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4
카밀로 호세 셀라 지음, 정동섭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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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악하게 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망설이지 않고 우리는 유전 요인을 든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듯이, 부모에게서 반반 물려받은 유전자 어디엔가 폭력 유전자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정도는 타당한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유전이 모든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모든 사람이 같은 유전자를 갖고 있어도 아마 행동은 모두 똑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유전자 복제를 한다고 해도, 복제인간이 태어난다고 해도 똑같은 생각, 똑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복합적인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그렇다면 악하게 하는 요인으로 환경을 들 수 있다. 다시 한번 속담을 인용하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란 말이다. 이 말은 유전에도 해당하지만 환경에도 해당한다. 아버지가 한 행동을 보고 자란 아들은 아버지와 비슷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버지를 '어머니 또는 부모, 가족'으로 바꿔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합쳐지면 악한 행동을 할까?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유전, 환경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할까? 가족의 유전이나 환경에 책임을 묻는 것이 의당 타당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렇다면 모든 책임을 개인이 져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폭력 행위에서 사회의 책임은? 바로 유전이야 생체 문제니 논외로 치더라도 가족 환경은 사회적인 문제와 맞물릴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가족 환경이 그렇게 좋지 않음에도 개선하지 못하도록 방치해둔 것은 사회의 책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라는 울타리가 제대로 작동을 한다면 폭력 행위는 많이 감소될 수 있다고 보는데... 이 소설에서 주인공 파스쿠알은 가족의 유전, 환경적 요인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폭력적인 아버지, 어머니. 이들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적인 유전, 환경은 그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결혼식에서 오다가 친구들과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칼을 휘두르는 파스쿠알.


그에겐 자신의 명예가 걸린 일에 싸움을 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에겐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다. 이런 그에게 사회가 어떤 제재, 또는 교화를 해야 하는데, 그는 이 사건으로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하긴 신혼여행을 가는데 타고 가던 말이 노파를 쳐서 노파 머리가 깨졌음에도 이들은 돈 한 푼 던져주고 갈 길을 가버린다. 그리고 노파 손자가 찾아왔지만, 그 역시 돈 한 푼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가버리고.


이렇듯 사회에서 폭력이 아무렇지도 않는 일로 치부된다. 그냥 있을 수 있는 일. 이런 사회에서 폭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사람이 나약한 사람이 될 수 있다. 만약 사회가 적절히 개입하고, 환경을 조성한다면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되'는 일은 없다.


하지만 파스쿠알에게는 그런 사회가 없다. 그냥 묵인, 방조다. 그러니 그의 폭력은 살인으로까지 간다. 자신의 아내와 바람을 피운 친구를 별다른 죄책감도 없이 죽이고 만다. 또다시 폭력이다. 이번엔 처벌을 받는다. 그런데 형량은 28년인데 3년만에 나온다. 이런 세상에! 살인이 겨우 3년이라니...


집에 온 그에게 또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어머니다. 물론 망설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자신의 부모를 죄책감 없이 죽일 수는 없다. 그 정도다. 겨우... 그리고 다시 감옥행인데...


그에게 폭력은 일상이다. 가족에게서 늘 보아왔던 폭력이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묵인되는 폭력이다. 이런 폭력에서 그에겐 반성이란 없다. 그러니 사회라는 가장 커다란 환경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으면 개인의 폭력을 멈추기 힘들다.


결국 개인의 유전, 환경이라는 요소를 사회가 감싸안으면서 울타리 역할을 해줘야 한다. 사회에도 많은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파스쿠알에게는 그것이 부족했다. 여기까지 좋다. 사회가 바람직한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까지는.


그런데 작가 이력을 보니, 노벨상을 받았다고 해서 어느 정도 기대는 했었는데, 세상에 프랑코 반란군에 가담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가했다고 한다. 물론 금방 부상을 당해 전선에서 이탈을 했지만. 그리고 스페인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프랑코 독재에 부역한 인물이란 얘긴데...


읽으면서 찝찝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는데... 무어지? 폭력에 개인의 유전, 환경에만 책임을 묻지 않고 사회에도 물어야 한다면? 이 소설에서 배경이 되는 사회는? 바로 프랑코 독재 이전의 사회다. 이런!!! 


프랑코 독재 이전의 스페인 사회는 폭력을 제어할 어떤 사회적 규범도 없는 사회, 폭력을 양산하는 사회였다는 말이 된다. 폭력적인 개인을 들어 사회를 비판하고 있는 듯하지만, 결국 프랑코 독재를 옹호하는 그런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생애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대입하면. (이 책 뒷부분에 실린 해설을 보면 이 점에 대해서 작품 내용과 관련지어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이 소설 참 문제 있는 소설이다. 그런 점을 잊지 않지는 말아야 한다.그점을 잊지 않고 현대 사회에 적용을 하자. 


폭력은 개인의 유전적 요소, 환경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사회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 하여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 강제에 의한 규제가 아니라 스스로 규제할 수 있는, 자율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제목이 '파스쿠알 두아르테'가 아니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인데, 폭력은 개인에게서만 책임을 찾아서는 안된다는 제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가족에서 그치면 안 된다. 이 가족은 사회의 일원이고, 사회는 가족들이 넘어서는 안 될 선을 제시할 수 있고, 또 제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회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런 가족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이 소설, 프랑코 이전 사회를 비판한다는 점은 잊지 말되,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소설로 읽자. 개인-가족-사회라는 원을 그리고, 개인이나 가족이 사회라는 원 안에 있음을 명심하도록 하자. 


어떤 행동에는 개인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사회에도 그 못지 않게 큰 책임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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