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론 한길그레이트북스 61
한나 아렌트 지음, 홍원표 옮김 / 한길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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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자유 없는 혁명은 실패한 혁명이다

 

아렌트의 혁명론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것이다. 혁명은 공적 자유를 창출해야만 한다. 공적 자유를 창출하고 유지하지 못한다면 그 혁명은 실패한 것이다. 그렇다면 공적 자유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공적 자유를 정치적 자유라고 하면, 또 인간이 다른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지 않고, 공적인 분야에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니고 있는 상태라고 정의한다면, 이는 평의회라고 하는 작은 집단에서 가능하리라고 본다.  평의회를 다시 말하면, 작은 단체에서 조금 큰 단체로 또 더 큰 단체로 자신의 생각을 가진 사람이 진출하는 제도를 말한다.

이들 각 단체는 수직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지만 이 단체에 참여한 사람들은 그 단체에서는 수평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을 대표하지만, 또한 그 신뢰에 바탕한 자신의 의견을 지니고 공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바로 이러한 평의회의 모임이다.

그러면 이러한 혁명 개념에 맞는 혁명이 있었던가? 아렌트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혁명을 주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미국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데, 미국의 독립이나 건국이라는 말을 쓰는데, 아렌트는 미국의 독립, 건국을 혁명이라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 미국의 혁명만이 유일하게 성공한 혁명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혁명의 시원으로 이야기하는 프랑스 혁명은 실패한 혁명인가? 프랑스 혁명은 공적 자유의 문제를 밀고 가지 못하고, 사적 차원으로 문제를 치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공적 자유를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행복, 또는 빈곤층의 해방 문제로 바뀌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라고 한다.

 

우리에게 이러한 혁명은 가능한가

 

우리는 이 책을 이런 질문에 역점을 두고 읽어야 한다. 도대체 혁명이란 아렌트에 의하면 새로운 시작이고 공적 영역의 자유 추구라는데, 이 시대에서 과연 가능한가? 우리는 어쩌면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구분하고, 정치사회에서 정권을 교체하더라도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않으면 혁명은 불가능하리라고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는데, 이는 아렌트의 논의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오히려 아렌트의 논의에 따르면 시민사회는 경제 차원의 문제이니, 혁명과는 관계가 없고, 오히려 혁명의 발목을 잡는 요소가 되지 않는가?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아렌트의 말대로 미국이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던 데는 미국에서는 빈곤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이들은 오로지 정치적인 문제로 출발하였고, 이 시작된 문제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키느냐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유지, 발전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하고, 이에 권위를 부여했기에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렇다면 공적 자유를 지칭하는 정치 사회에서의 혁명을 꿈꾼다면 우선, 시민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시민사회의 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이 된 상태에서 정치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과연 그런가? 여기에 대해서는 생각해 봐야한다.

시민사회와 정치사회의 문제가 동시에 일어날 경우, 아렌트의 논의에 의하면 혁명은 방향을 잃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도 아렌트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시민사회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시민사회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집단이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 영역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준비를 하고, 행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아렌트에게서 배울 점은 두가지 문제를 분리해서 생각하되, 다시 종합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99%가 시위에 나섰다. 이는 정치적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이게 아렌트 논의의 핵심이다.

이 99%가 제대로 사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 정치적 영역에서 제도를 확립하고, 이 제도를 유지 발전시켜야 하는 일을 담당하는 개인 또는 집단이 바로 혁명을 이끌어가는 개인 또는 집단이 될 수 있다. 

 

다시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아렌트의 논의에 보면 우리나라는 힘든 나라임에 틀림없다. 우선 국회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 아렌트의 책을 참조하면 이들은 단지 국민을 대표한다기 보다는 국민의 의지를 호도해서, 즉 국민의 권리를 그들이 모두 전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아렌트의 이 책 논의를 따라가면 지금의 국회제도에서는 국민은 공적 영역에 참여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단지 특정한 시기에 투표를 할 뿐이다.

또 이 책에 나오는 미국의 상원의 역할을 기대할 수도 없고, 단지 우리는 하원의 역할만 하는 국회를 지니고 있을 뿐이며, 그래서 공적 영역의 자유를 상실했다고 할 수 있고, 미국 혁명에서는 권위를 대표하는 사법부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헌법에 관한 모든 권리를 국민이 헌법재판소에 양도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공적 영역에서 자유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우리가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 지방자치제를 통해 어느 정도는 확보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한 작은 지역 정치에서부터 자신의 공적 영역에 참여할 자유를 행사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새로운 정치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아렌트의 말처럼 인간은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존재이고, 우리는 새로운 시작을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세상, 그것은 바로 아렌트 말에 의하면 혁명이 가능해지는 세상이리라.

 

이상 내 멋대로 이해한 아렌트의 혁명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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