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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방.악마와 선한 신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5
장 폴 사르트르 지음, 지영래 옮김 / 민음사 / 2013년 10월
평점 :
장 폴 사르트르.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이름이다. 문학자로서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실존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 있고.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통해 지식인이 지녀야 할 책무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사람이다. 또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의 계약결혼(?)으로도 알려진 사람이기도 한데. 그가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쓴 소설도 실존주의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번에 사르트르가 쓴 희곡을 읽었다.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책이기도 하고.
우선 '닫힌 방'이라고 하면 폐쇄된 세계를 연상한다. 출구가 없는 곳에 갇힌 세 사람.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존재하게 된다. 그들과 서로 어울리지 못할 때 그때 닫힌 공간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 처할까. 그 점을 볼 수 있게 하는 희곡이다.
출구가 없는 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지내야 할까?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힘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때는 공간은 닫히더라도 사람들 마음을 열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공간만이 아니라 관계도 닫히게 된다. 이 희곡 '닫힌 방'은 공간의 닫힘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닫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서로가 끊임없이 말을 하지만 그 말은 상대에게 가 닿지 않는다. 공간만큼이나 관계 역시 닫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희곡이다.
'악마와 선한 신'은 인간의 길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한다. 악마와 선한 신이라는 제목에서 모순을 느낀다. 그냥 '악마와 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떻게 신에게 수식어를 붙일 수가 있지. 신은 이미 선악의 개념을 넘어선 존재 아닌가.
그런데도 제목에 '선한(bon)'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신을 보는 것이다. 즉, 인간의 길은 신의 길과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군대를 이끌고 사람을 학살하는 앞부분의 괴츠가 악마에 해당한다면, 중간부분의 괴츠는 선한 신에 해당한다. 그런데 그는 신의 위치에 오르지 못하고 신의 뜻을 확인하는 인간에 불과하다. 자신이 악마에서 신으로 전환하려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선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이다. 완전한 신에게는 그런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수식어가 붙었다는 것 자체가 괴츠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그는 땅의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제목에서 보여주고 있다.
그 점을 보여주는 장면이 그가 사랑을 베풀려던 농민들은 이길 수 없는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전쟁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농민군들에 의해 학살당하다는 장면이다.
자신이 사랑을 베풀려던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는 괴츠. 그는 결국 인간의 길로 돌아온다. 인간은 악마도 신도 될 수 없다. 그 중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완전한 사랑도, 완전한 증오도 인간의 길에 속하지 않는다.
인간의 길은 바로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증오 사이에 있다. 균형이다.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친 것은 인간이 갈 길이 아니다. 악마 쪽이든 신 쪽이든 완전한 인간은 인간 사이에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가 없다.
괴츠는 악마와 신의 길을 좇다가 결국 인간의 길로 온다. 이제 그는 완전함을 포기한다. 그에게는 인간으로서 피를 흘리며 분노하고 사랑하고 절망하고 기뻐하는 그런 일이 기다리고 있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 소위 칠정(七情)이라고 하는 것을 지니고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인간은 거기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그것을 극복하려고 한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다른 인간들과 어울릴 수 있는 한계까지... 이것이 바로 중용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악마와 신 사이에서 인간의 길을 찾는 것은 결국 자신이 인간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에 인간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고고한 모습으로 홀로 지낼 수는 없다. 괴츠가 다양한 과정을 통해서 다시 농민들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 신부였던 하인리히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 어쩌면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인간의 길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까딱하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지만, 선한 신을 추구하면서 그에게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기는 것도 문제라는 것, 인간에게는 인간의 길이 있음을 생각해보라는 것이 이 희곡이 말하고자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