서 오히려 더위를 더 가중시키는 사람들의 모습도 겪었고, 자동차가 뿜어내는 매연과 연기와 그 소리로 고생도 했고...

 

더 이 시집이 눈에 띠는 이유는 재생지로 만들어졌다는 점. 1997년과 2000년에 나온 시집이라, 시집의 종이 끝들이 벌써 누렇게 변해가고 있다. 아마도 몇 해가 더 지나면 바삭거리면서 잘못 넘기면 부서지고 말리라.

 

요즘 종이가 온갖 약품으로 무겁고 빛나고 매끄러운데 비해서 이 시집 둘 다 종이는 예전에 우리들이 어릴 적 쓰던 종이와 같다. 그래서 더 친근하고, 환경 생태시집이라는 이름에 걸맞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이선관 시인의 시가 바로 이러한 재생지와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할까. 겉으로 화사하게 꾸미려 하지 않고 시인의 본분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해서 그 고민을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로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생각과 나의 글은 투박한 뚝배기에 담아논 텁텁한 막걸리에 비유하면 적당하리라. 기교도 부릴 줄 모르고 서양냄새도 풍길 줄 모른다. 그냥 살아왔기게 살아왔음의 흔적, 바람이 불면 사그라질 것 같은 ...... 살아있다는 증명이라도 하듯.

 

이선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실천문학사, 2000년. 후기에서

 

이미 시인은 우리나라가 경제개발에 열을 올리던 1970년대에 독수대(毒水帶)란 시를 써서 환경오염을 경고했었다고 한다. 이 시들이 "지구촌에 주인은 없다"에 실려 있다. 다행이다. 환경시의 처음을 볼 수 있어서 말이다. 이 독수대 말고도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대부분 환경과 생태에 관한 시들이다. 시인이 얼마나 환경오염에 민감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경고를 한다. 쉬지 않고. 우리는 이 경고를 얼마나 들었던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치 앞에서 읽었던 김영무의 '오늘의 예언자는'과 같다.

 

환경시의 원조격인 독수대1을 보자

 

독수대 (毒水帶)1

 

바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난다. / 이따이 이따이

 

설익은 과일은 / 우박처럼 떨어져 내린다. / 이따이 이따이

 

새벽잠을 설친 시민들의 / 눈꺼풀은 아직 열리지 않는다. / 이따이 이따이

 

비에 젖은 현수막은 / 바람을 마시며 춤춘다. /  이따이 이따이

 

아아 / 바다의 유언 /  이따이 이따이

 

이선관, 지구촌엔 주인이 없다, 살림터. 1997. 독수대1 전문

 

그래서 이러한 환경오염을 없애기 위해서는 시인은 '생명을 가진 지구가/ 망가져 죽어가기 전에/ 한 사람의 의인이 필요로 하기보담/ 열 사람의 넝마주의가 /절실히 필요로 할 때라고/생각합니다'(열 명의 넝마주의가'에서)고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시를 읽을수록 환경에 대한 생각이 마음에 사무치게 된다. 시인의 절규가 투박한 직설적인 말투로 인해 직접 우리에게 다가온다. 안다는 것, 실천한다는 것임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환경과 생태를 생각하는 시인이 통일에 대해서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분단 자체가 이미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이기 때문이다. 비무장지대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도처에 깔려 있는 지뢰들과, 그리고 대치상황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수입되고 있는 무기들... 여기에 에너지 문제라는 핑계로 원자력 발전소까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에서는 원자력 문제와 분단 문제, 그리고 민주주의 문제가 시집에 고루 실려 있다. 아마도 시인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다면 2011년에 일어난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더 경악을 했으리라. 시인은 이미 체르노빌 사태에 대해서 여섯 편의 시를 써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시들도 생각해볼 만하지만, 여기서는 통일에 관한, 오늘이 8.15광복절이니 말이다. 그런 시를 한 번 보자. 정말로 통일은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우리에게 광복은 해방인 동시에 분단이었으니, 광복절에 분단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통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일도 좋겠단 생각이 드니 말이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여보야

이불 같이 덮자

춥다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따뜻한 솜이불처럼

왔으면 좋겠다

 

 이선관, 우리는 오늘 그대 곁으로 간다, 실천문학사, 2000년.

만약 통일이 온다면 이렇게 왔으면 좋겠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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