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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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반부를 읽을 때만 해도, 교육의 힘에 대해서 말하겠지 하는 기대를 했다. 이런 구절에서 그런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버리고 떠난 오빠를 흉내 내면서 모르몬 사상의 한 분과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보낸 그 긴긴 시간들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 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109쪽)


그런데 아니었다. 교육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교육에 의해서 관점이 뒤틀린 사람이 제 관점을 찾아가는 얘기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교육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교육은?


사실 이 책을 거의 다 읽어가면서 이건 '배움의 발견'이 아니라 '교육의 해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군 하는 생각을 했다.


배움이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천하는 일이라면 교육은 위에서 주어진다는 생각. 사실 교육이 내면에 아직 드러나 있지 않은 능력들을 끄집어내는 행위라고 하는데, 이 책은 끝나갈 때까지 광신적인(?다른 종교에 대해서 이런 표현을 하기는 그런데, 이 책에서 저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적절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버지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아버지 관점에서 벗어나 살아가려는 모습은 '배움의 발견' 아니라 '교육에서의 탈출'이라고 해야 맞다.


차라리 소설이었으면,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지닌 소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좀더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으려나?


학교, 정부를 사탄으로 보는 모르몬교도 아버지와 그를 추종하는 엄마에게서, 이들에게는 병원 진료조차도 사탄에게 몸을 맡기는 행위가 되니 참 먼 과거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저자인 타라 웨스트오버는 1986년생이다. 1986년 미국에서 태어난 여자 아이가 겪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참...


하지만 아무리 가리고 막으려고 해도 그럴 수 없을 때가 있다. 자식은 품 안의 자식이어야 한다. 자식이 제 삶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바로 저자의 아버지인 존 웨스트오버다. 그는 자신의 가정을 계시를 받은 곳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선지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는 자식을 견딜 다른 관점이 없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의 관점, 자신이 믿는 종교, 거기에서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계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니 이제 독립해 나아가려는 타라는 회개시켜야 할 대상에 불과하다. 타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눈 앞에는 스스로 생각할 줄 알고, 스스로 기도할 줄 아는 성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발 앞에 어린아이처럼 앉아 있지 않았다. (213쪽)

어떤 운명도 아버지와 그 여성을 함께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원히, 항상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아버지를 잃을 것이다. (214쪽) 


이 말이 핵심이다. 자, 나에게는 어른과 아이가 동시에 있다. 둘 다 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있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존재할 수 없다면,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이로 남아 가족들,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울타리 속에서 편안함을 누리며 살 것인가, 아니면 어른이 되어 아버지를 떠나 내 삶을 살아갈 것인가.


타라는 타일어 오빠의 말을 듣고 대학에 간다. 대학에 가서 새로운 문화를 만나게 되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그는 대학생이 되었지만 아직 아이와 헤어지지 않았다. 자신 속에 있는 아이 말을 듣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다 역사에 흥미를 지니고, 다른 관점을 알기 시작한다. 배움의 발견이다.


'내가 자각의 길에 들어섰고, 오빠, 아버지, 나 자신에 관해 아주 기초적인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건넨 전통에 의해 만들어져 왔지만, 고의적으로 혹은 실수로 그것이 어떤 전통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오직 다른 사람들의 인간성을 빼앗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담론에 목소리를 보태 왔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담론을 확대하고 그편에 서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힘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87쪽)


이 부분은 가족들, 특히 엄마와 언니인 오드리에게서 잘 나타난다. 이들은 가부장제인 가족 형태를 바꿀 수가 없다.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조금 저항을 했던 오드리는 가족에게서 배제되는 것이 두려워 자신의 생각을 바꾼다. 아니,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신념이 되었다. 나중에 타라에게 하는 말을 보면 섬뜩하지만, 사람은 그렇게 변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신념을 완전히 바꾼 사람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오드리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엄마 역시 마찬가지다. 엄마는 가부장제를 내면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숀이라는 오빠가 일상적으로 저지르는 폭력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나중에 문제제기하는 것을 막는다. 엄마에게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일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일이다. 그래서 엄마는 아빠와 함께가 아니라면 타라를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지킨다.


맹목이지만, 그들에게는 그 틀을 깨고 자신들을 바라볼 거리가 없다. 그들은 그 안에 있다. 자신들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교육만 있다. 아버지가 제시한 교육. 즉 아버지가 원하는 방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배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것을 잡지 않는다. 


그러나 집을 뛰쳐나온 자식들은 볼 수가 있다.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로 잘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잘못된 삶 속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버지의 교육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배움을 발견한다. 배움의 발견은 다른 관점을 지니게 하고,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그 과정이 비록 고통스러울지라도.


'누군가가 과거에 대해 아는 바는 항상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로부터 제한받게 될 거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을 바로 잡히는 일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잘못 알고 있던 규모가 너무도 커서 그것을 바로잡으면 세상 전체가 변할 정도였다. 이제 역사를 이해하는 길로 통하는 문을 ㅈ키는 위대한 문지기들이 어떻게 자신들의 무지와 편견을 해결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373쪽)


그렇다. 배움의 발견은 기쁨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엄청난 고통을 유발하기도 한다. 두려움, 고통, 그리고 인내, 그것으로 인한 자신의 분열. 하지만 무지와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절대로 자신을 가두고 있는 틀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내가 그때까지 해온 모든 노력, 몇 년 동안 해온 모든 공부는 바로 이 특권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지금 굴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쟁에 한번 지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내 정신의 소유권을 잃는다는 의미였다. 이것이 내게 요구되는 대가였다.' (471쪽)


 '그 소녀는 거울 속에 머물렀다. 그 이후에 내가 내린 결정들은 그 소녀는 내리지 않을 결정들   이었다. 그것들은 변화한 사람, 새로운 자아가 내린 결정들이었다.

  이 자아는 여러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변신, 탈바꿈, 허위, 배신.

  나는 그것을 교육이라 부른다.' (507쪽)


교육이라는 자아를 지니기 위해서 거쳐왔던 지난한 세월을 어찌 표현할 수 있을까? 타라는 너무도 힘든 과정을 거친다. 그럼에도 이겨낸다. 그렇다. 이미 타라는 배움을 통해 다른 세상을 만났기 때문이다. 다른 관점을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 속에 있던 아이와 이제는 헤어지게 된 것이다. 그 아이를 떠나보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책 저자의 말에서 '집에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아버지는 한 번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14쪽)고 했다. 그렇디. 아버지는 자신의 집에서 볼 수 있는 거리까지만 자식들을 허용했다. 그 경계를 벗어나는 삶을 자식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버지의 관점이고, 아버지의 교육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라는 신호는 타라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 아니, 찾는 것이 아니라 타라가 결정해야 한다. 아버지의 교육과는 다른 배움의 길을 찾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왕국에서 독립한 자신의 삶을 찾았기 때문에... 그 과정을 쓴 이 책은 한 편의 소설이다. 아마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분노로, 뭐 이따위 가족이 있어 하면서 책을 던져버릴 수도 있다. 아니면 저자가 지나치게 과장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지만 사실일 것이다. 종교 강요, 가정 폭력. 홈스쿨링을 빙자한 교육의 부재. 그리고 조금이라고 그 틀에서 벗어난 자식들을 배제하는 모습. 심해도 너무 심한 폭력이다. 아이들 머리를 쥐어박아도 경찰서에 갇히는 그런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런 일이 최근에 벌어지고 있었다니... 


자신의 관점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교육이 과연 진정한 교육인지, 그러한 교육을 지금도 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게 하는 책인데... 


정말 소설 같다. 그래서 한번 손에 잡으면 놓을 수가 없다. 결론이 궁금해져서. 이 글을 썼으니 적어도 저자가 죽지는 않았음에 안도하면서 읽는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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