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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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남은 종들을 보면 호전적인 종이 아니라 다정한 종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정함이 기반이 되면 무리를 이뤄 생활할 수 있으며, 무리를 이룬다는 말은 서로 돕는다는 말이고, 이는 다른 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된다. 이런 무리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는 버텨낼 수가 없다.


함께함이라는 말에는 이미 나를 어느 정도 양보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나만이 양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양보하면 남도 그만큼 양보한다. 호혜라는 말이 성립한다. 


이 책은 이렇게 다정함이 우리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양태가 어느 동물과 더 가까워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인간은 보노보처럼 다정함을 바탕으로 지구에서 가장 강한 종으로 군림해 왔다. 단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뇌의 발달과 다정함이 함께함으로써 인간은 지구에 더 많은 인구를 퍼뜨려왔다고 한다.


사회생활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다정함이라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다정함이 사회 관계를 잘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이론에서도 가장 승률이 높은 프로그램은 호혜 원칙을 잘 지킨 프로그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다는 것을 게임이론을 통해서도 증명하고 있다.


(엑셀로드 교수의 게임이론이라고 하는데 '28. 협력의 비밀, 로버트 엑셀로드의 '협력의 진화' #한봉규 (tistory.com)' 이 사이트에 이 이론이 잘 설명되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열린책들, 2001년 초판 3쇄. 34-36쪽)에 '협동 상호성 용서'라는 제목으로 이 이론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절판이 되었으니, 아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될 듯)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다정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다정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교육으로, 홍보로 가능해질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고... 자주 만나야 한다고.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벽을 조금씩 허물어가야 다정함을 통한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이미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문화 감수성 훈련이 본래 자리잡고 있던 불관용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250-251쪽)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다음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해결책은 다름 아닌 접촉이다. 만남이다. 이런 만남이 집단 간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집단 간 갈등의 경우에는 접촉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동의 변화가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260쪽)


그러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교육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한다. 교육이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론으로, 지식으로만 하는 교육이 유용하지 않다는 말이다. 교육을 하는 곳, 학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다. 학교는 바로 접촉을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다. 그러니 교육은 다정함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루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교육으로 편협함을 없애는 일의 효과는 다소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교육은 사회화라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사람들과의 우호적인 접촉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 이상적인 공간이다.' (260쪽)


자, 이 말을 지금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적용해보자. 어떤 학교가 필요한가? 특정한 소수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다수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가 필요하다. 오히려 특정한 학생들이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하게 한다면, 이것은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길러주는 일이 될 수 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인정한다면 학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지내는 장소여야 한다. 어떤 특정한 구성원들로 한정된 학교는 다정함을 발현시키기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학교 제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수월성을 강조하면서, 영재교육을 하겠다고, 또 특정한 재능을 지닌 학생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겠다고 다른 학생들과 구분지어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러한 특수학교(특정한 목적으로, 그 목적에 어울리는 학생들만으로 구성된 학교) 설립에 반대할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저자가 말한 대로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면서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양한 구성원들이 자주 만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소, 그런 장소로서의 학교라면 교육이 집단 간 갈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300쪽)


친구는 나와 같은, 또는 비슷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하는 존재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종들 또 무생물들도 포함이 된다. 그들을 비인격화하는 태도가 아닌 다른 존재들도 인격화하고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다정함의 원천이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 점점 더 각박해지는 시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다정함이 살아남는다는 저자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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