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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소설에는 작가가 직접 등장한다. 그렇다고 오에 겐자부로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된다. 소설이니까. 그 점을 명심하고 읽으면 소설가를 등장시켜 작품을 전개해 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소설가가 직접 등장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은 예술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는 소설과 시와 음악, 그리고 영화, 연극이 나온다. 사진까지 치면 다양한 예술이 나오는데, 그런 예술들이 융합되어 일본 현대사와 한 개인의 아픔이 융합되고 있다.
일본은 패전국이다. 지금은 패전국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지만, 그들도 패전이 된 다음에는 미군에 점령당한 경험이 있다. 점령군으로서의 미군. 하지만 일본인들은 점령군인 미군에게 어떤 반항도 하지 않는다.
이런 미군에게 보호를 받고 성장한 한 여배우가 있다. 이 여배우를 중심으로 소설가인 클라이스트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미하엘 콜하스 계획'을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하기로 한다. 즉 그의 작품인 '미하엘 콜하스'를 각 나라에 맞게 각색하여 상영하겠다는 것.
본래 한국에서 하기로 했는데, 김지하의 투옥과 더불어 한국에서는 할 수가 없게 되고, 이를 일본에서 하기로 했다는 것. 김지하 석방 운동에 관여했던, 또 여러 작품을 발표했던 오에 겐자부로에게 시나리오를 맡기고 싶다는 것. 여배우로 출연하는 이미 오에 겐자부로도 알고 있던 '사쿠라' 씨와 만나고 오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 '사쿠라' 씨는 오에가 좋아했던 에드가 알렌 포의 '애너벨 리'라는 시를 인용한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던 것. 거기서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소녀. 그리고 그 영화를 어린 시절에 봤던 오에. 하지만 무언가 고통에 시달리는 사쿠라.
내막은 나중에 밝혀진다. 영화 촬영 도중에 여학생들의 사진을 몰래 찍던 서양 작가의 활동이 밝혀지고, 영화가 무산될 때 사쿠라가 처음 나왔던 영화의 다른 버전을 보게 된 것. 거기서는 사쿠라를 보호해줬던 사람의 행위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이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공개되지 않았던 것은 어린 소녀의 몸을 유린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쿠라 씨는 그렇게 유린 당했던 것.
한국은 이렇게 일본에 유린당했던 과거가 명확하게 드러났지만, 일본은 미국에 당한 것들이 이 영화의 다른 버전처럼 아름답게 미화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생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진실은 소녀를 유린하는 미군처럼, 일본 역시 미국에 알게모르게 당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고,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고 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그럼에도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더 나아가야 한다. 30년이 지난 뒤, 그들은 다시 영화를 만들기로 한다. 이번에는 내용이 바뀐. 민간 전승에서 이어지던 내용을 계승해서.
일본에서 일어났던 민중반란,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여성, 메이스케 어머니에 대해, 사쿠라 씨가 충격을 받았던 애너벨 리의 영화 끝부분에 나오는 음악을 차용해서 하기로.
결국 작품 속의 작품에서도 여성은 유린을 당한다. 그러나 거기서 머물지 않는다. 더 한발 나아간다. 너희가 우리를 유린했지만 우린 꺾이지 않는다고... 우린 더 나아갈 거라고. 그런 다짐을 보여주는 넋두리로 영화를 찍기로...
결국 소설은 시와 소설, 영화와 음악을 통해 한 개인이 치유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지만, '미하엘 콜하스'라는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통해서 반항하지 못하고 있던 일본의 당시 모습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미하엘 콜하스'는 남의 나라 일인 것처럼 여기는 일본 사회.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도 이러한 '미하엘 콜하스' 늘 있어 왔음을... 그것을 메이스케 사건을 통해 드러내고 있으며, 이런 저항의 중심에 여성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즉 여성은 부차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회와 자신을 변화시키는데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살아가서, 결국 역사의 주역이 되고 있음을, 사쿠라와 메이스케 어머니의 존재를 통해서 작가가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