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 잡스 (양장본) 스티브 잡스
월터 아이작슨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잡스에 대한 길고 긴 여정을 끝냈다. 그의 일생이 900쪽에 가깝게 정리되어 있는 이 책. 파란만장한 삶을 산 그의 삶을 이 정도로 정리할 순 없겠지만, 무엇보다도 잡스가 의뢰한 전기라는 점에서, 잡스 생전에 수많은 인터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전기라는 점에서 잡스에 대한 가장 정리가 잘 된 책이라는 생각을 한다. 

지금껏 전기는 그 사람이 죽고난 직후에 바로 읽지 않았다. 그만큼 그 사람과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나고 그 때서도 그 사람이 생각이 나면 그 때서야 전기를 구입해서 읽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이 잡스 전기는 곧장 읽고 싶어졌다. 그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도 많았고, 그의 스탠퍼드 대학 연설문이 너무도 좋았고, 또 아이폰이나 아이패드다 하는 물건들이 지금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기에, 제품 설명회를 하는 모습이 너무도 당당하고 자신감 있어 보여서, 잡스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나라 삼성과 특허권 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상의 최고경영자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그가 이룬 성과에 대해선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그의 카리스마에 대해서도 말할 필요가 없다. 이는 이미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 아니던가. 하여 성과보다는 그에 대해 든 느낌으로만 이야기하자면. 

처음 부분부터 마음이 불편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어떻게 이렇게 오만방자하지? 입양이 되었으면 입양한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최소한 그들을 힘들게는 하지 않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자신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다고, 모든 일을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나 하는 생각. 

애플을 창립하고 그가 경영 일선에 나선 모습도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그를 중심으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모습, 아무리 어렸을 때 버려졌다는 트라우마가 있다고 하더라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그가 창의적인 인물임은 인정한다 하더라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감싸기는 커녕 쓰레기라고 하는 모습은 영 다가오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을 저렇게 이분법으로 딱 자를 수가 있는가 싶기도 한데, 그는 오로지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에게만은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밑에서 일하는 평범한 보통사람은 어떻게 되지? 그런 사람은 아예 애플 같은 회사에 들어가지 않으면 된다고? 그건 아니다. 보통 사람도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회사가 되어야 하지 않나? 천재들만, 창의적인 사람들만 모인 회사가 과연 좋은 회사일까? 

여기에 잡스 특유의 "현실왜곡장"이 있다는데, 이는 사실을 호도하여 다른 결과를 낳게 하는 잡스만의 리더십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왜곡장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 현실 왜곡장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동 착취를 당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잡스의 말 한 마디로 직장을 잃었는지, 이 책에는 잘 나타나 있다. 물론 지은이는 이를 잡스의 성격으로 여기고 여기에 대한 옳다 그르다의 판단은 유보하고 있지만 말이다. 

잡스가 채식을 하고, 선불교에 심취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잡스는 자신의 사상과 직장에서의 모습이 너무도 다른 분열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의 모습 속에서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를 연상했다면.. 이건 나만 그런 걸까? 잡스 자신이 애플의 광고에서 빅 브라더에 대항하는 모습을 비췄다고 하는데, 나중에는 잡스 자신이 빅 브라더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인문학적, 예술적 제품으로 사회를 혁신하고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가길 바랐다고 하는데, 어느 정도는 성공했겠지만, 여기에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면 과연 스마트 폰 시대가 우리가 바라는 혁신적인 미래 세계라고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 인간을 기계에 종속되게 만들고 있지 않나? 지금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보라. 자신의 생각을 포기한채 오직 이런 기계에 매달려 지내고 있지는 않나? 이게 어떻게 인문학적 제품이고, 이런 모습이 어떻게 혁신적인 새로운 세상의 모습일까? 

이런 기계들이 잡스가 믿었다는 선불교에 통할까? 채식하고 통할까? 채식이나 선(禪)은 나와 다른 남을 포용하고, 나보다 못한 남과 함께 함으로써 잘남 못남을 떠나 같은 인간으로 함께 어울림을 추구하지 않나. 그러나 잡스는 사람을 그렇게 포용하지는 못했다는게 이 책에 나와 있는 사실이니...  

하지만 그는 기계에 종속당하지 않았다. 그가 디자인을 우선시하고, 이 디자인에 기술을 맞추라고 한데서 보듯이 그는 미적 생활을 상당히 중시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실용, 실용하는데, 이를 잡스가 들으면 "쓰레기들!"이라고 비웃지 않을까 싶다. 

그가 빌게이츠를 비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는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청소년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도 잡스처럼 그러한 일탈문화를 경험해 봐야 하지 않아 했을 때, 과연 우리는 무엇이라 말해줄 수 있을까? 그래 그래야만 창의적인 인물이 돼 라고 하나? 아니면, 그건 범죄야 하나? 둘 다 옳지 않은 답임에는 분명한데... 

환각제나 히피문화가 꽉 짜여진, 또는 주어진 세계에서 탈출을 꿈꾸는 일종의 반항일 수 있지만, 제대로 된 반항이란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억압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하고, 그것에 맞서 대응을 할 때 반항, 저항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환각제나 히피문화들은 저항이 아니라, 회피에 불과하지 않을까? 즉 자유란 이름을 띤 방종이지 않을까. 물론 잡스는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그 때의 경험이 창의성을 살리는 쪽으로 작동을 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러할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적당한 경험이란 도대체 어느 선까지일까? 이런 선 긋기가 이미 창의성을 억압하는 걸까? 잡스에 대한 책을 읽으며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다. 

그의 제품 설명회는 부흥회와 같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는 준비를 철저하게 하고, 관객들을 매료시킨다는 의미다. 자신이 이미 제품에 매료된 상태에서 홍보하는 제품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홍보하는 제품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잡스는 그래서 제품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홍보를 하지 않고, 그가 홍보를 할 때에는 이미 제품에 대해 완벽하게 알고 통제를 할 때라고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상태에서 그는 관객들도 통제하게 된다. 

결국 제품의 질만이 아니라, 제품을 홍보하는 과정도 역시 제품의 질과 연결이 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잡스이고, 이것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잡스에 열광하는 이유이다. 우리나라 어떤 경영자가 자신의 제품을 이토록 잘 알고, 이토록 열정적으로 홍보를 하고 있는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런 저런 점을 떠나 그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꿔놓은 점은 인정해야 한다. 그걸 인정한 상태에서 이제 우리는 그가 바꿔놓은 세상에서 우리가 좀더 인간적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잡스의 유산을 계승하는 방법일 것이다.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점에 우리도 서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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