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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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 장소가 결정된다고, 어제 오후부터 선정절차가 어쩌니 저쩌니 한참 떠들어 대더니... 아침에 일어나니 평창이 압도적인 표차로 선정되었다고 난리다. 

국가적인 경사니, 세 번째만의 성공이니, 전국민의 성원에 힘입은 결과니 모두들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는 듯이 방송에서 호들갑을 떨고 있다. 

말 그대로 호들갑이다. 과연 전국민이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되길 바라고 있을까. 정말로 이런 일이 전국민적 관심사가 되어야 할까. 이 방송, 저 방송 가리지 않고 거의 똑같은 방송을 내보내고, 이것도 한두 번도 아니고, 거의 하루 종일, 평창, 평창 하고 있으니... 

그래, 경사지. 정치인들까지 평창에 가서 기원을 한답시고 있고, 방송사들은 다들 평창에 가서 특집방송을 한답시고 죽치고 있었으니.. 이거 다른 말로 하면 스포츠는 단지 우리가 즐기는 운동이 아니라, 자본과 정치가 결합된 금권연합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 우리나라에 무척이나 많이 홍보가 된 분노하라란 책을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이 레지스탕스 출신의 노인은 무엇에 분노하라고 하는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주 짤막한 글로 이루어진 책. 여기에 저자와의 인터뷰 기사와 조국 교수의 글까지 합쳐도 채 80쪽이 되지 않는 소책자다. 읽은 소감을 먼저 이야기하면 참 좋았다다. 그냥 좋았다가 아니라, 맞아 맞아였다고 할까. 

그는 '레지스탕스의 기본 동기는 분노...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분노의 동기를 갖기 바란다'(15쪽)고 하고, '이런 분노의 이유들은 ..참여의 의지로부터 생겨난다'(18쪽)고 한다. 따라서 무관심은 가장 나쁜 일이며, 이는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22쪽)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참여해야 할까. 

그는 지금 우리는 두 가지 도전에 놓여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 사이에 가로놓인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격차'이고, 다른 하나는 '인권, 그리고 지구의 현재 상태'(22쪽)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분노할 줄 알아야 하는데, 이 때 분노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이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분노가 끓어넘치는 상태를 '격분'이라고 하는데, 그는 격분은 희망을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우리는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34쪽)고 한다. 

그래서 글의 마지막을 이렇게 장식한다.  

"창조, 그것은 저항이며 

저항, 그것은 창조다."(39쪽) 

그럼 나는 왜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되었는데, 기쁨보다는 분노의 감정이 먼저 앞섰을까. 그것은 올림픽 자체가 이미 인간 중심의 건설에 가깝지, 결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아무리 친환경 친환경 하지만, 경기장을 건설하기 위해서, 경기장에 진입하기 위한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자연파괴가 따를 수밖에 없다. 단지 인간 몇몇이 즐기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숲을 파괴하고 있는지, 올림픽을 개최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여름에 한 번 스키장이 있는 곳에 가 보라. 그 곳, 마치 70-80년대 남학생들 머리가 조금 길면 바리깡으로 고속도로를 내었듯이 그렇게 숲 군데군데 도로가 난 듯, 황량하게 패인 그 산들을 보라. 과연 내가 겨울 한 철 즐기기 위해 이렇게 숲을, 산을, 나무를 괴롭힐 권리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또 지역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던 사람들은 이제 변두리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경기장 주변으로는 유흥업소, 숙박업소가 들어올 수밖에 없기 때문에... 자연과의 조화는 애초부터 불가능하단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번 평창이 유치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그냥 선정되었습니다 하고 넘어갔으면 그랬나 하고 말았을텐데... 방송 3사가 모두 국가적인 경사 운운하면서 마치 자신들이 방송 안하면 방송사가 아닌듯이 똑같은 방송을 계속 내보내니 ...

잘 생각해 보라. 이번 평창 유치에 총력을 기울인 사람들이 누구인가? 정말로 평창에 살고 있는 주민일까? 한진그룹 회장, 삼성 회장, 그리고 정치인들 아니던가.  누가 이득을 볼까? 그곳에 살고 있던 주민?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치르는 일이 경사라 하여도 이렇게까지 한 쪽으로 치우친 방송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이번 일에 거리를 두고, 또 마음 한 쪽에선 부정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노인이 언론이 제대로 기능해야 한다고 하는데, 뮌헨인지 안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곳 중 한 곳은 환경단체들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올림픽 유치를 반대한다는 시위도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환경단체들은 어떻게 하고 있었나? 정말로 올림픽 유치가 환경하고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상관이 있다면 분노해야 하고, 이 분노는 최소한의 환경파괴, 자연과의 조화, 그리고 지역주민들의 조화로운 삶 보장 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언론에서 다른 생각들을 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언론의 이 복제판 같은 보도들이 날 화나게 한다.

이렇듯 이 책을 읽으면서, 젊은이들은 많은 분야에서 분노할 줄 알아야 진보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환경을 생각한다면 환경파괴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평등을 생각한다면 불평등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자유를 생각한다면 억압에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건전한, 희망의 분노이어야 하고, 따라서 이는 비폭력이어야 한다. 비폭력, 이는 약자의 무기가 아니라, 강자의 무기다.  

바로 이 비폭력에는 분노가 들어있기 때문이고, 이 분노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한참 옛날의 사람, 허균이 생각났다. 그가 썼던 "호민론" 

이 분노하라는 책에서 언급한 무관심이 바로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는 '항민'이라면, 분노는 하되, 참여는 하지 않는 사람은 '원민'이며, 분노를 참여로 전환시키는 사람은 '호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허균이 호민을 갈구했듯이, 이 분노하라의 작가 역시 호민을 갈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시대와 공간을 떠나 세상을 직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깨달을 수 있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렇다면 호민은 어떻게 되는가. 그는 이 책에서 창조적 저항의식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들고 있는데, 하나는 지지 정당을 정하고 투표를 꼭 하는 방법(66쪽)이라는데, 이는 완전한 방법은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이 정당 지지 방법을 보완하는 참여의 방법은 기구나 협회, 운동 등에 참여 하는 것이고, 조합에도 참여해야 한다(66쪽)고 한다. 

결국 뒤의 방법으로 앞의 방법을 더욱 구체화하고 힘있게 할 수 있다는 말이 되는데.. 노조조직률이 극도로 낮은 우리나라,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허균이 바랐던 호민이 지금 우리 시대에도 필요하지 않은가. 허균의 호민론과 이 에셀의 분노하라는 이렇게 통하고 있지 않은가. 

작지만, 사회 여러 분야에 적용될 수 있는,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는 책. 

우린 너무 분노를 참고 있지 않았나. 참는 것이 능사는 아님을, 착한 사람 신드롬에서 벗어나야 함을, 이 책은 이야기 하고 있다. 제목대로, 분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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