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자유교육 - 위대한 평민을 기르는
송순재.고병헌.카를 K. 에기디우스 엮음 / 민들레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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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 하면 두 가지 방향에서 논의가 된다. 미국식이냐 유럽식이냐. 여기에 몇 가지 요소가 더 섞일 수가 있지만 큰 틀에서 보면 이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나는 미국식보다는 유럽식, 특히 북유럽식을 좋아하는데,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등의 나라 교육제도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들 교육에 대해 소개한 글을 읽어보면 부러움과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도 이런 교육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엔 우리나라에서도 대안학교가 많이 생겼고,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따라서 대안학교들도, 또 현재 논의되고, 많이 만들어지고 있는 혁신학교들도 이런 책을 참조해서 우리나라 또 각 지역의 특성에 맞게 자신만의 학교들을 만들어가면 좋겠단 생각을 하게 된다. 

이책에 나온 관심있는 내용과 내 생각이다. 

자유학교의 공통원리 ... 폴켈리(folkelig)적 요소, 즉 평면적 요소 ... 자기 자신과 타자를 위해 기꺼이 책임지는 자세 ... 평등을 지향하는 책임 (61쪽)   

-> 모든 교육의 기본이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남을 밟고 내가 올라서면 된다는 승자독식주의 교육이 아니라, 함께 모두 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교육. 그게 필요하다.  

부모의 권리 ... 법적으로 확정된 교육의 의무가 있지만, 학교교육을 의무사항으로 확정하지는 않았다. (63쪽)   

-> 우리나라 대안교육계에서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의무교육을 의무 취학으로 판단을 한다. 따라서 학교에 보내지 않으면 부모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 많은 부모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징계를 면하긴 하지만, 이 과정이 힘들고 복잡하다. 의무교육은 의무 취학이 아니라는 사실, 교육법에 이 조항만 추가한다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텐데, 아직도 학교만이 교육을 담당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으니 원.

학교는 교사가 특정한 종교적, 정치적 신념을 갖도록 요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교사가 학교 근무시간 안팎으로 이러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고 살도록 요구할 수 있다(69쪽)  

자유증등학교의 해설서 .. 교육과정이나 이데올로기의 자유: 학교가 스스로 교육과정을 정치적 또는 종교적, 교육학적인 이념에 따라 정했다고 해도 국가는 간섭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정부는 어떤 교육과정이나 학교라도 인가한다. 곧 국가전복을 위해 학생들이 저항해야 한다는 교육목표에 따른 커리큘럼, 글자 그대로 성서를 강독하는 듯한 교육과정, 교실에서 배우지 않고 가게나 작업현장에서 일하는 것으로 대신하는 학교, 과목이 하나밖에 없어서 교사나 학생이 그때그때 적당하게 학습주제를 정하는 학교도 있을 수 있다. (169쪽) 

-> 우리나라를 보라. 교사가 정당에 가입했다는 확정되지도 않은 혐의로 징계를 받도록 강제당하고 있으며, 시국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그것이 정치적인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징계를 하라고 강요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사는 사랍학교든, 공립학교든 공무원인 교사로서만 지내야 하지, 시민으로서 자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없다. 이러한 차이를 우리나라의 특수성이라고 생각하고 교사들이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발언할 수 없도록 하는 관습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성과 교사이기 이전에 시민으로서 당연히 정치적 권리를 가질 수 있게 제도적인 면을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전인(全人)을 길러 내는 것을 교육의 과제이자 목표로 삼는다 (79쪽) 

-> 우리나라도 교육 목표는 전인이다. 그러나 사실 학교에서는 전인보다는 단편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너무도 많이 분절된 과목들, 그리고 그 과목들을 통해 인간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남보다 앞서 갈 수 있나를 공부하기에 목표와 실천이 따로노는 교육을 지금의 공교육은 하고 있다. 대안교육에서는 공교육보다는 훨씬 낫지만, 대학이라는 장애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는 대안학교도 있으니 목표와 실천이 어울리게 노력해야 한다. 

함께 협동으로 작업하기를 그리 내켜 하지 않는 학생들, 불안감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학교 안의 분위기는 신임 교사들을 힘들게 하기에 충분하다(95쪽)  

-> 신자유주의를 덴마크라고 해서 피해가지는 못한다. 이 나라도 지금까지 해왔던 교육에 손질을 하려고 하고, 자유학교들에 대해서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비판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나 보다. 이 구절을 보면서 덴마크 교사들도 우리나라 교사들과 비슷하게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럼에도 이들은 자유학교라는 틈새를 이용해서 아이들을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아이들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데...

민주주의의 질은 소수가 어떻게 취급되는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99쪽)  

사회시스템 가운데 10% 정도의 '틈새'를 열어 놓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야말로 교육개혁에서 중요한 포인트... '비주로' 또는 '비주류의 권리'를 표방하는 일이 많은 것(173쪽)  

 이런 교육이 가능한 진짜 배경은 대화를 중시하고 자유로우며 비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인지도 모른다 (151쪽) 

-> 가장 좋은 말이고, 소수가 존중되면 다수는 행복해 진다. 소수를 존중했을 때 왕따라는 말은 존재할 수가 없다. 소수를 존중할 수 있는 방법, 가장 좋은 방법이 대화이다. 대화는 상대를 나와 동등한 존재로 인정할 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담 우리 교육에서 필요한 것은 바로 대화이다. 열린 마음으로 하는 대화, 그것이 교육인데, 지금 우리나라는 닫혀 있다. 이 닫힘을 풀 수 있는 길,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의도적으로라도 확보해내야 한다.

지역 행정당국은 기본교육을 무상으로 제공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부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이 일반 사립학교나 자유학교에서 공부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부모들은 학비의 20% 정도를 부담해야 하고, 동시에 학교위원회의 구성원이 될 권리를 갖는다(103쪽) 

-> 이런 점은 우리나라 대안학교에 대한 지원에서 생각해 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대안학교가 귀족학교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을테니까. 

우리는 7학년까지 숙제를 내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과제를 해내야 할 빚진 자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학교가 끝나면 당연히 집에서 쉴 권리가 있습니다.(210쪽)  

-> 얼마나 부러운가. 이 아이들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는 어른들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나라 아이들을 보라. 초등학교 때부터 학교 숙제에,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학원 숙제에 시달려 도대체 어른들도 주장하는 8시간 노동제를 훌쩍 넘어서 과중한 부담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부모 한 명 한 명의 의지에 맡겨두기엔 이미 너무 힘들어진 이 사회에서,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 지금 추진하고 있는 학원 교습시간 제한이 아니던가. 여기에 한 발 더 나간다면 의무교육에서는 과제를 내주지 않는 방향으로 나가고, 학교 시험에서는 수업 시간에 다룬 내용으로만, 결코 수업에서 다루지 않은 경시대회 문제라든지, 난이도가 높은 문제를 내지 않도록 강제하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지 않을까. 제도로 강제해야지만 조금이라도 아이들이 편해지고, 또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고 고치려는 실천을 하지 않을까 한다. 

시민대학에 관한 그룬트비 교육의 의도... 첫째는 참된 자아를 찾는 일로 학교에서는 인간이란 무엇인지, 나는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가르쳐야 한다는 의도. 둘째는 학교는 공동의 선에 답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에서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찾아가는 곳 (217쪽)  

-> 이거 참. 지금 우리나라 대학의 현실과 비교를 해보면 우리가 추구하는 교육은 교육이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대학은 취업기관이지 교육기관이 아니지 않은가? 인간이란 무엇인지, 공동선이란 무엇인지 고민하는 학과는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런 교육을 하려고도 하지 않아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나온 지가 꽤 되는데, 아직도 우리는 기업이 원하는 학생을 배출하려고 하지 전인적인 인간을 양성하려고 하지 않는다. 교수라는 직업이 파편화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되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고민하는 지식인 집단이 안 된 지가 오래되어서인가? 사회에서 인정받는 만큼 책임을 지려는 자세들을 교수들도 가질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교사회의조차 아이들에게 닫혀 있지 않다. 끼어들기를 조장하지는 않지만 나가달라고 말하지도 않는다(251쪽)  

-> 꿈같은 얘기다. 내가 학교 다닐 때 교무실은 신성한 공간이어서 차마 들어갈 수가 없었고, 한 번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경례를 하고 용무를 말한 뒤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학생들과 단절된 공간 그곳이 교무실이었다. 그리고 교사들의 회의시간에는 어디 감히 학생이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어쩌다 우연히 교사들이 회의를 하는데 학생이 교무실에 있으면 대뜸 "야, 너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전달되는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즉 본다는 행위가 교육에 매우 필요한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교사들의 회의 모습을 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여기에 학교 운영의 전반적인 일을 결정한다는 학교운영위원회에도 학생들의 참여는 봉쇄되어 있다. 어쩌다 참여해도 참관인 자격으로 참여할 뿐이다. 최근에 교사회의, 학생회의를 법제화 한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꼭 필요한 일이다. 학생들이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제도화하면 교장 선의 여부에 의해 학생들의 참여가 결정되는 일은 없어지겠지. 조금 더  학교가 민주화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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