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집을 읽다보면 한 두 편의 시가 마음을 움직인다. 와, 이 시다.

 

그런데, 어떤 시집은 읽다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우리 현실을 이토록 잔인하게 표현하고 있다니 하면서.

 

시가 세계의 자아화라는 조동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시는 나와 나 외부의 일들을 철저히 나로 받아들이는 존재인데... 내가 받아들인 외부의 세계가 시에 나타나므로, 시를 통해서 내 감정을, 나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게 되는데...

 

이 시집을 읽으면서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쩌면 10년도 더 된 옛일이 이 시 속의 현실일텐데... 왜 지금 현실 같을까?

 

10년 동안 세상이 조금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더 안 좋은 쪽으로 퇴보했단 말인가?

 

이 시집을 관통하는 말들은, 이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이라니... 사전이 세상의 말들을 담고 있는 대상이라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이 세상을 이 일곱 단어로 파악할 수도 있단 얘기가 된다.

 

시인이 제시한 일곱 단어는 "봄, 슬픔, 자본주의, 문학, 시인의 독백, 혁명, 시"이다.

 

그런데 "봄"은 기쁨이 아니다.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로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젊음을 봄이라고 하는데, 젊은 생기가 있고,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넘실대야 하는데, 아니다. 뒷걸음치다로 표현하고 있다. 젊음에서 앞보다는 뒤를 느끼는 세대, 불행한 세대다.

 

그러니 자연스레 "슬픔"으로 갈밖에.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고 되어 있다. 세상에 이 젊음에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 격이라니... 무거운 절망이 느껴진다. 이 절망은 "자본주의"에서 유래한다. 이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젊음이 선택한 길.

 

"문학" 역시 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대상, 누구나 다 힘들게 서 있어야 할 때 잠시 앉아서 쉬라고 자신을 내어주는 존재 그것이 바로 문학이다.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대/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따뜻하게 우리를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학을 하는 사람 중에 시인이 된다. 그러나 시인이란 밖으로 향하기보다는 자신을 향하는 사람. 자신을 향하면서도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사람.

 

"시인의 독백"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이라고... 이 소리들. 합쳐서 나타나면 혁명이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한꺼번에뒤집히는 혁명이 과연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을까?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이라고 한다. 혁명은 그리 쉽게 보이지 않는다. 그리 쉽게 현실이 되지 않는다. 현실은 아직도 어둡다. 이 어두운 현실에서 혁명을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이 지니는 마지막 무기.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누구에게 명확히 전달되지 않는다. 어느 누구에게 속하지도 않는다. 시는 어느 순간,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에게 읽힌다. 그러나 "너"는 시 속에 없다. 시 속에서 너를 찾아선 안된다. 너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를 이렇게 읽었다.

 

이 시집의 지독한 우울함과 암담한 현실에 대한 시들을 이 시가 한 줄로 꿰고 있다고.

 

다만, 이 시들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시에 나타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들이 나아갈 바를 찾으면 되니까.

 

그게 이 시집의 긍정적인 면일테니까.

 

덧말

 

이 시집에서 지독한 우울함, 암울함이 느껴지는 시들은, 가족, 서른 살, 줄리엣, 봄이 왔다,연무도시, 벌레가 되었습니다, 달팽이 대장, 바깥 풍경 등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전문이 아니다. 몇 개의 문장이 빠졌다.  전문은 이렇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 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문학

길을 잃고 흉가에서 잠들 때/멀리서 백열전구처럼 반짝이는 개구리 울음

 

시인의 독백

"어둠 속에 이 소리마저 없다면"/부러진 피리로 벽을 탕탕 치면서

 

혁명

눈 감을 때만 보이는 별들의 회오리/가로등 밑에서는 투명하게 보이는 잎맥의 길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